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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보는 한국경제 거목 정주영

정주영, '아들 뻘' 젊은 과학자에게 머리 숙이다

새롭게 보는 한국경제 거목 정주영(1915~2001) <29>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1976년 해가 저물던 무렵의 일이었다. 세계 최대의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따내야 할 절체절명의 순간이 다가오던 때였다. 

“우리는 지금 힘찬 도약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현재의 사정이 녹록하지는 않지만 위기는 또한 기회일 수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의 위기를 우리는 할 수 있다는 신념 하나로 똘똘 뭉쳐 헤쳐 나갑시다. 사람이 태어나 많은 일을 하다 죽지만 조국과 우리 겨레를 위해 일하는 것만큼 숭고하고 가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그런 기회가 온 것입니다.” 

정주영은 이렇게 현대 직원들에게 간곡하게 호소를 한 직후였다. 국가적으로도, 현대로서도 중대한 위기에 봉착하고 있었다. 주베일 산업항 공사는 그들에게도, 나라에 있어서도 사느냐 죽느냐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그날 밤 환갑을 넘긴 62살의 정주영은 20살이나 어린 아들 뻘되는 김영덕 박사를 직접 만났다. 김영덕 박사는 현대건설과는 견줄 수도 없는 세계 최고의 석유회사 아람코에 재직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는 캐나다에서 뉴욕으로 직장을 옮긴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해외 국적을 버리고 고국에 들어와서 현대건설과 함께 일해 주실 수 없나요?”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따내고 또 공사를 해나가기 위해서 김영덕 박사 같은 사람이야말로 현대에 꼭 필요한 인재였다. 그래서 정주영이 간곡하게 요청했지만 그는 제의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갓 아람코에 들어간 형편이어서 바로 나올 수는 없습니다. 대신 아람코를 대표해서 최선을 다해 기술자문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정주영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대로 물러설 정주영이 아니었다. 다음날 정주영은 김영덕 박사 내외의 울산조선소 방문을 직접 안내했다. 미국 캐나다 등 선진국 조선소나 중공업 시설을 직접 경험한 그였지만 울산조선소의 규모에 놀라고, 경부고속도로 구간 가운데 험난한 당제터널을 23일 만에 뚫었다는 말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그때의 일을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 현대건설이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역부족이란 생각을 한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울산조선소를 둘러보고 경부고속도로를 달려보면서 토목기술자인 내가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시설을 할 수 있고, 그런 철학을 가진 경영자가 있는 이상 주베일 항만공사도 가능할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정주영은 김영덕 박사를 설득하기 위해 전력을 쏟았다. 주베일 공사를 수주하긴 했지만 경험이 일천한 현대로서는 당시 지질학 분야 최고 권위자였던 김 박사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정주영은 저녁 식사자리에까지 연장하여 끈을 바짝 조이고 있었다. 지금 한국의 어려운 사정과 현대의 중동 진출이 얼마나 국가 경제에 중요한 사항인지 역설하고 또 역설했다. 한편 김 박사의 애국심에 기대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또 괌, 태국, 베트남 등 나라밖 건설 경험을 얘기하고, 조선 그리고 중공업 분야와 자동차 사업에서 세계 최고의 기업을 만들어 나가겠다는 간절한 포부도 설명했다. 그러면서 김 박사가 현대와 손을 잡아주기를 머리 조아려 가면서 읍소했다. 자신의 아들 뻘 되는 김 박사지만 정주영에게는 희망의 끈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라밖에서 사는 사람들 치고 애국심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특히 김 박사님은 나라사랑 정신이 그 누구보다 투철할 것이라 믿습니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조국을 위해 몸을 바쳐 주신다면 저희로서는 그보다 더한 영광이 없을 것입니다.” 

사실 김영덕 박사는 군사정권으로부터 나라밖으로 추방당한 몸이었다. 그는 강제적으로 나라를 떠나며 돌아올 기약도 없이 캐나다로 건너갔다. 그리고 아직은 고국에 돌아올 마음의 준비나 여건이 안 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김 박사는 아버지 뻘 되는 정주영의 간곡한 청을 들으면서 서서히 마음이 흔들렸다. 김영덕 박사의 당시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나는 고국에 돌아올 형편이 안 되었습니다. 추방당한 몸으로 아직 국내 상황도 완전히 풀린 상태가 아니었고, 아람코의 기술고문으로 간 지가 얼마 안 된 상황이었죠. 서울에 온 것은 아라비아에 파견되었다가 잠시 들른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이 내손을 꼭 붙잡고 간곡히 말씀하시는 데야 저도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지요. 더구나 당시 고국의 어려움을 알고 있었던 상태에서 애국심을 자극하는 정 회장님의 말씀에는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내 사정을 들어 고집만 피울 수는 없었습니다.” 

드디어 김영덕 박사는 정주영의 간절한 읍소에 손을 들고 말았다. 이로써 현대는 김용제를 주베일 현장소장, 입찰작전을 성공시킨 전갑원 상무를 공사주관, 기술책임자로는 김영덕 박사를 주축으로 중동 공사를 위한 본부를 꾸렸다. 

주베일 산업항 공사의 규모는 가히 상상할 수 없는 크기였다. 이곳을 설계한 영국의 항만과 해양구조물의 명문회사 윌리엄 할크로의 다니엘스 회장이 “이집트에 피라미드가 있다면 사우디아라비아에는 주베일 산업항”이 있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이 공사의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공사를 맡음으로써 정주영은 오일달러를 거둬들이고 이를 통해 조국근대화를 이루어 세계를 놀라게 하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으니 아들 뻘 되는 젊은 기술자에게 고개를 숙인들 무엇이 부끄러우랴 싶었다. 

공사를 수주한 뒤 정주영은 10층 빌딩만한 자켓 89개를 인도양 건너로 운반하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을 벌이게 된다. 공사관계자들도 놀랄만한 이 일은 공사 최고의 기술자 김영덕 박사도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현대는 정주영을 필두로 김영덕 박사와 중동본부의 모든 직원이 조국과 겨레를 위해 반드시 공사를 성공시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하나가 되었다. 그들은 주베일 공사를 공기 36달 만에 완벽하게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이 공사의 성공은 어느 누구보다도 정주영의 분명한 결단력과 추진력 그리고 신념이 없었던들 이루어낼 수 없는 난공사였음이 분명했다. 

김영덕 박사는 이때를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결국 나는 꼭 주베일공사를 위해 유학을 가서 학위를 따고 아람코에 입사하여 모든 것을 준비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는 원래 과학도로 운명을 믿지 않는데 그래도 이건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잘 짜인 각본 아닙니까? 나는 이 주베일 공사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 나의 일생에서 가장 큰 보람이자 행운이고 영광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는 정주영 회장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같이 일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겁니다. 그토록 담대하고 엄청난 구상을 하고 추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세상에 정주영 회장님 말고는 없지 않을까요? 나는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정주영 회장님은 경제 19단이라구요.” 

바둑에서는 9단을 입신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 김영덕 박사는 정주영을 서슴없이 경제 19단이라 했다. 바둑 9단들이 승부욕으로 한 수 한수 묘수를 쓰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정주영은 19단이었으니 바둑 9단이 문제가 아니었을 터였다. 아들 뻘 되는 어린 사람에게도 서슴없이 고개를 숙일 줄 아는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