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홍병기 [1869~1949] 선생은 1869년 11월 5일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이포리에서 홍익룡과 한익화 사이에서 2대 독자로 태어났다. 선생은 어려서 한학을 배우고 무예를 닦아 19세 때인 1887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24세 때인 1892년에 동학에 입교한 선생은 손병희의 휘하에서 무장, 영동, 보은, 음성, 공주 우금치전투 등에 참가하였다.
1905년 12월 동학이 천도교로 바뀐 후 천도교의 중앙총부에서 천도교의 정책과 노선을 결정하는 중요한 교직자로 활동하였다. 이후 1910년 한일합방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갖고 있던 선생은 1918년 말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의 윌슨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것을 알고 “우리 조선도 민족자결의 원칙에 의하여 독립이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1919년 2월 10일 무렵 권동진을 만나 구체적인 독립운동 방안을 모색한 선생은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 참석하여 민족대표와 함께 독립선언식을 참석하였고 독립선언식 거행 직후 곧 일본관헌에 체포되었다.
홍병기 독립투사
선생은 심문을 받을 때 판사가 “피고는 금후도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고 묻자, “그렇다. 기회만 있으면 운동을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예심과 최종판결이 나기까지 선생은 갖은 옥고를 치르고,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2년을 받았다.
경성감옥에서 1921년 11월 4일 오전, 동지들과 함께 출소한 선생은 1922년 7월 14일 고려혁명위원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고려혁명위원회는 국내에서 활동하기가 여의치 않자 연해주에서 러시아의 후원을 얻어 독립운동을 전개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이 활동의 일환으로 1924년 4월 5일 천도교최고비상혁명위원회를 재조직하고 이 위원회의 집행위원장에 선임되었다.
그 뒤 1926년 3월 29일 최동희, 양기탁, 오동진, 정원흠 등 11명 등은 고려혁명당을 창당하였다. 그러나 고려혁명당의 조직이 탄로나면서 1927년 1월 19일 체포되어 1928년 4월20일 징역2년을 선고받고 신의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선생은 삼일동지회의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12월 3일 삼일동지회의 일원으로 독립촉성선서식을 거행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봉대를 천명하였다.
또한 동학혁명을 기념하는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1947년 2월 9월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개최된 동학혁명 53주년 기념대회에 참가하여 동학혁명의 의의를 전파하는 활동을 벌였다.
선생은 해방 후 서울시 성동구 행당동 128번지에 거주하던 중 1949년 1월 17일 하오 40분 쯤 군악대원을 실은 트럭에 치여 다리가 절단되고 머리에 부상을 입었다. 즉시 국방부 제2육군 병원으로 호송되었으나 워낙 연로하여 1월 26일 하오 8시 15분, 81세를 일기로 환원(還元)하였다. 선생의 장례식은 경운동의 천도교당에서 교회장으로 거행되었다.
선생은 1962년 3월1일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으며 2009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자료: 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