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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백년편지] 순국열사 '김마리아'에게 고함 -황인자-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100년 편지에 대하여.....

100년 편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년(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입니다. 내가 안중근의사에게 편지를 쓰거나 내가 김구가 되어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1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역사와 상상이 조우하고 회동하는 100년 편지는 편지이자 편지로 쓰는 칼럼입니다. 100년 편지는 2010년 4월 13일에 시작해서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됩니다. 독자 여러분도 100년 편지에 동참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매주 화요일 100년 편지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문의: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02-3210-0411

 


순국열사 김마리아에게 고함 -황인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이제야 김마리아, 당신에게 고합니다. 당신은 잠자는 조선여자 깨워 횃불 들게하시고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셨습니다. 역사학자인 박용옥 교수는 당신을 위대한 독립운동가요, 교육자이며 여성운동가로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대한국민 이윤옥 시인은 당신을 이렇게 찬미합니다. 

세상을 구원한 예수의 어머니 동정녀처럼/ 닭 우는 소리 멈춘 동방의 조선 땅에/ 인자한 마리아로 나투시어/ 미혹의 나라를 밝히고/ 온 세상에 조선을 심은/ 한 그루 떨기나무 그 이름 김마리아/ 그대/ 무궁화동산에서 영원히 지지 않으리.” 

김마리아(1892~1944). 당신은 우리 민족 수난사상 민족혼으로 핀 한 떨기 무궁화 꽃입니다.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청춘과 사랑과 생명을 바친 항일여성운동계의 대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뒤늦게 당신의 투쟁사를 알게 되어 그를 교과서에 기록하고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 최근 정신 여·중고 교정에 세워진 김마리아 동상

당신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피는 살아 있다, 1960)도 제작하였는데, 당대 최고의 영화배우 황정순이 당신 역을 맡아 열연했습니다. 대한국민 박화성 작가는 여류한국’(1964)에서 애국과 신앙, 예지와 지성의 여인으로 김마리아 열사의 일생을 엮어 냈습니다. 당신이 가는 마지막 길을 지켰던 양아들 태국은 행방을 모르고 양녀인 배학복 권사도 얼마 전에 세상을 뜨셨으니 이제 우리 대한국민이 당신을 지키오리다. 대동강에 뿌려진 당신의 흔적을 기리기 위해서라도 기필코 남북통일을 이루어내고야 말겠소이다.  

김마리아, 당신은 1892년 황해도 소래에서 사자의 태몽을 품고 광산김씨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으나 가문의 보살핌을 받아 서울 정신여학교에서 수학, 졸업 후에는 모교 등에서 교편생활을 하고 두 차례 일본유학을 하였습니다. 일본 유학 중이던 19192, 2·8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이어 조국독립운동에 투신하고자 2·8독립 언서를 품에 지니고 일경의 감시를 피해 비밀리에 귀국, 조선 땅에도 거국적인 독립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전국 각지를 돌며 설파하여 3·1운동을 촉발시킨 장본인입니다.  

3·1운동 발발 직후엔 항일부녀단체인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전국적 규모로 조직, 활동하였습니다. 동경에서도 서울에서도 일경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 감행한 일이었으니 체포와 취조·투옥은 당연지사. 혹심한 고문과 옥고로 사경에 처하게 되자 병보석을 받아 입원 가료하던 중 망명을 획책, 철통같은 경계망을 뚫고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게 됩니다. 상하이 망명 중이던 192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에서 김구 선생과 함께 황해도 대의원에 선출됩니다. 임시의정원은 바로 국회의 전신이니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이 된 것입니다.

   
▲ 한때 광화문 태평로에 세워졌던 김마리아 동상
독립을 위해서는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큰 뜻을 품고 미국으로 재망명, 파크대, 시카고대, 콜롬비아대 등 미국 내 유명 대학에서 수학하면서 지도자로서 자질을 키웠습니다. 미국 망명 중에도 뉴욕에 있는 여성동지들을 규합하여 항일여성단체 근화회를 조직, 활동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형 집행이 만료되어 귀국하여 국내의 지식인들이 일제탄압에 굴복하여 친일로 변절해 가는 중에도 조국독립을 위해 그 의지를 꿋꿋이 지키며 활동하였습니다. 당신은 앞장서서 신사참배 반대를 선언했기에 일제의 감시와 압박을 더욱 심하게 받아야 했습니다. 일제의 갖은 고문과 긴 망명생활로 약해질 대로 약해진 당신은 1944년 고문 후유증 악화로 그토록 그리던 조국 광복을 목전에 두고 53세의 나이로 위대한 생의 막을 내렸습니다.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은 평소에 김마리아 같은 여성동지가 열 명만 있었던들 대한은 독립이 됐을 것이다라고 극찬하였고, 당시의 선교사들은 김마리아야말로 한국의 잔다르크, 이 세대의 한국 여인 중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라고 평한 바 있습니다.  

한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주제로 미국 유학 중 행한 한 연설에서 당신은 우리는 우리의 노력으로 성취될 때까지 우리 자신의 다리로 서야 하고 우리 자신의 투지로 싸워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진정한 지도력이 필요합니다라고 역설합니다. 당신이 말한 지도자란 진취적 기상, 협동적이고 일관된 언행일치, 이기적이 아닌 긍정적인 공익적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대한국민에게 여전히 절실한 지도력입니다. 

당신은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취지서에서 옛말에 이르기를 나라를 내 집같이 사랑하라 하였거니와 가족으로서 제 집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집이 완전할 수 없고, 국민으로서 제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 나라를 보존하기 어려운 것은 아무리 우부우부(愚夫愚婦)라 할지라도 밝히 알 수 있을 것이다.’고 나라사랑을 강조합니다. 오늘의 대한국민에게도 절실히 와 닿는 말씀입니다. 

독립전선의 동정녀 김마리아.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은 3·1운동으로써 절정을 이루어, 광복을 매듭짓기까지 기운찬 산맥으로 뻗어 나왔습니다. 그 독립운동 산맥 중에 두드러진 봉우리로, 금강석같이 눈부신 가장 대표적인 여성 한 분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김마리아 입니다.’ 제가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1960년대 중학 국어 교과서에 실린 내용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언제부터인가 당신은 교과서에서 사라졌으니 이는 우리 대한국민이 스스로 애써 찾지도 않고 세상에 널리 알리지도 못한 책임이 크다 할 것입니다. 당신을 취조했던 일본 검사까지도 논고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당신이 천재의 자질을 가지고 슬기와 용기와 과감한 애국정신으로 독립운동만을 전개한 그 일은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절대불변가치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그 책임 중의 하나가 바로 2·8독립선언일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하는 것이고 김마리아 연구를 활성화하고 김마리아 박물관을 건립하는 것 또한 우리들이 할 일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항일운동의 거점으로 삼았던 서울 종로구 연지동의 정신여학교 옛 교정을 김마리아 기념공원으로 조성하는 일도 추진해야 할 것입니다.  

조국과 여성을 비춘 불멸의 빛 김마리아를 세상에 다시 널리 알리는 우리 대한국민의 일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황인자

19대 국회의원(새누리당 비례대표)
안전행정위원회·여성가족위원회 위원
윤리특별위원회·국민안전혁신특별위원회 위원  

서울시 복지여성정책보좌관·여성가족정책관(1)
여성부 권익증진국장·차별개선국장(이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