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운강 할아버님! 저는 할아버님이 목숨으로 지켜낸 이 땅에서 시인으로 살고 있는 증손녀 순희 입니다. 다른 집안 같으면 증조부를 그냥 증조할아버님이라고 부르지만 가문에서는 제가 태어날 때 이미 아호 그대로 ‘운강 할아버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른들께 여쭤보지 않았지만 거기에는 우리 할아버님이 의병장, 그것도 전국 의병들의 수장이셨다는 가슴 벅찬 자긍심을 담았던 것입니다.
어린 시절, 고향집에는 할아버님 초상이 걸려 있었습니다. 지금 운강기념관에 있는 무관대례복을 입고 형형한 눈빛으로 바라보시는, 풍채가 크고 잘 생긴 영정 그 모습 말입니다. 저는 오빠들과 함께 할아버님의 초상을 올려다보며 옷깃을 여몄습니다.
▲ 운강 이강년 의병장
아버지께서 크지 않은 목소리로 할아버님의 생애를 말씀하셨습니다.
“운강 할아버님은 스물세 살에 무과에 급제, 정3품인 선전관까지 지내시고 갑신정변 때 낙향하셨다.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두 차례 의병을 일으키셨다. 첫 번은 1896년 국가 자존과 민족자존을 지키려고 일어서셨고, 제천의 의암 유인석 의병진과 합류해 세력을 확장한 뒤 수많은 전투를 치르셨다. 그리고 만주로도 가서 투쟁하셨다. 둘쨋 번은 1907년 봄, 나라가 일제의 야욕으로 벼랑에 섰을 때 다시 떨치고 일어나 일본군과 싸우셨고, 그해 7월 원주 배양산에서 고종황제의 밀지를 받으셨다.
‘선전관 이강년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노라. 양가(良家)의 재주 있는 자제들로 각각 의병을 일으키게 하며 소모장(召募將)을 임명하되 인장(印章)과 병부(兵符)를 새겨서 쓰도록 하라. 만일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관찰사든 수령이든 목을 베거나 파직하라. 이에 비밀히 어새(御璽)로써 조서(詔書)를 내리니 모든 일을 그대가 거행하라.’
운강 할아버님은 전국 40여 의병진이 모인 제천 의림지에서 총수인 도창의대장으로 추대되셨다. 그 뒤 조령 관문, 문경 갈평, 원주 추치, 죽령, 단양 고리평, 풍기 백자동, 인제 백담사에서 승승장구하시고 마침내 나라를 망국의 벼랑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셨다. 그러나 1908년 6월 청풍의 작성 전투에서 발목에 총탄을 맞아 일본군에 붙잡히셨다. 나라가 망하기 전이었으나 황실은 힘이 없어 황제의 밀지를 받았던 의병 총수의 사형을 막지 못했다. 운강 할아버님은 그해 9월 19일 서대문감옥에서 한스럽게 순국하셨다. ”
저는 아버님께 여쭈었습니다.
“그런데 왜 운강 할아버님 산소는 멀리 상주 땅에 있어요?”
아버지께서는 쓸쓸한 얼굴로 말씀하셨습니다.
“처음엔 선조이신 효령대군 능 아래 모셨으나 왜놈들이 파헤치려 해서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제천으로 옮겨 모셨지만, 그 또한 왜놈들이 방해를 하여 상주의 유림들이 몰래 모셔갔다. 자식들은 쫓기고 있었으므로 어쩔 수 없었단다.”
운강 할아버님 생가는 일본군이 불을 질러 없어지고 향나무 한 그루와 우물만 남아 있었지만 문경 땅 곳곳에 할아버님의 전설이 살아 있었습니다. 조국의 제단에 목숨 바친 의병장의 직계 손자 손녀, 이보다 가슴 뿌듯한 명예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운강 할아버님의 후손으로서 저희는 옷차림과 걸음걸이마저 단정히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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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강 이강년기념관(대야산 용추계곡) |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운강 증조부님을 따라 의병전쟁에 투신했던 할아버님들은 곤궁과 핍박의 세월을 겪으셨고 아버님과 사촌형제분들도 속절없이 그것을 물려받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긍지와 더불어 슬픔과 억울함도 저의 마음 깊은 곳에 고이게 되었습니다.
대학에 입학해 고향 문경을 떠난 뒤에 저는 의병장 후손이 겪는 슬픔과 억울함의 실체를 알게 됐습니다. 운강 할아버님이 순국하시고 2년 만에 나라는 일제에 강제합병당하고 말았습니다. ‘누가 이 땅에 사람이 없다 하랴!’ 할아버님의 1차 기병 격문에 있는 말처럼 항일전쟁은 줄기차게 이어졌지만 끝내 우리 손으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습니다. 8・15 광복이 찾아왔지만 남북분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할아버님의 무장항쟁 후예인 광복군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따돌려져서 건국의 주도권을 놓치고 말았고, 통탄스럽게도 일제통치에 협조했던 자들이 그것을 차지했던 것입니다. 제가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나라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들 일부가 친일의 전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님의 장엄한 생애는 여전히 빛을 잃고 있었습니다. 방학에 집에 내려가 영정 앞에 서면 운강 할아버님은 말씀하시는 듯했습니다. ‘나는 대가를 바라고 싸운 게 아니었다. 의병장의 후손은 내세우지 않고 묵묵해야 하느니라’. ‘할아버님, 맞습니다. 그러나 억울함을 지울 수 없습니다’. 저는 영정을 향해 속으로 말씀드렸습니다.
나라는 여전히 분단된 상태에 있지만, 날로 번영하여 올림픽과 월드컵축구를 개최하고 IT산업 세계 1위, 조선산업 1위, 자동차산업 4위,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그 속에서 저는 시를 쓰며 살고 있습니다. 국가보훈처, 독립기념관, 문경시청 등이 앞장서 운강 할아버님을 기리는 작업을 펼쳤습니다. 저는 어느 날 시어머님을 모시고 남편, 아이들과 더불어 고향 문경으로 갔습니다. 기념관의 운강 할아버님 영정 앞에 서서 식구들에게 제가 살아온 어린 시절을 이야기했습니다.
“에미야, 너와 네 할아버님이 자랑스럽구나.” 시어머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고 가족들은 눈시울이 젖은 저를 끌어안았습니다.
“너희들에게도 운강 할아버님 피가 흐르고 있다.”하고 저는 아이들에게 말했습니다. 증손녀인 제가 낳은 외손들이지만 할아버님의 거룩한 조국수호의 정신 DNA는 똑같이 흐를 테니까요.
운강 할아버님의 의병전쟁을 장편소설로 썼던 소설가 이원규 선생님은 제가 증손녀임을 알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체찰사 임명이 너무 늦었어요. 고종황제가 1차 의병 때 운강을 도체찰사로 임명했더라면 우리 역사가 달라졌겠지요. 비록 독립을 우리 손으로 쟁취하진 못했지만 운강 같은 분이 있었으니 우리 역사가 덜 부끄럽지요. 그분이 그렇게 죽어 항쟁이 줄기차게 이어졌으니까요.”
평생 저의 가슴에 벅찬 긍지와 슬픔을 함께 안겨 주셨던 운강 할아버님, 요즘은 할아버님 영정의 형형한 눈빛 속에 은은한 미소가 보입니다. ‘이제 됐다’ 하고 말씀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래도 괜찮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제가 인생의 이비(理非)를 알고 아쉬움도 녹여 버리는 나이가 된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이제 저의 안에 살아 있는 할아버님의 애국심과 한, 그리고 저의 어린 시절 의 긍지와 슬픔을 시로 풀어 쓰려 합니다. 할아버님! 편안히 쉬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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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 희
경북 문경 태생
단국대 한문교육과 졸업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2년 『심상』을 통해 등단, 시 창작과 함께 시를 가곡으로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으며, 가곡 독집 『어디로 가는가』(2010)를 냈다.
현재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기독교상담학과 재학 중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