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1421년 3월 24일, 세종이 임금으로 나라를 다스린 지 3년째 되던 해였다. 지금의 충무로 지역에 있던 인쇄 관청인 주자소가 왁자지껄하였다. 세종 임금이 친히 보낸 술 120병이 도착하였기 때문이다. 임금 심부름으로 온 내시는 주자소 관원들에게 술병의 의미를 설명하였다. 어명이오. 그대들 애쓴 탓에 인쇄 속도가 빨라져 더 많은 책을 빨리 찍어낼 수 있게 되었다고 임금님께서는 더없이 기뻐 하셨소. 그동안 고생 많았으니 오늘은 맘껏 쉬며 술을 마시고 회포를 풀라는 어명이오. ▲ 서울지하철 4호선 충무로역 5번 출구 극동빌딩 앞 화단 안 주자소터 표지석 세종은 인쇄술을 끊임없이 개량하여 문화의 꽃인 출판문화를 크게 드높이게 하였다. 인쇄 개량 전에는 글자를 구리판에 새겨 놓고 사이사이 납을 끓여 부어, 단단히 굳은 뒤에 찍었기 때문에 납이 많이 들고, 하루에 찍어내는 것이 두어 장에 불과하였다. 이때에 세종이 이천과 남급으로 하여금 구리판을 다시 주조하여 글자의 모양과 꼭 맞게 만들었더니, 납을 녹여 붓지 아니하여도 글자가 이동하지 아니하고 더 정확하여 하루에 수십 장에서 백장까지 찍어낼 수 있었다. 《자치통감강목》 같은
[그린경제/얼레빗 =김슬옹 교수] 1433년 9월 초, 강원도 어느 농촌, 가난한 시골 마을이었다. 한 아주머니가 이웃집 아저씨가 몹시 아프다는 말을 듣고 병문안을 하러 왔다. 아저씨는 어디가 아프대유? 어제부터 식은땀이 멈추질 않아요? 그럼 어서 의원님께 보이지 않구. 하루하루 벌어먹기 힘든데 그럴 형편이 되나유. 그럼 최좌수 댁에 《향약집성방》이라는 민간치료법을 모아 놓은 책이 있다고 하니, 그 집 가서 물어봄세. 두 아낙이 최좌수 댁에 가니 마을 어른 구실을 톡톡히 하는 최좌수가 《향약집성방》이라는 책에서 실제 그 병세에 해당하는 처방을 친절하게 일러 주었다. 책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밀 쭉정이 적당한 양을 세지도 약하지도 않은 불에서 보드랗게 가루 내어 한번에 두 숟가락씩 미음에 타서 자주 먹는다. 묵은 밀을 마른 대추와 같이 달여 먹어도 좋다. 실제로 이와 같이 하니 식은땀이 멈췄다. 이렇게 어려울 때 《향약집성방》이란 책이 무척 요긴하게 의원 구실을 하였다. 마침 세종이 1433년 8월 27일에 향약집성방을 전라도와 강원도에 나누어 인쇄할 것을 명했기에 강원도 농촌에까지 이 책이 들어올 수 있었다. 동네에 한두 권뿐이었지만 급할 때 응급조
[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때는 세종 12년인 1430년 5월 어느 날이었다. 충청도 어느 시골 허름한 집 앞에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웅성거렸다. “어머머. 우리 임금은 역시 성군이셔. 토지세에 관한 법을 만드셨는데 집집마다 그 법에 대한 의견을 들으신대.” “우리 같은 무지렁이한테도 의견을 듣는 세상이라니. 참 살기 좋은 세상이네.” 모인 백성들은 상기된 얼굴로 한 마디씩 하느라 즐거운 표정이었다. 관청에서 관리가 어떤 종이에다가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찬반 의견을 묻던 중이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국민 여론 조사였다. 세종은 관리의 부정으로 농민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는 논밭에 대한 세금 제도(전세제도, 공법)를 개혁하기 위해 1430년(세종12) 3월부터 8월까지 여론조사를 했다. 전국 17만여 명의 백성이 투표에 참여하여, 9만 8,657명이 찬성, 7만 4,148명이 반대하는 결과를 얻어 냈다. 세종은 밥은 백성의 하늘이라고 했을 만큼 먹고 사는 문제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이를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농사짓는 법을 잘 가르쳐 농사를 과학적으로 짓게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농사짓는 땅에 대한 세금을 백성
[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세종이 임금이 된지 4년째 되던 1422년 음력 1월 1일. 달이 해를 가리는 일식이 일어날 때가 되자 세종을 비롯한 많은 신하들은 초저하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종은 하얀 옷을 입고 인정전의 제단 위에 올라가 일식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많은 신하들도 하얀 옷을 입고 임금 곁에서 임금과 하늘을 번갈아 바라보며 서 있었다. ▲ 고려 사람들은 물동이에 물을 담고 해가림(일식)을 보았다.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 개기일식 모습(왼쪽), 일식장면을 관찰하는 모습(《일식과 월식 이야기》- 나일성.이정복) 일식 계산을 담당한 이천봉 과학자는 더욱 초조했다. 미리 계산한 것에서 어긋나면 큰일 나기 때문이다. 결국 일식은 계산한 시간보다 무려 15분 늦게 일어났다. 이때는 하늘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원리를 파악하여 표준 시간을 정하는 것은 중국 황제의 권한이었다. 따라서 중국에서 만든 천문학책인 역법서를 들여다 사용하니 오차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하늘은 중국의 하늘이 아니었다. 역법서를 중국에서 들여온다 해도 조선 하늘의 움직임을 알고 백성들에게 알려주는 것은 조선 임금만의 특권이었기에 세종은 하늘이 돌아가는 것을 정
[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때는 조선시대, 1434년 어느 겨울. 하루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 어스름이었다. 겨울이라 그런지 해가 더욱 짧았다. 남루한 한 상인이 한양 도성을 향해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성남 남한산성 근처 모란 시장으로 물건을 팔러 나갔던 이막동이라는 상인이었다. 한양(서울) 도성 근처에 왔을 때 도성 쪽에서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아이쿠.. 큰 일 났다. 곧 도성 문이 닫히겠구나. 얼른 뛰어가야겠다. 다행히도 상인은 종이 열 번 정도 울렸을 때 도성문에 도착했고 아슬아슬하게 성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들어오고 한 숨 돌렸을 때 28번의 종소리가 끝이 났다. 그 상인은 성 안 한양 시장이 있는 운종가(지금의 서울 종로) 종루 근처에서한 동료 상인의 집에서 잠을 잤다. 새벽이 되자 종루의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또 다른 장이 열리는 이천 쪽으로 가기 위해 새벽 일찍 일어났다. 꼬끼오 닭이 우는 새벽이었다. 33번 울리자 성 밖으로 나서기 위해 길을 재촉했다. ▲ 조선시대 4대문의 하나인 숭례문, 4대문은 도성을 드나들 수 있는 문으로 33회의 파(바라)와 28회의 인정(인경)을 쳐서 성문을 여닫았다. 이
[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정인지, 박연, 최항, 신숙주, 성삼문, 김종서, 최윤덕, 이순지, 김담, 이천, 장영실 세종시대를 빛낸 인재들, 끝이 없다. 분야를 가릴 것도 없다. 특히 정인지처럼 음악, 언어, 과학 등 여러 분야에서 빛을 낸 융합형 인재도 한둘이 아니다. 심지어 노비 출신 장영실도 있다. 이들이 있었기에 세종은 나라를 다스린 32년간 의료, 음악, 국방, 과학 등 온갖 분야의 업적을 이루었고 당대 최고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 세종의 인재 양성은 크게 네 가지로 이루어졌다. 첫째는 교육, 둘째는 기관과 제도를 통한 인재 양성, 셋째는 인재들의 연구를 장려하고 선진 학문을 배워오게 하는 오늘날의 유학과 같은 해외 파견, 넷째 공동 연구나 협동 작업으로 인한 재능 발휘의 극대화였다. 세종은 인재 양성이야말로 국가 발전의 바탕임을 실제 정책을 통해 실천하고 이룬 셈이다. 인재 양성의 가장 기본이 되는 길은 교육이며 이러한 교육의 바탕은 책이고 책의 바탕은 문자다. 세종 때 이르러 각종 학교(향교, 학당) 제도가 크게 정비 되었고 평민 이상이라면 누구나 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더욱이 책을 매우 좋아하고 그 가치와 효용성을 잘
[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놀라운 청음 사건 1433년 설날, 경복궁에서는 새해맞이 아악(정아한 음악이라는 뜻으로 의식용 음악) 연주회가 열렸다. 편경 연주를 다 들은 세종이 이렇게 말했다. 아홉 번째 소리가 음이 약간 높은 듯하구나. 어찌된 일인가? 이 때 음악 총감독이었던 박연은 깜작 놀라 직접 편경을 살펴보니 아홉 번째 돌에 먹물이 아직 마르지 않았다. ▲ 《세종실록》 오례의에 있는 편경 그림(왼쪽), 1433년 음력 1월1일 세종의 지음도(세종대왕기념사업회 소장) 박연이 먹물을 말리니 음이 제대로 나왔다. 멀찍이서 연주를 듣고 반음보다 더 섬세한 음을 잡아냈던 세종. 이처럼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세종은 실제로 음악가이자 작곡가였다. 박연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잘 어울리는 악기를 만들고 표준음을 제정하고 실제 많은 노래를 작곡했다. 세종은 음악 재능이 뛰어나 어린 시절 양녕 형에게 거문고를 가르쳐 주기도 하였고 정간보란 악보를 창안하였으며 정간보로 작곡된 세종악보가 세종실록 부록으로 무려 640여 쪽이나 실려 있다. 이렇게 바로잡은 음악을 바탕으로 세종은 음악 정치를 통해 백성들이 평화롭고 조화롭게 사는 태평성대를 열었다. 15세기에 표준음을
[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함께하는 세상 만들기 권혜리 김슬옹 ◈ 작품 이해하기 ㄷ, ㅇ, ㅅ, ㄱ, ㅒ, ㅓ, ㅣ를 여러 각도로 휘어지게 함으로써 자음과 모음이 그림처럼 보이도록 디자인 하였습니다. 풍차처럼 보이는 큰 바람개비 모양은 ㄷ, ㅒ, ㅓ로 만들었는데, 이 날개에서 나오는 바람은 우리가 꿈을 향해 나아갈 때 닥쳐오는 시련과 방해를 의미합니다. 그 아래로 ㄱ으로 이루어진 계단을 타고 ㅇ, ㅅ, ㅣ로 만든 사람들이 올라가고 있습니다. 큰 ㅇ 속에 있는 하늘 풍경은 동그란 구름과 ㅅ을 닮은 종이비행기가 어우러져 꿈을 펼칠 수 있을 것만 같은 평화로운 세상입니다. 요즘처럼 서로 경쟁하는 각박한 생활 속에서 조금은 여유를 갖고 주변을 돌아보아,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라 함께 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이 작품을 디자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세상에 한글이 있습니다. ◈ 작품 속 숨은 이야기 그들이 사는 세상 난쟁이 마을에는 하늘로 가는 계단이 있었습니다. 그 곳 사람들은 모두 저 멀고 먼 푸른 하늘 가까이 가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의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있었지만, 내가 남보다 먼저 하늘에 닿기만을
[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1434년 가을걷이가 끝나갈 무렵,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있는 혜정교와 종묘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웅성 댔다. 어머, 저게 우리 임금님께서 누구나 시각을 알 수 있게 만든 오목해시계래. 우리 같은 까막눈 백성들이 시각을 알 수 있게 시각 표시를 동물로 표시했대. 말 그림을 바로 가리키면 낮 12시래. ▲ [사진 1] 세종 때 앙부일구를 전시해 놓았던 받침돌, 현재 탑골 공원 한 구석에 있다. ▲ [사진 2]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옆의 혜정교터 표시 비석. 세종은 이곳에 오목해시계를 설치하여 오고가는 백성들이 시간을 알게 하였다. ▲ [사진 3] 종묘에 복원해 놓은 오목해시계와 동물이 표시 된 내부 모습 번다한 길거리에 있어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시각을 보고 한 마디씩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엄마아빠 따라 나온 덩치 큰 어린애들은 돌 위에 올라가 시간을 살피기도 했다. 사진 1이 바로 그 당시 오목해시계(앙부일구, 仰釜日晷)가 설치되어 있던 돌이다. 길이가 1미터 남짓인데다가 2단 위에 있어 네다섯 살 아이들까지도 돌 위에 올라가 시간을 알 수 있었다. 혜정교에는 복원이 안 되어 있고 기념 비석만 있고(사진 2
[그린경제/얼레빗=김슬용 교수] 세종 26년, 1444년 여름이었다. 세종은 이렇게 말한다. 나라는 백성으로 근본을 삼고, 백성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 것인데 농사는 입는 것과 먹는 것의 근원으로 임금의 정치에서 먼저 힘써야 할 것이다_1444년(세종 26년) 윤7월 25일 그 어느 시대건 먹는 문제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는 것은 제대로 먹어야 사람답게 이 세상을 떠받치는 사람구실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종은 바로 가장 중요한 사람의 문제, 백성의 문제를 정확히 꿰뚫었다. 정치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백성들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터전을 만들고 법을 만들고 더 나은 제도를 만들면 되는 것이었다. ▲ 세종 때 정초 등이 꼭 필요한 농사지식만 모아 펴낸 《농사직설(農事直說)》 1. 굶주리는 백성들 세종이 임금이 된 그 다음 해인 1419년(세종 1년)에 흉년이 들고 온갖 자연 재해가 끊이질 않았다. 세종은 굶어 죽는 백성들을 보고 그들을 제대로 구제하지 못하는 현실이 가슴이 아파 신하들에게 2월 12일에 이렇게 말했다. “백성(국민)은 나라의 근본이요,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과 같이 우러러보는 것이니라. 요즈음 홍수와 가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