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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때보다 못한 지금의 재난극복

“세종정신”을 되살리자 15

[한국문화신문 = 김슬옹 교수]  세종 5년인 1423년은 세종이 임금으로서 본격적으로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한 때다. 상왕인 태종이 1422년에 죽기까지 아버지 영향력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종 5년은 세종의 재능을 시험이나 하듯 극심한 천재지변에 시달려야 했다. 극심한 가뭄으로 굶주리는 백성이 온 나라에 넘쳐났다. 함길도에서는 밀과 비슷한 흙으로 떡과 죽을 만들어 먹을 정도로 참혹했다(세종실록 1423/03/13). 

함길도의 화주에 흙이 있는데, 빛깔과 성질이 밀과 같았다. 굶주린 백성들이 이 흙을 파서 떡과 죽을 만들어 먹으매, 굶주림을 면하게 되었는데, 그 맛은 메밀 음식과 비슷하였다._세종실록 1423/03/13 

즉위 때부터 몇 년째 이어지는 가뭄이었다. 세종은 이 위기를 어떻게 이겨냈을까? 

 

   
▲ 세종 5년 먹을 것이 없어 흙으로 떡을 해먹는 백성이 있었다. 이에 세종은 모두 자신의 탓이라 여겼다(그림 이무성 한국 화가)

첫째는 위기 상황을 총체적으로 보고 거기에 맞게 적절하게 대응하였다. 19일 충청도에서는 농사에 실패한 각 고을 사람들이 구걸하려고 다른 지방으로 떠돌았다. 그런데 각 지역의 관리들은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 고을마다 경계를 세워 막을 것을 건의했다. 

병조에서 충청도 감사 공문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농사를 실패한 각 고을 사람들이 다른 지방으로 떠도는 사람이 많이 있으니, 원컨대 경계를 엄격하게 세워서 그들의 떠돌아다니는 것을 금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명하여 경계를 없애고 수령에게 곡진히 진휼하여 떠돌아다니지 못하게 하고, 이미 떠돌아다니는 자라도 또한 돌려보내지 말고 각기 그 곳에서 편히 지내게 하여 구휼하고 아울러 다른 도에까지 공문을 보내도록 하였다._세종실록 1423/01/09) 

현직 관리들은 당장 굶어죽는 백성들보다는 손쉽게 처리하는 행정 처리를 더 중요하게 여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세종은 경계를 세우기 전에 먼저 그들을 곡진히 보살핀 뒤 떠돌아다니지 못하게 하고, 이미 떠돌아다니는 자라도 또한 돌려보내지 말고 각기 그 곳에서 먼저 구휼하라고 지시했다. 굶주림을 해결하는 것이 더 중요하므로 가장 기본적인 사람 위주의 대책을 세운 것이다.  

둘째는 약자에 대한 배려이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약자가 제일 고통을 받게 마련이다. 늙어 병들었거나 아기를 낳고 돌아와 병을 앓은 후에 기운이 약한 사람은 병이 회복될 때까지 넉넉히 콩과 쌀을 주도록 했다(실록 1423/02/04). 세종 4년에도 길을 잃은 아이들을 수령이 직접 보호할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길에 떠돌아다니는 굶주린 백성들을 그 고을의 수령과 각 지역 역 관리자로 하여금 진심껏 구호하여, 그들로 하여금 굶고 얼게 하지 말도록 하고, 그 잃어버린 아이들은 친히 감독하고 보호하고 길러줄 것이며, 곧 보고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세종실록 1422/11/03

  셋째는 지도자로서의 성찰이다. 신하들에게 내린 교지에서 백성들의 근심과 고통을 걱정하면서 조용히 허물된 까닭을 살펴보니 죄는 실로 나에게 있다.”라고 간절한 마음을 토로하고 있다. 더불어 백성들이 무엇이 이롭고 고통스러운지를 마음껏 직언할 것을 당부하였다.  

임금이 가뭄을 걱정하여 교지를 내리기를,

내 들으니, ‘임금이 덕이 없고, 정사가 고르지 못하면, 하늘이 재앙을 보여 잘 다스리지 못함을 경계한다.’ 하는데, 내가 변변하지 못한 몸으로 백성들의 위에 있으면서 밝음을 비추어 주지 못하고, 덕은 능히 편안하게 하여 주지 못하여, 수재와 한재로 흉년이 해마다 그치지 아니하여, 백성들은 근심과 고통으로 집을 떠나 떠돌아다니고, 창고도 텅 비어서 구제할 수 없다. 조용히 허물된 까닭을 살펴보니, 죄는 실로 나에게 있다. 마음이 아프고 낯이 없어서 이렇게 할 줄을 알지 못하겠다. 행여 충직한 말을 들어서 행실을 닦아 화기를 부를까 하노니, 모든 관리들은 제각기 힘써 하늘의 경계를 생각하여, 위로 과인의 잘못과, 정부 정책의 그릇된 것과, 아래로 시골의 편안함과 불편함, 백성들의 이롭고 병 되는 것을 거리낌 없이 마음껏 직언하여, 나의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걱정하는 지극한 생각에 부응되게 하라.”고 하였다._세종실록 1423/04/25 

넷째는 과학적인 조사와 대책이다. 세종은 환관을 직접 황해, 강원, 평안도로 나누어 보내 굶어죽은 사람의 유무와 수령들의 구제하는 것이 부지런한가, 게으른가를 직접 살피게 하였다(05/03). 세종 4년에도 권맹손 등 측근 신하들을 직접 보내 지방 관리들의 허위 보고 유무를 감찰하게 하여 정확한 실태 파악을 철저히 하였다. 

다섯째는 어려운 문제에 집중하고 의견을 들어 함께 해결하는 것이다. 경연을 그렇게 좋아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세종도 비상 대책 앞에서는 하늘이 가물어 마음이 글에 있지 않으므로 경연에 나아가지 않는다.”라고 하였다(세종실록 1423/07/12). 더 나아가 과제 시험의 논술 문제로도 출제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굶주림으로 호소함이 없게 하고, 들에는 버려둔 송장이 없게 하는 방법은 어디 있을까?”라고 물은 것이다.  

여섯째는 엄격한 관리 책임을 물어 기강을 바로 세웠다. 평산 부사가 능히 흉년을 구제하지 못하자 곤장 60대의 벌을 내리고 파면하지는 않았다(06/27).  

일곱째는 재난 대비 지침 규정을 구체적으로 만들어 대비하였다. 같은 날짜에 병조에서 건의한 경복궁 화재 재난 대비법은 오늘날 소방 대비법을 부끄럽게 만들 정도로 치밀하고 철저하다. 미리 설치할 소방 설비와 위기시에 대응 요령과 각 부처의 협조 전략과 단계별 대응 전략까지 세워 놓았다. 이 모든 지혜와 정책은 사람을 중심에 놓는 정치관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지난해 온 국민을 비탄에 빠지게 한 각종 재난은 대부분 사람 잘못과 제도 잘못에서 비롯되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엄청난 재난을 당하고도 제대로 된 성찰을 하지 않고 근본을 바꿀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는 점이다. 세종 지혜를 다시 살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