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4. 임금의 익선관은 매미 날개를 닮았다 조선 후기 조재삼의 책 ≪송남잡지(松南雜識)≫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매미 날개가 나지 않은 모양의 관은 서리(書吏)의 것이고 ‘승두(蠅頭)’ 곧 파리 대가리라고 한다. 날개가 나려고 하는 모양은 모든 벼슬아치 곧 백관의 관이니 ‘사모(紗帽)’이고, 날개가 선 모양은 임금의 관 곧 익선관(翼善冠, 翼蟬冠)이다.” 그를 보면 조선시대 관은 한결같이 매미 날개를 기준으로 하는데 날개가 없는 것은 서리, 날개가 옆으로 난 것은 백관, 날개가 위로 선 것은 임금의 관이었습니다. 이렇게 관이 매미 날개 모양을 한 것은 늘 매미의 오덕을 잊지말라는 뜻이었답니다. 매미의 입이 곧게 뻗은 것은 선비의 갓끈과 같은데 배우고 익혀 선정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슬이나 나무 진을 먹고사니 맑음(淸)이요. 농부가 가꾼 곡식이나 채소를 해치지 않으니 염치(濂恥)가 있고, 다른 곤충과 달리 집이 없으니 검소(儉素)하며, 늦가을 때를 맞추어 죽으니 신의(信義)가 있다는 것이지요.
1532. 농민뿐 아니라 세조임금도 마셨던 술 막걸리 세조실록 8년(1462) 4월 14일 자 기록에 보면 “내가 젊었을 때에 화천군(花川君)의 집에 이르니, (중략) 막걸리 두어 잔을 마시고 나왔다.”라는 세조가 한 말이 보입니다. 또 고려 이규보의 글에도 나오는 것을 보면 막걸리는 우리 겨레가 오랫동안 마셔온 전통술이며, 농민뿐만 아니라 임금도 마셨던 술입니다. 막걸리는 빛깔이 뜨물처럼 희고 탁한데 6∼7도로 알코올 성분이 적은 술이며,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고려의 명문장가 이규보는 “나그네 창자는 박주(薄酒)로 씻는다”는 시구를 남겼는데 이 박주도 막걸리라고 하지요. 또 배꽃 필 때 누룩을 만든다 해서 이화주(梨花酒)였고, 탁주(濁酒)·농주(農酒)·백주(白酒)·회주(灰酒) 등으로도 불렀습니다. 그런가 하면 제주도에 유배된 인목대비의 어머니 노씨가 술지게미를 재탕한 막걸리를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해서 모주(母酒)라는 이름도 얻었다고 합니다.
1532. 한뎃잠·등걸잠·멍석잠, 여러 가지 재미있는 잠 이름들 요즘도 지하도 등에 가면 노숙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노숙을 토박이말로 한데서 자는 잠 곧 “한뎃잠”이라고 합니다. 그와 비슷한 말인 “등걸잠”은 옷을 입은 채 아무것도 덮지 아니하고 아무 데나 쓰러져 자는 잠이지요. 또 “멍석잠”은 너무 피곤하여 아무 데서나 쓰러져 자는 잠을 말합니다. 잠 이름 가운데에는 잠자는 모습으로 지은 이름들도 있습니다. 우선 “괭이잠”은 깊이 들지 못하고 자주 깨면서 자는 잠인데 괭이는 고양이의 준말로 괭이가 자는 모습을 빗댔지요. “언제 떠날지 몰라 괭이잠을 잤더니 온종일 피곤하다.”처럼 씁니다. 또 “개잠”은 개처럼 머리와 팔다리를 오그리고 옆으로 누워 자는 잠이며, “나비잠”은 갓난아이가 두 팔을 머리 위로 벌리고 자는 잠, “갈치잠”은 비좁은 방에서 여럿이 모로(비껴서, 대각선으로) 끼어 자는 잠을 말합니다.
1531. 조선 전기에 먹었던 양해·저파식혜·죽순식혜 전순은 세종, 문종, 세조 세 임금 어의를 지냈으며, 의식동원(醫食同源) 곧 약과 음식은 근원이 같다는 것을 중심으로 한 한국 최초의 식이요법책인 《식료찬요(食療纂要)》를 펴냈습니다. 그 전순이 1459년경에 펴낸 요리책이자 농업책 《산가요록(山家要錄)》에는 식혜의 종류를 무려 7가지나 소개했지요. 물고기+쌀밥, 소금+끓인 소금물+밀가루가 재료인 어해(魚醢)와 소의 위+후추, 소금, 쌀밥, 누룩+꿩고기(닭고기)가 재료인 양해, 생돼지껍질+소금+쌀밥, 후추가루+누룩이 재료인 저파식혜가 있습니다. 또 도라지+소금+쌀밥의 도라지식혜, 죽순+소금+쌀밥의 죽순식혜, 꿩+소금+밀가루의 꿩식혜, 쌀을 굵게 갈아 쑨 죽인 원미죽+물고기+소금의 원미식혜도 보이지요. 그로 미루어 보면 지금 일부 지역에서만 향토식품으로 남아 있지만 조선시대엔 보편적인 음식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1530. 월리 3%, 연리 10%를 넘지 못하게 한 이자제한법 세종실록 14년(1432) 3월 19일 내용을 보면 상정소(詳定所)는 엄격한 이자제한법을 주청해 재가를 얻었습니다. 아무리 세월이 오래되어도 원금은 그대로 원금이고, 이자는 액수를 넘지 못하는 원칙에 따라 연간 최고이자가 10%이고, 월간 이자는 3%를 넘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 원금은 눕혀두고[臥] 해마다 이자만 받는 와채(臥債)가 생기기도 했지요. 하지만, 상정소에서 “월리로 이자를 받는 법을 금한다면, 가난하고 약한 자는 빌려 쓸 곳이 없을 것이니 이를 폐지할 수는 없다.”라면서 이자 받는 것을 완전히 폐지하지는 않습니다. 상정소는 조선 시대 나라의 법규·법전을 만들거나 정책과 제도를 마련하려고 설치한 임시기구입니다. 요즘 연리를 60%로 제한했는데도 폭탄적인 사채 이자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이 있는 것에 견줘보면 세종임금 때는 혁명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1528. 달걀에도 뼈가 있다? 조선 후기 학자 조재삼의 책 ≪송남잡지(松南雜識)≫에는 청백리 황희 이야기가 나옵니다. 조선 세종 때 영의정 황희는 매우 청렴하여 관복도 한 벌로 빨아 입을 지경이었습니다. 세종임금은 황 정승을 안쓰럽게 여겨 도와줄 방법을 생각한 끝에 “내일 아침 일찍 남대문을 열었을 때부터 문을 닫을 때까지 문 안으로 들어오는 물건을 다 사서 황 정승에게 주어라."라고 하였지요. 그러나 그날 뜻밖에도 새벽부터 몰아친 폭풍우 때문에 문을 드나드는 장사치가 한 명도 없었는데 다 어두워져 문을 닫으려 할 때 겨우 달걀 한 꾸러미를 샀습니다. 하지만, 황희가 달걀을 가지고 집으로 와 삶아 먹으려고 하자 달걀이 모두 곯아서 한 알도 먹을 수가 없었다지요. 그래서 “계란에도 뼈가 있다.”라는 뜻인 “계란유골(鷄卵有骨)”이란 사자성어가 생겼습니다. 비슷한 뜻의 '도둑을 맞으려면 개도 안 짖는다.'라는 속담도 있지요.
1528. 조선시대 육의전 상인들의 “복가지타기” 조선시대 육의전에는 상인들이 공동으로 모시는 재신당(財神堂)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제사가 있는 날 육의전 상가의 자녀들에게 신용을 가르치는 행사가 벌어졌습니다. 행사는 먼저 신당 옆 아름드리 느티나무에 아이들이 올라가 나뭇가지를 붙들고 늘어지게 합니다. 그리고 가지 끝으로 조금씩 옮겨가게 하지요. 그러는 동안 바지 끈이 느슨해져 바지가 벗겨지고 그것을 보는 행인들이 손가락질하며 웃어도 손을 놓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가지 끝에 이르면 한 손을 놓으라 합니다. 정말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지요. 이를 '복가지타기'라 하는데 한번 복인 곧 단골을 잡으면 놓지 말기를 “가지타기”처럼 하라는 신용 교육입니다. 그만큼 육의전 상인들은 신용을 귀하게 생각했고, 단골손님 명부인 ‘복첩’을 넘겨주는 것이 그들의 상속 관례였습니다. 복첩은 신주와 나란히 모실 정도였고, 육의전의 규모는 가게의 크기나 거래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복첩의 두께가 결정했지요.
1527. 식사예절, 맛만 탐하지 말고 약처럼 먹으라 “내가 먹을 이 음식이 얼마나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여기 놓였는지를 생각해보라. 밭 갈고, 씨 뿌리고, 거두고, 찧고, 까불고, 요리하기까지 그 많은 과정이 있음을 생각하라. 한 사람이 먹는 것은 열 사람이 애쓴 것이니 어찌 소중하지 않겠는가?” 이 말은 규합총서에 나오는 식사예절 곧 식시오계(食時五戒)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밖에 또 다른 것은 “음식을 먹기 전에 자기 할 도리를 다했느냐를 생각해야 한다. 어버이를 섬기는 것은 물론 나라에 충성하고, 스스로 몸을 닦아 이름을 떨쳤느냐를 늘 생각하고, 그것을 하지 못했을 때 어찌 맛을 탐할 수 있겠는가?”도 있습니다. 그리고 “탐내는 마음을 막아 참다운 성정을 쌓아야 한다.”, “모든 음식에는 저마다 영양과 기운을 북돋우는 힘이 있으니 음식의 맛에 지나치게 취하지 말고 약처럼 먹으라.”, “마땅히 할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 따위도 있습니다.
1526. 봄에는 명지바람이 꽃멀미를 만듭니다 이른 봄에는 ‘꽃샘바람’, ‘살바람’, ‘소소리바람’ 같은 찬 바람이 불더니 이젠 완연한 봄입니다. 그래서 솔솔 부는 봄바람인 ‘실바람’, 보드랍고 화창한 ‘명지바람’이 붑니다. 그런 바람은 꽃이 화창한 봄 꽃눈깨비, 꽃보라, 꽃멀미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꽃멀미는 꽃의 아름다움이나 향기에 취하여 어지럼증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다 초여름이 되면 모낼 무렵 오랫동안 부는 아침 동풍과 저녁 북서풍인 ‘피죽바람’으로 바뀝니다. 또 가을에는 초가을 남쪽에서 불러오는 시원한 ‘건들마’, 초가을에 부는 동풍 ‘강쇠바람’과 ‘색바람’, 가을에 부는 신선한 ‘막새바람’, 서리 내린 아침에 부는 ‘서릿바람’이 있지요. 또 겨울엔 문틈 사이로 부는 매우 춥게 느껴지는 ‘황소바람’과 살을 에는 듯 독하게 부는 몹시 찬 ‘고추바람’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말하는 ‘꽁무니바람’입니다.
1525. 오는 일요일은 제비가 돌아오는 삼짇날 오늘은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는 음력 3월 3일 삼짇날인데 상사(上巳)·원사(元巳)·중삼(重三)·상제(上除)라고도 합니다. 또 이날을 답청절(踏靑節)이라고도 하는데 이날 들에 나가 파랗게 난 풀을 밟는 풍습에서 유래합니다. 삼짇날 진달래꽃을 뜯어다가 쌀가루에 반죽하여 참기름을 발라 지지는 꽃전[花煎], 녹두가루를 반죽하여 익힌 다음 가늘게 썰어 꿀을 타고 잣을 넣어서 먹는 화면(花麵)을 즐깁니다. 또 나비를 보고 점을 치기도 하는데 노랑나비나 호랑나비를 먼저 보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고, 흰나비를 먼저 보면 부모의 상을 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삼짇날 머리를 감으면 머리카락이 물이 흐르듯 아름다워진다고 했지요. “제비맞이”라는 풍속도 있는데 봄에 제비를 처음 보았을 때, 그 제비에게 절을 세 번 하고 왼손으로 옷고름을 풀었다가 다시 여미면 여름에 더위가 들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