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4. 남자들 삶의 공간 사랑채 이야기 사랑방은 사랑채의 주요 공간으로 남자주인과 귀한 손님이 지내는 공간이었습니다. 양반가의 사랑방은 잠을 자는 외에도 책 읽고 그림 그리며, 거문고를 뜯는 것은 물론 손님을 맞는 등의 많은 일이 이루어졌던 중요한 방이지요. 선비들이 기거하던 사랑채는 유교적 삶을 지향하는 선비의식 때문에 사랑방의 가구나 장식은 매우 간소하게 꾸며져 보통 방석 몇 개와 작은 서안(책상), 그리고 다과·책·꽃병 등을 올려놓는 네모 반듯한 사방탁자, 편지 등을 꽂아 두는 고비와 문방사우 등이 있었습니다. 그 사랑방이 있는 곳은 사랑채입니다. 부유한 양반 집안은 사랑채가 따로 있고 사랑채에는 사랑방과 사랑대청 그리고 다락처럼 높게 만든 누마루도 있었지요. 하지만, 보통의 민가에서는 주로 대문 가까이 있는 바깥쪽 방을 남자들이 새끼 꼬고 짚신 삼던 사랑방으로 사용했습니다.
1513. 꽃피는 봄에는 명지바람·실바람이 붑니다 내일(토박이말 올제)은 겨울잠 자던 동물들이 깨어나는 경칩입니다. 드디어 봄이 온 것이지요. 하지만, 아직 이른 봄이어서 “꽃샘바람”, 살 속을 기어드는 맵고 찬 “소소리바람”이나 “살바람”이 붑니다. 그래도 머지않아 그 바람은 보드랍고 화창한 “명지바람(명주바람)”과 솔솔 부는 “실바람”이 불어오겠지요. 그런 봄에 부는 바람들은 모두 남쪽에서 불어오는 “마파람”일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가을에도 여러 가지 바람이 있습니다. 초가을에 남쪽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건들마”, 동쪽에서 부는 “강쇠바람”, 신선한 “색바람”이 있으며, 서리 내린 아침에 부는 “서릿바람”도 있지요. 어떤 바람이든 살을 에는 듯 독하게 부는 “고추바람”이나 좁은 곳으로 가늘게 불어오지만 매우 춥게 느껴지는 “황소바람”만 아니면 좋을 것입니다. 뒤에서 불어오는 “꽁무니바람”은 재미있습니다.
1512. 왕비는 아미산 굴뚝을 보며 어떤 생각에 젖었을까? 태종 때 경복궁 경회루가 있는 연못에서 파낸 흙으로 교태전 뒤뜰에 인공동산을 세웠는데 이를 아미산이라 합니다. 그 아미산 기슭에 세워진 보물 제811호 굴뚝이 있습니다. 교태전의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연기가 뒷마당 땅 밑에 만들어진 연기길 곧 연도(煙道)를 따라 자연스럽게 아미산 굴뚝 위로 피어오르지요. 이 같은 구조는 연기가 좀 더 멀리 효과적으로 빠져나가게 해 불편을 줄여 주었습니다. 또 6각형으로 된 아미산 굴뚝의 벽면에는 덩굴무늬, 학, 박쥐, 봉황, 소나무, 매화, 국화, 불로초, 바위, 새, 사슴 따위의 상서로운 무늬가 아름답게 돋을새김 되어 있지요. 자연과의 조화, 더 나아가 자연과 하나 되길 원했던 우리 겨레만이 만들 수 있었던 작품일 것입니다. 교태전의 주인이었던 왕비는 아미산과 굴뚝 그리고 그 굴뚝을 타고 오르는 연기를 바라보면서 어떤 생각에 젖었을까요?
1511. 개다리소반, 통영반이란 이름의 소반을 아시나요? 우리 겨레가 밥을 먹을 때 쓰던 자그마한 상은 소반(小盤)입니다. 그 소반을 만드는 전통적 기법을 전수받은 장인은 "소반장(小盤匠)"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9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소반은 지방마다 고유의 특징을 가지고 발달했는데, 만든 고장의 이름이 소반의 고유한 이름으로 붙어 나주반·통영반·해주반·기호반·안주반 따위가 유명합니다. 소반 다리의 모양에 따른 종류로는 다리가 개의 다리처럼 구부정하다는 뜻의 개다리소반(구족반), 호랑이 다리를 닮은 호족반(虎足盤), 대나무 모양으로 만든 죽절반(竹節盤), 다리 대신 편평한 받침을 붙인 은족반(隱足盤) 등이 있지요. 또 윗판의 모양에 따른 것으로는 반달 모양의 반달상(半月床), 음식을 차려 내는 장방형의 큰 교자상(交子床), 여덟 사람이 둘러앉을 만하게 만든 네모 반듯하고 큰 팔선상(八仙床), 음식을 머리에 이고 나를 수 있게 한 공고상 따위가 있습니다.
1510. 기혼여성들에게 꼭 필요했던 장신구 비녀 예부터 비녀(잠:簪)는 우리 기혼 여성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장신구였습니다. 여자가 혼인하면 머리를 올려 뒤통수에 쪽(낭자)을 쪘으며 비녀는 그 쪽을 고정하려는 도구였지요. 그 비녀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완성해주는 상징이었으며 정절과 품위의 표현이었습니다. 비녀의 재료는 금·은·백동·놋·진주·비취·산·나무·대[竹]·뿔 비녀 등이 있지요. 형태로 본 비녀 종류는 용잠(龍簪)·봉황 모양의 봉잠·원앙잠·죽절잠(竹節簪)·목단잠(木丹簪)·석류잠·국화잠·호도잠·심잠(簪)·두잠(豆簪)·완두잠(腕豆簪) 따위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나 이런 비녀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금이나 주옥 등으로 만든 비녀는 상류층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으며 서민층에서는 나무나 뿔 등으로 된 비녀만을 사용하였지요. 특히 용잠 봉잠 등은 결혼식 등 큰 행사 때만 꽂았던 것입니다. 참고로 장신구는 토박이말로 치렛감 또는 꾸미개입니다.
1509. 88올림픽 식전행사를 장식한 고싸움놀이 지난 1988년 88서울올림픽 식전행사에 두 개의 고가 상대를 향하여 앞으로 질주하다 머리를 부딪쳐 하늘로 치솟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이를 보고 많은 사람은 땅을 박차 오르며 하늘로 오르는 용을 닮아 강렬한 힘을 느꼈다고들 했습니다. 이는 광주 남구 칠석동 옻돌마을에서 음력 정월 초순경부터 2월 초하루까지 하는 고싸움놀이로 중요무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옻돌마을에 전해오는 얘기에 따르면, 이 마을이 황소가 쭈그리고 앉아 있는 모양이어서 터가 거세기 때문에, 그 기운을 누르려고 시작했다고 합니다. 고싸움은 처음엔 10살 정도의 어린아이부터 시작하여 다음날에는 15살 정도의 아이들이 가담하고, 이후 20세 살의 청년들이 참가한 뒤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하게 됩니다. 줄다리기와 마찬가지로 풍년을 비손하는 농경의식의 한 형태이며, 놀이를 통하여 마을 사람들의 협동심과 단결력을 다지는 집단놀이입니다.
1508. 일식은 해가림, 월식은 달가림입니다 달이 해를 가려 생기는 것을 “일식(日蝕)”이라고 합니다. 대신 지구가 달을 가리면 “월식(月蝕)”이라고 하죠. 일식과 월식 모두 “좀먹을 식(蝕)”이란 한자를 씁니다. 이 “蝕”은 좀먹거나 썩어들어간 상처를 뜻하기 때문에 일식과 월식은 별로 좋지 않은 말입니다. 그런데 이 일식과 월식에도 훨씬 느낌도 좋고 과학적인 토박이말 “해가림”과 “달가림”이 있었지만 쓰지 않아서 잊혔습니다. 또 재미있는 토박이말이 있습니다. 초승달이나 그믐달을 지방에 따라서 “손톱달” 또는 “갈고리달”이라고 씁니다. “손톱달”은 친근하고 앙증맞은 느낌이 들지만 “갈고리달”은 무서운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한밤중에 뒤척이다가 뜰에 나와보니 우듬지에 걸린 갈고리달이 처연한 빛을 흘리고 있었다.”, “손톱달만 한 달빛이라도 있었으면 그 밤이 그렇게 무섭고 불안하지는 않았으리라”같이 분위기에 맞게 쓰면 좋을 일입니다. 참고 :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우리말 풀이사전”, 박남일, 서해문집
1507. 소나무 때문에 생긴 헛소문과 위안제 선조실록 17권 16년(1583년) 기록을 보면 소나무 소문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소나무는 “송목금벌(松木禁伐)”이라 하여 함부로 벨 수 없었는데, “소나무 벤 자를 적발하여 함경북도 북단 경원으로 들여보낸다는 헛소문에 경기도 안의 백성이 선동되어 소나무로 울타리를 한 자, 혹은 집을 지은 지 얼마 안 된 자들이 너도나도 헐거나 불태우고 땅에다 묻기도 했는데, 며칠 내로 그 소문은 호남과 영남까지 번져 소란이 그치지 않았다.”라는 이야기였지요. 그런가 하면 영조 12년 종묘 영녕전 담장 밖의 큰 소나무가 비바람에 넘어졌는데, 그 소리가 궁궐 안에까지 들렸으므로, ‘위안제(慰安祭)’라는 제사를 지내도록 했습니다. 또 정조 16년에는 바람에 쓰러진 안면도의 소나무를 소금 굽는 일에 쓰도록 허락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이렇게 조선시대는 쓰러진 소나무의 처리도 허락받을 정도로 소나무를 귀하게 여겼습니다.
1506. 따뜻한 불의 온기가 다가온다는 봄 입춘이 봄의 시작이라지만 봄은 아무래도 우수와 경칩으로 시작됩니다. 우수는 24절기 중 두 번째로 올해는 2월 18일이었고, 경칩은 24절기의 세 번째로 올해는 3월 5일입니다. 이 우수∙경칩을 맞아 이제 우리 곁에 성큼 다가온 봄에 대해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말 '봄'의 말밑(어원)에 대해서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불의 옛말 '블'(火)과 오다의 명사형 '옴'(來)이 합쳐진 '블+옴'에서 'ᄅ' 받침이 떨어져 나가면서 '봄'이 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말 봄의 의미는 따뜻한 불의 온기가 다가옴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이제 동장군은 물러가고 드디어 불의 온기 곧 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종요로운 것은 자연만이 아닌 내 마음 안에 훈훈한 온기가 살아나야 하지요. 그래서 내 마음에 이미 봄이 왔다고 스스로 다독거려 봄은 어떨까요?
1505. 남명의 거친 상소도 존중되었던 조선사회 "전하의 나랏일이 이미 잘못되어서 나라의 근본이 이미 무너졌고 하늘의 뜻이 가버렸으며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퇴계 이황과 함께 16세기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으로 불렸던 남명 조식(1501~1572)은 자신의 사직 상소문에서 임금과 조정을 날이 선 문장으로 과감하게 지적했습니다. 당시는 사화 시대이며, 임금의 외척이 온갖 횡포를 부리던 때였지만 남명은 이런 현실을 비판하는 선비의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당시 이 상소문으로 ‘임금에게 불경을 범했다.’라며 남명에게 벌을 주자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대신이나 사관들이 ‘남명의 상소는 표현이 적절하지 못할 뿐 그 나라 사랑 마음은 높이 살 만하다.’거나, ‘남명에게 벌을 주면 언로가 막힌다.’라는 논리로 파문을 가라앉혔지요. 절대군주 시대 그것도 사화가 툭하면 벌어지던 때 있었던 이 일과 지금의 사회는 어떻게 다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