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5. 한반도의 신기한 출토품, 거친무늬거울 “거친무늬거울”은 청동기 전기에 썼던 무늬가 거칠고 선이 굵은 청동거울입니다. 한반도의 “거친무늬거울”은 뒷면에 두 개 혹은 세 개의 꼭지가 달렸고, 기하학 무늬가 장식된 것이 주요 특징이어서 다뉴경, 다뉴기하학문경, 다뉴세문경 등으로도 불리며, 거울 뒷면의 무늬가 정교한 잔무늬거울과 구분하여 조문경(粗文鏡)이라고도 합니다. 이 거친무늬거울 뒷면에는 한가운데를 중심점으로 하여 컴퍼스로 그린 여러 줄의 동그라미와 길이 1cm도 되지 않는 네모꼴 또는 세모꼴의 안에 20여 개의 가느다란 선을 채웠습니다. 그런데 이 무늬를 새긴 수법, 특히 지름 2cm가 채 되지 않는 동그라미 내에 20여 개의 동심원을 그린 수법은 정말 놀랍습니다. 최근 한 전문연구자가 숭실대 박물관에 있는 국보 다뉴세문경의 무늬를 재현하는데 꼬박 한 달이 걸렸다고 할 정도이지요.
1494. 입춘 날 대문에 붙이는 춘련 “입춘대길” 입춘이 되면 새봄을 맞이하는 뜻으로 대궐에서는 신하들이 지은 '춘첩자(春帖子)'를 붙이고, 민간에서는 손수 새로운 글귀를 짓거나, 옛사람의 아름다운 글귀를 따다가 써서 봄을 축하하는데 이를 '춘련(春聯)'이라 하지요. 이 춘련들은 집안의 기둥이나 대문, 문설주 등에 두루 붙입니다. 대련에 흔히 쓰이는 글귀는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가장 많이 쓰이는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은 “입춘에는 크게 좋은 일이 있고, 새해가 시작됨에 경사스러운 일이 많기를 바랍니다.’라는 뜻입니다. 또 '수여산(壽如山) 부여해(富如海)'는 “산처럼 장수하고, 바다처럼 부유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뜻이지요. 그밖에 '소지황금출(掃地黃金出) 개문백복래(開門百福來)'는 “땅을 쓸면 황금이 나오고, 문을 열면 온갖 복이 들어오기를 바랍니다.”라는 뜻을 지녔습니다.
1493. 시를 쓴 두루마리가 산더미처럼 쌓인 백전(百戰) “우리나라에서는 오로지 과목(科目)만으로 선비를 뽑기 때문에 예전부터 이름난 정승들이 모두 다 백전(白戰)을 거쳐 진출(進出)하였고” 위는 정조실록 5권, 2년(1778년) 2월 9일 2번째 기사 “부교리 남학문이 여러 가지 폐습에 대해 상소하다.”라는 글에 있는 내용입니다. 사전에 백전은 무기를 쓰지 않고 맨손으로 하는 싸움 또는 문인들끼리 글재주를 겨루는 다툼이라고 했는데 다른 말로는 백일장이지요. 조선후기 중인들은 시와 글을 짓는 시회를 결성하였고, 백전(白戰)을 열었습니다. 이 중에서도 18세기 중인문화의 중심지였던 인왕산 아래 송석원에서 봄과 가을에 열린 백전에는 수백 명이 몰려들었지요. 백전은 참가하는 것 자체를 영광으로 여겼고, 순라꾼도 백전에 참가한다면 잡지 않았다고 합니다. 백전 때면 참가자들이 쓴 시를 쓴 두루마리 곧 시축(詩軸)이 산더미처럼 쌓였지요.
1492. “자리보기”, 새색시 꽃잠 잔 자리를 구경하는 일 결혼식을 한 뒤 신혼부부는 “집들이”라는 이름으로 친지를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하고 어울려 놉니다. 이때 초대받은 손님들은 신혼부부 침실을 구경하며 부부생활과 관련하여 짓궂은 농담을 합니다. 이런 풍습은 옛날 “자리보기”와 같은 풍습입니다. “자리보기”는 “집들이”처럼 신랑 신부가 첫날밤을 지낸 다음 날 친지들을 초대하여 음식을 먹고 노는 일로 특히 새색시의 꽃잠(신랑 신부가 처음으로 함께 자는 잠)을 잔 자리를 구경합니다. “자리보기”와 달리 혼인한 뒤 신랑 신부를 일가에서 처음으로 초대하는 일은 “반살미”지요. 그밖에 시집가거나 장가들러 가는 길은 “첫길”, 새색시가 혼인한 며칠 뒤에 시부모를 뵈러 가는 예식은 간단한 복장으로 풀고 본다는 뜻의 “풀보기”입니다. 참 아내가 임신했을 때 남편이 주변 남자들에게 한턱 내는 일은 "양거지"이지요.
1491. 백가지 꽃으로 빚어 백가지 병을 다스리는 백화주 요즘 많은 사람은 술을 취하려고 마십니다. 하지만, 원래 우리 겨레는 술을 몸과 마음을 조화롭게 관리하려는 방편으로 먹었다고 합니다. 술 이전에 약으로 생각했고 ‘백약의 으뜸’이라는 지위까지 받았지요. 특히 백가지 꽃으로 술을 빚었다는 “백화주(百花酒)”는 더욱 그렇습니다. 백화주는 허준 ≪동의보감≫, 서유구 ≪임원십육지≫, 빙허가 이씨 ≪규합총서≫ 같은 책에 빚는 방법이 자세히 나와 았습니다. 백화주는 맨 먼저 눈을 뚫고 꽃을 핀다는 매화부터 서리 내릴 때 피는 국화까지 꽃을 모아 말립니다. 그리고 찬 기운이 세상을 덮는 10월 중하순쯤에 술을 담가 완성하는 데는 거의 100일이 걸리지요. 1924년 나온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 이용만)》에 “꽃을 밥에 버무려서 누룩을 술 밑에 넣고 익은 다음 먹으면 몸에 좋다. 백가지 병을 다스리고 오래 산다고 한다.”라고 백화주를 소개했습니다.
1490. 벗과 함께 놀면서 공부하게 한 왕세자 교육 요즘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가 친구를 짓밟고서라도 좋은 성적을 받기를 바랍니다. 오로지 자신의 자녀가 일류 대학에 들어가서 출세하는 데 온 힘을 다해야 할 뿐 친구와 노는 것은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왕세자 교육은 이와 달랐습니다. 임금이 되려면 학문을 닦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벗과 친하게 지내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또 한창 뛰어놀아야 할 나이에 꼬빡 앉아 공부에만 매달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도 알았었지요. 그래서 조선시대 왕세자 교육에선 “배동(陪童)”을 꼭 두도록 했습니다. 배동은 원자와 동년배 아이들을 뽑아 어울려 놀면서 함께 공부하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원자의 교육에 배동을 두도록 한 것은 1402년(태종 2) 원자의 교육을 위해 성균관 동북쪽에 학궁(學宮)을 세우고 공신들의 자제를 불러 함께 공부하도록 한 것이 최초입니다.
1489. 설날의 세시풍속 “양괭이 쫓기” 우리 설날의 세시풍속 가운데는 ‘양괭이 쫓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양괭이 또는 야광귀(夜光鬼)라는 귀신은 설날 밤, 사람들이 사는 집에 내려와 아이들의 신을 두루 신어보고 발에 맞으면 신고 가버립니다. 그러면 그해 그 신의 주인에게는 불길한 일이 일어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이 귀신이 무서워 모두 신을 감추거나 뒤집어 놓은 다음 잠을 잤지요. 그리고 채를 마루 벽에 걸거나 장대에 걸어 뜰에 두었습니다. 그러면 양괭이가 와서 수없이 구멍이 나있는 신기한 물건(채)이 있는 것을 보고 그 구멍을 세느라고 아이들의 신을 훔칠 생각을 잊고 있다가 닭이 울면 도망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설날의 세시풍속에는 세주불온, 문안비, 청참, 오행점, 원일소발 따위의 재미있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섣달 그믐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희어진다는 것을 빼고는 모두 잊었습니다. 눈썹이 희어지는 건 ‘해지킴’ 또는 '수세(守歲)한다'라고 했지요.
1488. 설날의 말밑(어원)은 무엇일까요? 며칠 뒤면 우리 겨레의 큰 명절 설날입니다. 그 설의 말밑(어원)을 살펴보면 “설다, 낯설다”의 “설”이라는 어근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는데 그럴 듯하지요? 처음 가보는 곳, 처음 만나는 사람은 낯선 곳이며 낯선 사람입니다. 따라서 설은 새해라는 정신적ㆍ문화적 낯섦의 의미로 “낯 설은 날”로 생각했고, 이 “설은 날”이 “설날”로 바뀌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섧다”에서 왔다고도 생각합니다. 한 해가 지남으로써 점차 늙어 가는 처지를 서글퍼하는 말이지요. 그런데 가장 그럴 듯한 것은 “삼가다”라는 뜻을 지닌 “사리다”의 “살”에서 비롯했다는 설입니다. 각종 세시풍속 책에는 설을 신일(愼日)이라 하여 '삼가고 조심하는 날'로 표현했습니다. 몸과 마음을 바짝 죄어 조심하고 가다듬어 새해를 시작하라는 뜻으로 보는 것이지요. 우리 모두 설날을 맞으며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 새해를 시작해보지 않겠습니까?
1487. 과거낙방생 위로 잔치였던 백일장 우리가 학생 시절 참여해보기도 했던 백일장(白日場)의 유래는 무엇일까요? 백일장은 조선시대 지방에서 유학공부 하는 선비들의 학업을 장려하려고 시문으로 시험을 보던 것입니다. 과거 형식을 본떠 시제(詩題)를 내걸고 즉석에서 시문을 지은 다음 장원(壯元)을 뽑아 연회를 베풀고 상을 주었습니다. 1414년(태종 14) 태종이 성균관 명륜당에서 성균관 유생 500여 명에게 시무책(時務策) 곧 나라의 중요한 일에 대한 방안을 물어 시험을 본 데서 비롯했지요. 벼슬길과는 관계가 없는 백일장은 과거(科擧)낙방생 위로와 과거지망생의 명예욕을 충족시켜 주는 잔치였습니다. 하지만,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에 보면, 조선 후기에 일자무식꾼이 남의 글을 빌려 시험지를 내고, 시험지의 심사에 수령의 자제와 기녀까지도 관여하는 것은 물론 수령을 욕하다 잡히는 등 난장판이 되었다고 합니다.
1486. 오행 철학이 담긴 우리 겨레의 음식 우리 겨레는 음양오행(陰陽五行)이란 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까닭에 음식은 오행과 관련된 것이 많지요. 우선 우리 겨레는 쌀, 보리, 조, 콩, 기장으로 오곡밥을 지어 먹고 반찬도 다섯 가지 나물로 오색을 맞추었습니다. 또 잔칫상에 올려지는 국수에도 장수를 기원하는 오색 고명을 얹었고 마늘·달래·무릇·김장파·실파의 오훈채(五葷菜)에서도 전형적인 오방색(파랑, 빨강, 노랑, 하양, 검정)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오방색의 다섯 가지 빛깔은 바로 오미(五味) 곧 단맛, 신맛, 매운맛, 쓴맛, 짠맛의 조화인 오행의 음식임을 드러냅니다. 오색이 의미하는 신체 장기와 맛을 보면 것은 파랑은 간장·신맛, 빨강은 심장·쓴맛, 노랑은 비장·단맛, 흰빛은 폐장·매운맛, 검정은 신장·짠맛으로 풀이합니다. 그래서 다섯 가지 오방색 음식을 먹으면 신체의 모든 기관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건강해진다고 믿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