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5. 400년 전 허균, 글은 간략하고 쉽게 쓰라고 말하다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쓴 허균은 “어렵고 교묘한 말로 꾸민 글이 최고의 경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것은 문장의 재앙(災殃)이다. 글이란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제대로 전달될 수 있도록 쉽고 간략하게 써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조선 문예부흥기를 이끈 정조는 서경(書經)에서 군더더기 글을 몽땅 들어내고 단 100편만을 취한 공자를 예로 듭니다. 정조는 “글은 복잡하고 어수선하기보다 간략해야 한다. 엄청나게 많은 분량의 책이 있어도 어렵고 복잡하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것은 고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도 제대로 맛볼 수 없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400년 전 허균도, 200년 전의 정조임금도 이렇게 간략하고 쉽게 쓰는 것이 글쓰기의 슬기로움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외국어와 어려운 한자말을 섞는 것은 물론 길게 늘어놓아 어렵고 복잡하게 글을 써놓고 자신이 유식한 체하는 어리석은 사람도 있지요.
1484. 조선시대 기병대는 풍안경(고글?)을 썼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가 쓴 ≪입연기(入燕記)≫를 보면 청나라 연경에 연행사 일행으로 떠나는 사위 이덕무에게 장인이 베로 만든 적삼과 바지 두 벌 그리고 풍안경(風眼鏡) 하나를 주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풍안경은 눈과 렌즈 사이의 공간을 막은 안경으로 먼지나 바람이 눈에 들어가지 않게 한 요즘의 고글과 비슷한 것입니다. 조선 후기 오군영의 하나인 금위영(禁衛營)은 말 타는 기병이 많았습니다. 이 금위영에 지급된 군수물자 중 풍안경은 무려 530면으로 기병에게 한 개씩 주었을 정도라고 합니다. 말을 타고 달리면 흙먼지가 생겨서 눈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이 풍안경은 기병대에게 필수품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엔 석회가루나 쇳가루를 방사해 적의 시력을 상실케 하는 화학전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때도 꼭 필요했습니다. 또 중국으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에게 선물로도 많이 주었다지요.
1483. 한복바지, 사람을 감싸주는 넉넉한 옷 양복바지는 허리둘레의 치수를 1인치의 오차도 없이 딱 맞게 옷을 마릅니다. 이 정확한 치수 개념이 오늘날의 과학을 이루어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람의 허리는 언제나 같은 치수일 수가 없습니다. 밥을 먹었을 때와 굶었을 때가 다르고, 건강할 때와 병이 들었을 때가 다르지요. 그것은 콘크리트로 만든 건축물과 다르게 살아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복바지는 생명체에 걸맞게 아예 넉넉하게 마름질합니다. 허리를 끈으로 처리하여 몸이 불면 덜 조이고, 몸이 마르면 더 조여 입도록 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넉넉한 허리로 나와 이웃이 같이 입을 수도 있으며, 사람을 감싸주는 옷으로 관절에 부담을 주지 않습니다. 또 서양옷은 형태가 있어서 벗으면 옷걸이에 걸어 놓지만 한복은 걸지 않고 개켜둡니다. 그래서 서양옷 마름질은 입체재단이라고 하며, 한복의 마름질은 평면재단이라고 합니다.
1482. 거문고, 군자가 바른길로 나아가게 하는 악기 1610년(광해군 2년) 양덕수(梁德壽)라는 사람이 펴낸 거문고 악보 ≪양금신보(梁琴新譜)≫에는 “거문고는 음악을 통솔하는 악기이므로 군자가 마땅히 거느려서 바른길로 나가게 하는 것(琴者樂之統也故君子所當御也).”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거문고를 "백악지장(百樂之長)" 곧 모든 악기의 으뜸이라고 한 말과 같은 이야기라 하겠지요. 그래서 조선시대 음악을 연주할 때는 전문 음악인들이 연주하는 다른 악기보다는 선비가 연주하는 거문고가 그 중심에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예로부터 거문고나 가야금을 귀하게 여겼는데 그 까닭은 무엇일까요? 옛 사람들은 소리가 계속 울릴 때보다는 소리가 그쳤을 때 그 소리의 빈자리를 채워주려는 데서 마음이 자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리가 계속 이어지는 관악기보다 소리가 뚝뚝 끊어지는 거문고나 가야금을 좋은 악기로 쳤던 것이지요.
1481. 다산을 위대한 사람으로 만든 유배 “약용이 바닷가로 귀양을 오자, 어린 시절에 학문에 뜻을 두었던 것을 생각했다. 하지만, 20년 동안 세상의 험한 길에 빠져 지내느라 옛 성현들의 가르침에 대해 많은 공부를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제야 그럴 겨를을 얻었다.’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기뻐했다. (鏞旣謫海上念幼年志學 二十年沈淪世路 不復知先王大道今得暇矣 遂欣然自慶)” 위 글은 다산 정약용이 직접 쓴 자신의 묘지글입니다. 다산은 19세기가 시작되는 1801년 시기와 질투에 의한 모략과 중상에 빠져 남도 끝 마을 강진으로 유배를 당합니다. 40살 한창 꽃 피워야 할 즈음 그는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다산은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며 어린 시절 뜻을 두었던 학문을 닦는데 매진했지요. 그 결과 다산은 《목민심서》, 《경세유표》등 무려 492권의 책을 펴냈습니다. 다산의 18년 유배는 그를 위대한 사람으로 만든 세월이 된 것입니다.
1480. 포스트잇 대신 “찌”란 말을 쓰면 어떨까요? 책상 앞에 눈에 띄게 붙여둘 수 있게 만든 메모장을 흔히 “포스트잇”이록 합니다. 그런데 이 “포스트잇(Post-it)”은 미국기업 3M이 소유한 상표이름입니다. 상표이름인 이 “포스트잇”을 굳이 써야 할까요? 어떤 사람은 “붙임쪽지”라는 말을 쓰기도 하지만, 원래 토박이말에는 “찌”라는 것이 있습니다. “찌”는 “낚시찌”의 준말인 낱말이기도 하면서 “특히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하려고 글을 써서 붙여놓는 좁고 기름한 종이”를 말하는 낱말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말을 전하거나 잊지 않으려고 간략하게 적어두는 글”을 "memo"라는 외래어로 씁니다. 그런데 이 말도 “적바림”이란 토박이말로 쓸 수가 있습니다. “적바림”은 “나중에 참고하려고 글로 간단히 적어 둠. 또는 그런 기록”을 말하지요. 토박이말 찌, 적바림 대신 포스트잇, 메모로 써야 유식한가요?
1479. 충절과 정절을 지켰던 패도를 만드는 장인, 장도장 패도는 사대부와 부녀자들이 생활용과 호신용으로 찼던 길이 10~20cm가량의 작은 칼을 말합니다. 원래 선비들은 자신의 충절을 이 패도로 지켰고, 부녀자들은 자신의 정절을 지키려는 상징으로 찼는데 나중에는 매듭에 달아 장식용으로도 썼기 때문에 장도(粧刀)라고도 불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상의원(尙衣院)에서 도자장(刀子匠) 6명이 궁중의 장도를 만들었으며 민간에서는 전라도 광양·곡성 그리고 경상도 울산·영주·울진 등이 장도를 만들기가 성행했지요. 원래 장도는 도자장·소목장(小木匠)·조각장·백동장(白銅匠)이 칼집·칼날·칼자루를 나눠 만들고 장식을 하였지만, 요즘은 “장도장(粧刀匠)” 혼자서 아울러 만듭니다. “장도장”은 197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60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기능보유자는 광양 박용기 선생입니다. 박용기 선생은 14살 때부터 스승인 유명한 패도장 고 장익성으로부터 전수받았다고 합니다.
1478. 궁중 임산부의 태교와 특별영양식 궁중에서 왕비나 후궁이 임신을 하면 그 처소는 늘 조용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궁중 악사들은 처소 주변에서 가야금과 거문고를 연주했는데 이때 피리 연주는 임산부의 감정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고 하여 피했지요. 임산부는 마음가짐과 함께 몸가짐도 특별히 신경 썼습니다. 머리와 피부는 동백기름·꿀·살구씨·달걀 등으로 가꿨고, 얼굴을 씻을 때는 비누 대신 팥·녹두·콩을 가루로 만들어 썼지요. 일곱 달째 들어서면 고기는 피하고 아침 식전에 순두부를 먹었으며, 각종 채소는 물론 김·미역·새우·흰살 생선 등 해산물을 주로 먹었습니다. 이때 옆으로 걷는 게와 뼈가 없는 문어는 피했다고 합니다. 특별영양식은 용봉탕(龍鳳湯)이었는데 용봉은 상상의 동물인 용과 봉황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잉어·오골계·쇠고기·전복·해삼이 재료로 쓰였습니다. 특히 잉어는 “임금의 물고기”라고 하여 왕자를 낳아야 하는 임산부는 꼭 먹어야 했다고 합니다. 참고 : ≪조선의 왕세자 교육≫, 김문식·김정호, 김영사
1477. 기축년 소띠해, 부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이제 2009 기축년 소띠해가 밝았습니다. 소[丑]는 방향은 북북동, 시각은 오전 1시에서 3시, 달로는 음력 섣달(12월)을 가리키는 12지신(十二支神)입니다. 이렇게 본 것은 소의 발톱이 갈라져서 음(陰)을 상징하며, 성질이 유순하고 참을성이 많아서 씨앗이 땅속에서 싹터 봄을 기다리는 모양과 닮았다고 보았기 때문이지요. 또 예부터 우리 겨레는 소가 풍요를 가져다주는 부의 상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풍수지리설은 소의 형국에 묏자리를 쓰면 자손이 부자가 된다.”라고 했으며, 옛 사람들이 “꿈에 황소가 집으로 들어오면 부자가 된다.”라고 믿었지요. 그리고 한 식구라는 뜻으로 소를 생구(生口)라 불렀고 "소는 하품밖에 버릴 게 없다."라고 했답니다. 소가 우리 집안에 들어온 기축년은 모두에게 풍요로운 한 해가 되지 않을까요? 이제 소를 타고 고향을 오갔던 세종 때의 명재상 맹사성처럼 유유자적할 때가 올 것입니다.
1476. 밝아온 2009 기축년 환한 새해가 되소서! 벌써 2008 무자년 한해가 저물었습니다. 한 해 동안 보내주신 격려와 채찍 정말 감사했구요. 그 덕분에 이제 얼레빗이 1,500회를 눈앞에 두었습니다. 밝아온 기축년 소띠해 모든 분께 환한 나날 비손합니다. 이무성 화백의 그림처럼 생동하는 한 해가 될 것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