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4. 조선시대 “미누라”는 존칭의 뜻 조선시대 남편은 아내를 어떻게 불렀을까요? 부부 사이의 호칭은 순한글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순천김씨묘에서 출토된 16~17세기 순한글 편지를 보면 “자내 몸애 병이나 삼가 댱슈히 사소”처럼 남편이 아내를 “자내”라고 불렀습니다. “자내”는 “자네”의 옛 표현으로 봅니다. 그런가 하면 “마누라”가 쓰였는데, 한국학중앙연구원 황문환 교수는 ‘조선시대 언간 자료의 부부간 호칭과 화계’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당시의 ‘마누라’는 요즘처럼 중년이 넘은 아내를 허물없이 이르는 말인 ‘마누라’와는 달리 존칭의 뜻으로 쓰였다고 합니다. 1882년 흥선대원군이 부인에게 보낸 편지는 “뎐 마누라 젼”으로 시작됩니다. 이때 “마누라”는 극존대의 종결형과 함께 종종 같이 쓰여 궁중의 높은 인물을 지시하는 데 쓰이던 ‘마노라’가 호칭으로 전용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죠. 이밖에 “게”, “게셔” 등도 남편이 아내를 부르는 호칭으로 등장합니다.
1433. 정조임금의 철저한 자기 관리 정조실록 44권, 20년(1796년) 4월 25일 자에 보면 다음과 같이 정조임금이 말하는 내용이 보입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매일 저녁때까지 꿇어앉아 있어서 버선 끝과 바지의 무릎이 모두 해어졌으며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두건을 벗은 적이 없었다. 임금 집안의 규범이 꼭 이토록 엄격해야 할 필요가 없겠기에 근래에 와서는 적당히 편하게 지내려는 생각도 가끔 했지만 습관을 갑자기 고치기가 어렵다.” 이렇게 자기관리에 엄격했던 정조임금 자신이 쓴 ≪홍재전서(弘齋全書)≫ 중 ≪일득록(日得錄)≫에 “공경함으로써 안을 바르게 하고 옳음으로 밖을 올곧게 한다[敬以直內義以方外].”라는 것을 생활신조로 삼았음이 보이는데 자신의 지저분하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고 합니다. 성군은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봅니다.
1432. 명나라 사신이 있는 동안 흰옷을 입다 예종실록 3권, 1년(1469) 2월 27일 내용을 보면 “임금이 승정원에 말하기를, ‘명나라 사신이 돌아갈 동안에 모든 백성이 흰옷을 입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신숙주가 대답하기를, ‘성상의 가르침이 당연합니다.’ 하였다.“라는 기록이 보입니다. 왜 임금이 그런 생각을 하였고 신숙주가 왜 맞장구를 쳤을까요? 우리 겨레는 오랜 옛날부터 흰옷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그 흰옷이란 지금 우리가 아는 것처럼 표백하여 새하얀 것을 이르는 것이 아니라 소복 곧 염색하지 않은 옷, 또는 화려한 장식도 하지 않은 옷을 말합니다. 일부 사치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백성 대부분은 그만큼 검소한 생각을 지녔다는 것이겠지요. 또 명나라 사신이 자칫 조선을 사치한 나라로 볼까 염려한 까닭도 있었을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때 악랄한 조선총독부가 흰옷을 입지 못하게 했지만 실패한 것을 보면 우리 겨레는 흰옷을 정말 좋아했던가 봅니다.
1431. 지금은 멀리 떨어져 별거 중인 수표와 수표교 조선 왕조 초기 세종임금 때는 과학이 큰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역시 세종 때인 1442년엔 세계 최초의 규격화된 우량계 곧 측우기를 만들었지요. 그리고 한해 전 1441년에는 개천의 물을 잘 다스리기 위한 목적 곧 개천의 수심을 재려고 수표를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그 수표가 설치된 다리는 그래서 이름이 수표교가 된 것입니다. 조선시대 서울 한양 한가운데로 개천 곧 지금의 청계천이 흘렀는데 이 개천의 홍수통제 시스템을 구성하던 것이 바로 수표와 수표교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수표와 수표교가 지금 별거를 하고 있습니다. 수표교는 장충단 공원에 가 있고, 현재 청계천에 있는 수표교는 모조시설입니다. 또 수표는 홍릉 세종대왕기념관으로 멀찌감치 떨어져 그 의미가 퇴색되어 버렸습니다. 조선시대 홍수통제 시스템이었던 중요한 유물, 유적인 수표와 수표교를 이토록 별거하게 한 까닭이 무엇인지 안타깝습니다.
1430. 전통가곡은 무엇이고, 남창과 여창은 어떻게 다를까? 흔히 사람들은 가곡 하면 ‘선구자’나 ‘가고파’ 등 서양발성에 의한 노래를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오랫동안 불러왔던 전통가곡이 있지요. 가곡은 시조시를 노랫말로 삼아 관현악 반주에 맞춰 부르는 노래인데 고려말부터 이어져 조선 영조 무렵 가장 꽃을 피운 것입니다. 지금은 들어볼 기회가 별로 없어 사람들에게 잊힐뻔한 이 전통가곡은 청아하고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가곡은 다른 성악곡과는 달리 남·여 노래로 나뉘어 있는데, 이는 가곡이 양성에 대한 특색을 요구하는 음악임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으로, 이 안에는 남창 26곡과 여창 15곡이 있습니다. 또 남창에서는 모든 음을 다 겉목 곧 진성으로 내는 발성법을 사용하는 데 반하여, 여창에서는 겉목과 속목이 다 쓰이죠. 속목은 가성인데 목 뒷덜미로부터 곱게 내는 소리를 말합니다.
1429. 우리 겨레가 귀신을 쫓으려 썼던 것들 나쁜 귀신을 쫓는 것으로 우리 겨레는 붉은빛을 좋아했습니다. 먼저 동지나 이사할 때에 붉은빛의 팥죽을 끓여 먹고 대문이나 문설주 등에 뿌려 부정한 것이 끼어들지 못하게 합니다. 또 정월 대보름에 먹는 오곡밥은 팥, 수수, 대추 등의 붉은 곡식이 주를 이루고 있고 또 붉은빛의 약식을 해먹습니다. 또 유둣날에는 밀누룩을 구슬처럼 만들어 붉은 물을 들인 다음 허리에 차고 다니거나 문설주에 매달아 놓기도 했지요. 그런가 하면 아들을 낳았을 때와 간장 항아리 그리고 집을 상량할 때나 샘을 새로 팠을 때 치는 금줄에도 붉은 고추를 달아놓습니다. 중양절에는 여성들이 붉은 산수유 열매 가지를 머리에 꽂기도 했고 또 아궁이에 불을 때다가 불똥이 튀어 치마에 구멍이 나면 음습한 곳을 찾아다니는 귀신을 쫓으려고 붉은 헝겊으로 구멍을 꿰매기도 했으며, 결혼하는 신부가 연지를 찍는 것도 그런 뜻이 있었답니다.
1428. 중요무형문화재 번와장을 아십니까? 한옥의 아름다움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살짝 비켜 올라간 추녀입니다. 추녀의 아름다움은 버선코, 섶코와 함께 살짝 들어 올려진 아름다움이지요. 그런데 그 추녀 위 지붕에 얹혀진 기와지붕도 더 할 수 없이 아름답습니다. 이 지붕의 기와를 잇는 것은 번와장(翻瓦匠)이란 장인입니다. 지붕의 조형적 특징은 번와 기술이 좌우한다고 볼 수 있다고 하지요. 문화재청은 최근 번와장(翻瓦匠)을 새로이 중요무형문화재 제121호로 지정하고 이근복(李根馥, 남, 1950년생, 서울 성북구)을 기능보유자로 인정하였습니다. 이분은 서울 숭례문, 경복궁, 경회루 등 여러 주요 문화재 번와 공사에 참여한 경력을 바탕으로 능숙한 기량을 보여주고 있다고 합니다. 또 기와지붕의 구성, 외형, 시공 작업 등 실질적인 기법을 이해하고 있으며, 번와에 대한 해박한 식견을 갖추고 있다 하지요.
1427. 바느질 도구 인두 이야기 이젠 잊혔지만 예전 어머니들이 바느질할 때 쓰던 도구 가운데 화롯불에 묻어 놓고 달구어 가며 천의 구김살을 눌러 펴거나 솔기를 꺾어 누르는 데 쓰던 인두를 기억하시나요? 인두는 무쇠로 만들며 바닥이 반반하고 긴 손잡이가 달렸지요. 형태는 인두머리의 끝이 뾰족한 것, 모진 것, 유선형인 것 등이 있는데 특히 인두머리가 뾰족한 것은 저고리의 깃·섶코·버선코·배래·도련 등의 정교한 곡선을 만드는 데 썼습니다. 또 마름질을 할 때 재단선을 표시하려고 금을 긋는 데에도 초크 대신 사용하기도 했죠. 인두와 함께 반드시 필요한 것은 인두판입니다. 이것은 너비 20㎝, 길이 60㎝ 내외의 직사각형 나무판 위와 아래에 솜을 도톰하게 두고 무명이나 비단헝겊으로 씌운 것입니다. 인두판을 양 무릎 위에 올려놓고 인두질을 하였으며, 솔기를 꺾거나 풀칠을 할 때에도 썼지요.
1426. 성주신, 지신, 조왕신, 측신 등에게 지내는 안택굿 우리 조상은 집집이 신이 있어서 집안을 보살펴 준다고 믿었습니다. 가정 신앙의 제주는 어머니들로, 집안에 잡스러운 귀신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정성을 다해 빌었지요. 이를 안택(安宅)이라고 하는데 새로 집을 짓거나 이사를 하면 안택굿을 하고, 음력 1월과 10월에는 집안의 신들을 위해 고사를 지냈습니다. 집안의 신들 가운데 맨 윗자리인 성주신은 마루에 모시는데, 가정의 길흉화복을 맡아 관리한다고 합니다. 또 집터의 안전을 주관하는 터주신은 ‘지신’인데 뒤뜰 장독대 옆에 터주가리를 만들어 모십니다. 부엌의 불을 관리하고 음식물을 맡은 신은 조왕신으로 어머니들은 이곳에 새벽마다 정화수 한 사발을 갈아 올리며 정성껏 빌었습니다. 이밖에 곳간의 업신, 뒷간의 측신, 가축을 다스리는 구신, 풍년을 가져다주는 조상신, 자식을 낳고 건강하게 자라게 하는 삼신, 장독대의 철융신, 우물의 우물신, 소와 말의 번식을 돌보아 주는 우마신, 대문의 수문신 등 집 안 곳곳에 신들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1425. 심사정, 불행에서 명작이 나오다 조선시대엔 정선, 윤두서, 김홍도, 신윤복 등 뛰어난 화가들이 있었습니다. 또 공재 윤두서, 겸재 정선과 더불어 삼재로 불리는 영조시대를 대표하는 선비화가 현재 심사정(1707~1769)은 중국의 남종화를 받아들여 개성 넘치는 화풍을 이룬 화가로 인정받습니다. 그는 산수화는 물론이고, 새나 짐승을 그린 영모(翎慕), 풀과 벌레를 그린 초충(草蟲), 인물화 등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작품을 남겼습니다. 특히 , 등 참신하고 서정적인 분위기의 그림으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원래 명문대가 집안에서 태어난 심사정은 할아버지가 과거시험 부정사건과 영조 독살사건에 관련되어 죽은 뒤 과거를 볼 수 없는 것은 물론 평생 ‘역적의 후손’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는 그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열심히 그림을 그려서 명작들을 남기고 남종문인화의 대가가 되었습니다. 참고 : , 조정육, 길벗어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