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2. 국악 중 잡가를 아시나요? 국악 장르 중 성악에는 잡가라는 것도 있습니다. 원래는 경기잡가이며, 서서 부르는 선소리에 비해 앉아서 부르는 앉은소리(좌창:座唱)에 듭니다. 조선 말기에 공예인, 상인, 기생들이 즐겨 불렀는데 지금의 서울역 부근 만리동 고개와 청파동에 이르는 지역에 살던 남자 소리꾼들인 '사계축(四契軸)'에 의해 널리 보급되었다고 합니다. 잡가라는 이름은 가곡(歌曲), 가사(歌詞) 등 정가(正歌)에 대칭되는 노래라는 뜻이 있습니다. 정가는 유교의 덕목에 맞는 점잖은 노래인 데 견주어 잡가는 현실에 대한 구체적이고 직설적인 표현을 한다든지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한 적나라한 표현을 거침없이 하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잡가가 주로 불린 지방은 경기지방으로 “경기좌창(坐唱)”이라고도 하고, 노래의 길이가 길어서 “긴잡가”라고도 하는데 서도지방에도 비슷한 형태의 잡가가 있어 이는 “서도잡가”라고 합니다.
1411. 세종임금, ‘구소수간’이란 책을 천백 번 읽었다 우리 겨레의 위대한 세종임금은 여러모로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특히 세종의 책읽기는 정말 엄청났는데 이 때문에 천재라는 소리를 듣는지도 모른답니다. 조선 전기의 학자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한문 수필집 ≪필원잡기(筆苑雜記)≫에 보면 세종임금이 얼마나 책읽기를 좋아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세종은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하면서도 글 읽기를 그치지 아니하여 병이 점점 심해졌습니다. 그러자 태종이 내시에게 명하여 갑자기 그 처소에 가서 책을 모두 거두어 오게 하였지요. 이때 구양수(歐陽脩)와 소동파(蘇東坡)가 쓴 편지글을 모은 책 ‘구소수간(歐蘇手簡)’ 한 권만이 병풍 사이에 남아 있었는데, 세종은 이 책을 천백 번을 읽었다고 합니다. 충녕대군 곧 세종은 셋째였지만 첫째 양녕대군을 제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요인의 하나가 치열한 독서였다고 하지요.
1410. “~적(的)”이라고 쓰지 마세요 어떤 연예인은 “마음적으로 괴로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적”이란 말을 자주 씁니다. 그게 과연 맞는 말일까요? '~적(的)'은 '그 성격을 띠는', '그에 관계된', '그 상태로 된'을 뜻하는 한자어 뒷가지(접미사)로 한자어 이름씨 다음에 '적'을 써서 표현하는 말이지요. 따라서 우리말 다음에 한자어 뒷가지 '~적'을 쓴 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한자어라고 해서 무조건 '적'을 덧붙이는 것은 역시 우리말다운 표현은 아니며, 우리말 토씨로 쓰면 되니 '적'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면 “전국적으로 맑은 날씨”는 ‘전국에’ 또는 ‘전국에 걸쳐’로, ‘정신적 고통’은 ‘정신의, 마음의 고통’으로, ‘연속적으로’는 ‘연속해서, 연속, 잇따라’라고 써야 하지요. 올바른 말글생활은 우리의 품격을 높여줍니다.
1409. 술 취한 뒤 덕을 깨닫도록 하라 정조실록 44권, 20년(1796) 4월 12일 기사에 보면 술에 취하여 궁궐의 담장 아래에 누워 있다가 잡힌 진사 이정용 이야기가 나옵니다. 훈련도감이 자초지종을 묻자 마침 성균관에 들어갔다가 술을 마시고 나서 야금시간에 걸린 줄을 몰랐다고 그는 말합니다. 훈련도감은 이 사람을 형조로 넘기고 임금에게 고했습니다. 이에 임금이 “성균관 근처의 민가는 집춘영(集春營) 건물과 지붕이 서로 잇닿아 있으니 야금시간을 범하였다고 논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근래에 조정의 관료나 유생들 모두 주량이 너무 적어서 술의 풍류가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다. 이 유생은 술의 멋을 알고 있으니 매우 가상스럽다. 군량미를 맡은 고을에서 술을 주어 취하게 하고 취했을 때 덕을 깨닫도록 하라.”라고 말합니다. 성군은 술 취한 사람에 대한 처리도 남다른 데가 있습니다.
1408. 삐딱한 사립문 달린 집이 좋은 까닭 “삐딱한 사립문 시냇가 언덕에 가까이 있어 / 紫門不整臨溪岸아침마다 산에 비가 내려 물이 불어남을 볼 수 있다네 / 山雨朝朝看水生” 위는 조선 후기의 문신 심산재(沈山齋) 김이안(金履安)의 시입니다. 삐딱한 사립문이 달린 집이라면 소박한 어쩌면 보잘것없는 집일 것입니다. 그런 집에도 만족할 가치를 찾아 긍정적으로 사는 심산재의 철학을 본받으면 좋지 않을까요? 논어 술이(述而) 편의 “나물 먹고 물 마시고 / 팔 베고 누었으니 / 즐거움 그 안에 있고 / 의롭지 않게 부귀를 누림은 / 나에게는 뜬구름과 같다네(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란 글과 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바로 그것이 아닐까요? 의롭지 않은 부귀는 우리가 취해야 할 것은 아닐 것입니다.
1407. 편지는 조선시대 대학자들의 자식교육법의 하나 조선시대 대학자들의 자식교육법은 바로 편지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한국 철학의 큰 봉우리인 퇴계는 아들 준에게 613여 통, 손자 안도에게 125통의 편지를 썼고 아들과 손자, 후손에게 무려 1,300여 통의 편지를 썼지요. 또 492권이라는 엄청난 책을 펴낸 다산 정약용도 유배기간 중에도 자녀교육에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유배 18년 동안에 다산은 두 아들과 100여 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지를 끊임없이 가르친 것입니다. 명문가의 자녀교육 가운데 이 시대 사람들도 써볼 만한 것은 바로 편지를 이용한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직접 손으로 구구절절이 써내려간 편지를 읽는 자녀는 부모의 사랑과 세상 살아가는 법을 절실하게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요? 글은 말보다 가슴 속 깊은 내면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전할 수가 있기에 어쩌면 효과적인 교육법의 하나일 것입니다.
1406. 구석기시대 시대 사람들도 장례 때 국화를 뿌려 장례식에서 조문객들은 하얀 국화를 바칩니다. 장례식 때 하얀 국화를 쓰는 까닭은 국화가 죽은 혼을 기리는 뜻이 있어서 그렇다고도 하고, 하얀 국화의 말뜻이 돌아가신 분을 사랑한다는 뜻이 들어 있어서 그렇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구석기 시대 사람들도 사람이 죽으면 장례를 지내면서 국화꽃을 뿌렸다고 합니다. 충청북도 청원군 두루봉에는 구석기 시대 동굴인 ‘홍수굴’이 있습니다. 그 홍수굴을 발굴할 때 그곳에는 무덤이 있었고 그 무덤에는 다섯 살배기 어린 아이의 유골이 있었답니다. 그리고 그 유골 위에는 고운 흙이 뿌려져 있었는데 그 흙 속에는 국화꽃가루가 발견되었지요. 고고학자들은 이를 두고 홍수굴 구석기 시대 사람들도 죽은 사람을 장례 지낼 때 국화꽃을 뿌리는 관습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한반도에 살았던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나 이 시대의 사람들의 정서가 닮은 데가 있었을까요?
1405. 중요무형문화재 제35호 조각장 이야기 문화재청이 지정한 중요무형문화재 가운데는 제35호 조각장이란 것도 있습니다. ‘조각장(彫刻匠)’은 금속제 그릇이나 물건의 표면에 무늬를 새겨 장식하는 기능이나 기능을 가진 사람으로, ‘조이장’이라고도 합니다. 금속조각은 청동기시대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고려시대에 매우 발전했습니다. 고종 때 펴낸 법전인 ≪대전회통(大典會通)≫에 의하면 조각장은 경공장(京工匠)으로 공조(工曹)에 속하였습니다. 당시 장인의 수는 55종에 255명이었는데 그 중 금속공예관련이 12종 80명이나 되어 그 비중을 짐작할 수 있었지요. 개화기 이후에는 서울 광교 개천(지금 청계전) 주변에 은방도가(銀房都家)가 몰려 있어서 금은 세공의 중심이 되었답니다. 은방도가는 대공방(大工房)과 세공방(細工房)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대공방에서는 주전자·담배합·신선로 등 큰 것을 만들었고, 세공방에서는 비녀·가락지·방울·노리개 등 여러 가지 패물과 수저를 만들었지요.
1404. 이함 가문의 가훈 “지고 밑져라” 우리 겨레가 삶 속에서 실천하기를 가장 강조한 것은 이웃에 대한 ‘배려’ 곧 “더불어 삶”입니다. 퇴계나 다산 등은 편지로 자식들에 한 교육을 통해 “도움을 받고 싶다면 먼저 베풀어라.’라고 가르쳤습니다. 재령이씨 이함 가문에는 ‘지고 밑져라.’라는 가훈을 400년 동안 이어왔다고 합니다. 단기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이야말로 장기적으로는 ‘미래를 위한 저축’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동학혁명 때 동학군은 백성을 수탈한 양반집을 급습해 사람을 죽이고 집을 불태웠습니다. 이때 경주최부자 집도 불탈 뻔했지만, 최부자 집의 내력을 확인한 동학도는 불을 지르지 않았습니다. 최씨 집안은 12대에 걸쳐 이웃과의 “더불어 살았기에 화를 면할 수 있었는데 그 집안의 적선은 미래를 위한 저축이었습니다. 원래 풍수지리에서 양택(집)의 풍수는 아무리 명당자리라도 당대에 그치지만 경주최부자 집은 “더불어 삶” 덕에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참고 : 월간문화재사랑 “명문가에서 배우는 자녀교육 ‘아버지의 귀환’”,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
1403. “삐끼” 대신 “여리꾼”이라고 불러 주세요 밤이 이슥한 때 도심지 유흥가를 지나다 보면 팔을 잡아끌면서 호객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속된 말로 “삐끼”라고 부르지요. 이들을 섣불리 따라갔다가는 낭패를 당하기 쉽지요. 그런데 이런 “삐끼”가 옛날에도 있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여리꾼”이라고 불렀지요. 다만, “삐끼”와는 달리 “여리꾼”은 유흥업소에 끌어들이는 게 아니라 물건을 파는 상점에 끌어들이는 것이고, 유흥이 아니라 물건을 사도록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누군가의 의뢰를 받아 몰래 사정을 염탐하여 정보를 제공하는 일을 하는 사람 곧 간첩 또는 ‘spy'를 "여마리꾼’이라고 합니다. 또 맞벌이 부부 가운데 어느 한 쪽이 틈을 내어 또 다른 일로 돈을 버는 일은 “세벌이”, 여러 사람이 밑천을 어울러서 함께 하는 장사 곧, 동업을 “얼럭장사”라고 부르면 좋을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