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2. 위대한 세종임금의 인간적 고뇌 세종임금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임금으로 꼽힙니다. 세종은 세계 최고의 글자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은 물론 오목해시계, 자격루, 혼천의 등 천문기구를 만들었고, 칠정산내외편을 펴냈으며, 농사직설을 펴내 농업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정간보(井間譜) 창안 등 음악 발전을 꾀했고, 경자자(庚子字), 갑인자(甲寅字), 병진자(丙辰字) 등 활자를 주조해 인쇄술을 발달시켰습니다. 또 육진 개척과 사군 설치로 국방력을 강화시키는 등 그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런 세종에게는 말 못할 인간적 고뇌가 있었습니다. 먼저 장인 심온이 억울하게 사약을 먹고 장모가 관비가 됨으로써 겪었던 아내 소헌왕후의 고통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또 사랑하는 정소공주의 죽음도 가슴에 안아야 했습니다. 그런 고통을 극복하고 성군이 되었기에 세종임금은 더욱 훌륭합니다.
1371. 손으로 하는 동작, 손갓과 손기척 손으로 하는 동작을 토박이말로 표현하는 것들에는 ‘손갓’과 ‘손기척’이 있습니다. 먼저 ‘손갓’은 햇살의 눈부심을 막고 멀리 보려고 손을 이맛전에 붙이는 짓(행동)을 말합니다. “그는 햇살에 눈이 부시어 ‘손갓’을 하고 먼 산을 바라보았다.”라고 쓸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손기척’도 있습니다. ‘손기척’은 흔히 쓰는 영어 ‘노크(knock)’의 토박이말입니다. 방에 들어가기 전에 방 안에 들어간다는 기척을 하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방법은 “에헴” 하는 헛기침입니다. 일상의 삶의 공간이 열려 있었던 구조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생활공간이 꽁꽁 닫혀있는 요즘의 일상생활에서는 ‘손기척’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저 인간은 든버릇처럼 ‘손기척’도 없이 내 방문을 벌컥 열어젖히곤 한다.”라고 표현합니다. ‘손갓’과 ‘손기척’ 모두 살려 써야 할 말일 것입니다.
1370. 복더위를 물리치는 북놀이의 하나인 복달임 옛 사람들은 복더위를 어떻게 물리쳤을까요? 우리 겨레는 삼복에 '북놀이’라는 것을 했습니다. 북놀이란 물에 발을 담그는 탁족(濯足), 모여서 술을 마시는 회음(會飮), 더위를 물리친다는 뜻으로 개고기국을 끓여 먹는 복달임 등을 말합니다. 특히 개고기는 농가월령가의 8월령에 며느리가 친정으로 나들이 갈 때 ‘개 잡아 삶아 건져 떡고리와 술병이라.’라고 했을 정도로 사돈집에 보내는 귀한 음식이며, 여름에는 개고기가 환영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삼복더위를 이겨내는 대표적인 시절음식이 보신탕입니다. 그러나 보신탕이란 말은 최근에 생긴 말이고 원래는 개장, 구장(狗醬), 구탕(狗湯) 등으로 불렸지요. '복(伏)'자가 '사람 인(人)변'에 '개 견(犬)자'를 쓴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복날 개를 삶아 먹는 것은 더위를 잊는 것뿐만 아니라 보신(補身)과 액(厄)을 물리치는 일까지 결부되기도 했습니다.
1369. 애체라고도 불린 안경, 부와 권력의 상징 조선시대 궁궐 안에서 안경을 쓰면 불경죄(不鏡罪)라 하여 유배까지 보냈다고 합니다. 엄격한 유교 사회였던 당시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之父母)”라 하여 몸에 달린 것을 훼손해서도 또 덧붙여서도 안 되기에 안경은 쓸 수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윗사람 앞에서는 안경을 쓰면 ‘불쌍놈’이라며 꾸중을 들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정조임금도 안경 쓰기를 고민했던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안경은 집 한 채 값과 맞먹기도 했으며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해 허리춤에 안경집을 매달고 다니며 자랑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당시의 안경은 동전 크기만 한 안경알에 안경테는 금으로 장식했고, 휴대하기 편하도록 좌우의 안경알이 접어지는 형태였던 모양입니다. 안경을 당시엔 '애채(靉靆)'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이는 눈에 구름 같은 것이 끼어 희미한 것을 밝게 보여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일 것입니다.
1368. 임금 수라상 앞에서 기미 보기 수라상이 나오면 임금이 수라를 들기 직전 옆에 임금을 모시는 큰방상궁이 먼저 음식 맛을 봅니다. 이것을 '기미(氣味)를 본다.'라고 하는데 큰방상궁이 조그만 그릇에 반찬을 골고루 조금씩 덜어서 임금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먼저 먹어 보고 그 밖의 임금을 모시는 나인들에게도 나누어줍니다. 이는 맛을 보는 것이 아니라 독(毒)이 있나 없나를 검사하는 것이었지만 나중엔 의례적인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수라상 위에는 임금의 수저 외에 젓가락 한 벌과 조그만 그릇이 놓여있었지요. 이 젓가락은 음식을 덜 거나 임금이 드시기 편하도록 생선뼈 등을 발라 앞에 놓을 때 썼습니다. 기미 보기는 녹용이나 인삼 같은 귀한 탕제를 올릴 때도 마찬가지였지요.그래서 상궁들에게는 인기있는 자리였고, 궁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생각시는 꿈도 못 꾸는 일이었습니다.
1367. 최제우가 창시한 천도교는 인내천(人乃天) 사상 민족종교 가운데는 천도교(天道敎)가 있습니다. 천도교는 조선 후기 1860년에 최제우를 교조로 서학 곧 천주교를 반대한 동학(東學)을 세웠는데 이를 1905년 제3대 교조 손병희(孫秉熙)가 천도교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이 천도교가 바로 전봉준이 이끈 동학농민혁명의 모태가 되지요. 최제우는 나라 안팎의 어지러움과 흐트러진 세상사가 모두 하늘을 뜻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라는 깨달음을 얻어 우리 겨레에게 오랫동안 전승되어온 유교ㆍ불교ㆍ도교를 모아 녹인 동학을 일으킨 것입니다. 천도교의 가장 큰 가르침은 “사람마다 마음속에 한울님을 모셨으니 사람이 곧 한울님(侍天主)”이라는 것이었는데 당시 신분제도의 굴레에 크게 신음하던 하층민들에겐 정말 복음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사상은 어쩌면 정치인 아니 세상 사람 모두가 모두 가져야 할 사상이 아닐까요? 참고 : “소통하는 우리 역사”, 조광한, 살림터
1366. 풍물악기를 뜻하는 말, ‘운우풍뢰(雲雨風雷)’ 풍물굿은 연주자와 관객이 역할을 바꾸어가며 하나 되는 우리 문화의 고갱이(진수)입니다. 그 풍물굿에서 주로 쓰는 악기로는 꽹과리, 징, 장구, 북, 태평소인데 북소리는 구름(雲)을 닮았다 하며, 장구 소리는 두 손이 정신없이 몰아가 비(雨)를 닮았다 하고, 징소리는 길게 푸르게 멀리멀리 퍼져 나가니 바람(風)을 닮았다 하며, 꽹과리는 질그릇 수백 장이 조각나듯 하니 우레(천둥:雷)를 닮았다 하여 사물악기를 ‘운우풍뢰(雲雨風雷)’라고 하지요. 그런가 하면 풍물악기를 음양오행에 견주어 꽹과리는 , 징은 , 장구는 , 북은 , 태평소는 을 뜻합니다. 또 꽹과리 소리는 “재재재재잰”, 징소리는 “징~~~징~~~”, 장구 소리는 “따꿍따꿍따”, 북소리는 “덩 덩 더덩 덩”이라고 표현하여 글만 읽어도 마치 풍물악기 소리를 듣는듯합니다.
1365.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 세종은 금주령을 내릴 때도 힘없는 백성 편을 들었습니다. “금주령을 내릴 때마다 청주를 마신 사람이 벌을 받은 적이 없고, 막걸리를 마시거나 혹은 술을 판 사람만 법에 걸리니 사 정이 딱하다.”라며 금주기간이라도 집안행사를 위해서나, 늙고 병든 사람이 약으로 마시는 경우는 처벌하지 말라고 했지요. 세종과 함께 정조의 예를 들어봅니다. 1779년 8월 3일 새벽, 정조는 효종능과 세종의 영릉을 찾으려 창덕궁을 나섰습니다. 어렵사리 강을 건넜을 때 길가에 빼곡이 늘어선 백성을 보고 이렇게 말을 합니다.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 내가 이제 배를 타고 이 백성에게 왔으니 더욱 절실히 조심하겠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뒤엎을 수도 있다.”라고 하여 임금은 백성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절대군주 시대의 임금 세종, 정조의 백성사랑, 이 시대에 다시 한번 되돌아보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1364. 애꾸눈 화가 최북의 다른 이름들, 호생관ㆍ칠칠이ㆍ최산수 차라리 내 자신을 자해할지언정 남에게 구속받지 않겠다며 자신의 눈을 송곳으로 찔러 애꾸가 된 최북이란 조선시대의 화가를 아시나요? 최북의 호는 ‘호생관(毫生館)’인데 '붓(毫)으로 먹고 사는(生) 사람'이라는 뜻으로, 스스로 지은 것입니다. 또 ‘칠칠이’라는 자는 이름의 ‘북(北)’ 자를 둘로 나누어 스스로 지은 것이지요. 메추라기를 잘 그려 '최메추라기', 산수화에 뛰어나 '최산수(崔山水)'로도 불렸습니다. 그는 의미 있는 그림을 선물했을 때 반응이 변변치 않으면 두말없이 그림을 찢어 버리고, 의미 없는 그림에 기뻐하는 이가 있으면 도리어 빰을 치며 받은 돈을 돌려준 자신 그림을 정말 사랑한 사람입니다. 그 그림 가운데 ‘풍설야귀인도(風雪夜歸無人圖)’는 ‘지두화(指頭畵)’ 곧 붓 대신에 손가락이나 손톱에 먹물을 묻혀서 그린 그림으로 그의 손놀림에 불 같은 성격과 광기가 더해져 있습니다.
1363. 세종임금 일산을 쓰지 않고 농부에게 묻다 세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세종임금은 들판을 지나갈 때면 일산(日傘)과 부채를 쓰지 않고 벼가 잘되지 않은 곳에선 반드시 말을 멈추어 농부에게 까닭을 물었으며, 마음이 아파 점심을 들지 않곤 했습니다. 또 공법이라는 세제개혁을 시행하기에 앞서 직접 경기도 장단현 들판을 답사하기도 했지요. 또 세종임금은 “병든 사람은 한증소(汗蒸所, 지금의 사우나 비슷한 곳)에 와서 땀을 내면 병이 나을 것이라 했지만 죽은 사람이 있다.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널리 물어보아 이익이 없으면 없애고, 이로움이 있다면 잘 아는 의원을 보내어 매일 살피도록 하되 환자의 병 증세를 진단하여 땀낼 병이면 땀을 내게 하고, 병이 심하고 약한 사람은 그만두게 하라.”라고 명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세종임금은 백성을 진심으로 섬기는 자세를 보였으며, 어려움을 호소하며 바로 처리해준 성군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