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2. 일본 나라 고분을 발굴하다 중단한 까닭 1985년 7월 일본 나라에서는 한 무덤, 곧 후지노키 고분을 발굴하다가 다시 덮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발굴단이 무덤을 다시 폐쇄하는 까닭을 그들은 “공기를 너무 많이 쐬면 무덤이 파괴된다.”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폐쇄 이유는 일본의 높은 발굴기술로 보면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들이 폐쇄하는 진정한 까닭을 1996년에 세상을 뜬 존 카터 코벨이라는 미국인 미술사학자는 “그 고분에서 한국식 유물이 쏟아져 나오자 그 고분의 주인이 한국인의 후손이라는 것이 드러날까 봐 두려워한 것”이라고 잘라 말합니다. 또 코벨은 “만약 한국이 일본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았다면 일본의 초대부터 25대에 이르는 임금이 한국인이란 것이 일본인에게 그리 고통스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미국인 학자가 한 이 말을 생각하면 식민사관이란 정말 한심한 것입니다. 참고 :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존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글을 읽다
1341. 중요무형문화재 제65호 백동연죽장을 아시나요? 연죽은 담뱃대를 말하는 것으로, 재떨이·부싯돌·쌈지와 함께 끽연사우(喫煙四友)로 애연가들에게 사랑을 받아 왔습니다. 특히 백동으로 만든 것은 ‘백동연죽’이라 불렀는데 이를 만드는 장인을 ‘백동연죽장(白銅煙竹匠)’이라 불렀고 중요무형문화재 제65호로 지정했지요. 담뱃대의 구조는 입에 물고 연기를 빨아들이는 ‘물부리’, 담배를 담아 태우는 ‘대꼬바리’, 그것을 잇는 가는 대나무 ‘설대’의 세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이중 대꼬바리는 열을 받는데다가 구조상 파손되기 쉬워서 구리, 놋쇠, 백동과 같은 금속으로 만듭니다. 처음엔 구리(동:銅)로 만들었으나, 나중에는 구리, 니켈, 아연을 섞은 백동과 오동을 써서 만들고 금은으로 새겨넣어 치장하였지요.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 "사치를 다투는 자들이 백동과 오동으로 담뱃대를 만들어 금과 은으로 치장했다."라는 구절이 있어 백동연죽은 부의 상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340. 오늘은 태종우(太宗雨)가 내리는 날 조선을 건국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한 태종은 18년간 임금자리에 있으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경제를 안정시켰으며 학문을 장려하는 등 나랏일 전반에 걸쳐 치적을 쌓음으로써 조선의 건국부터 안정화에 이르기까지 큰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임금으로 꼽히는 세종임금을 위해 든든한 바탕을 만들어 주었다고 평가됩니다. 또한, 남달랐던 백성 사랑은 ‘태종우(太宗雨)’로 알 수 있습니다. 태종이 죽기 직전 날이 몹시 가문 것을 걱정하여 “현재 가뭄이 심하니 내가 죽어 영혼이 있다면 이 날 비가 오게 하겠다.”라고 했는데, 그 뒤 기일인 음력 5월 10일마다 비가와 이 비를 ‘태종우’라 하였다고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5월 조는 전하며 그 후 태종우를 풍년의 징조로 여기게 되었지요.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잘 다스렸던 태종임금의 바람처럼 올해에도 태종우가 내려 풍년이 오기를 기원합니다.
1339. 율곡로는 일제가 창경궁과 종묘를 떼어 놓으려고 낸 길 왕조국가에서는 정신적으로 선왕의 위패를 모신 나라의 사당 곧 종묘는 사직과 더불어 종사라 불렀고, 종사는 나라 그 자체를 상징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종묘는 궁궐의 울타리 안에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지금 종묘는 창경궁과 육교 하나로 겨우 이어져 있을 따름입니다. 원래 종묘는 창경궁과 한 담에 있었지만 1927년 일제가 궁궐에서 떼어낼 심산으로 창경궁과 종묘 사이에 길을 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광화문 앞에서 이화동까지 2.6km 정도의 이화로입니다. 일제는 이와 함께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궁궐을 놀이터로 만들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무덤에만 까는 잔디를 궁궐 마당에 깔고 온돌방을 마루방으로 바꾸기도 했습니다. 조선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려고 별짓을 다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1338. 고조선은 고급 모직물을 생산하고 보편화했다 고조선의 청동기문화가 시작된 때는 서기 전 2500년경이고, 중국 황하유역의 청동기문화는 이보다 늦은 서기 전 2200년경에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고조선의 앞선 청동기문화는 생산도구의 발전을 가져왔고, 새로운 생산도구는 사직물(비단의 일종) 등의 생산을 보편화시켰을 뿐만이 아니라 생산기술도 급향상시켰습니다. 상명여대 박선희 교수는 ≪한국 고대 복식, 그 원형과 정체≫란 책에서 “고조선에는 갈치(毼雉, 꿩털)로 짠 타복(毤服), 푸른빛의 고급 모직물인 계(罽), 높은 가공기술로 만든 특수가죽이 보편화하였고, 중국은 이것들을 사가기도 했다. 고조선의 이 같은 생산력과 기술이 급속하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청동기문화가 일찍이 시작되었던 데 있다.”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은 우리의 옷이 중국이나 북방에서 처음 들어온 것으로 알지만 실제론 고조선은 동북아시아 최고의 옷감 짜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1337. 외팔로 연주하기 때문에 무형문화재 될 수 없다? 지난 일요일엔 경기도 광주에 계시는 이삼스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이삼스님은 외팔로 연주할 수 있는 대금을 개발하고, 외팔 연주법을 창안하여 대금으로 정악을 연주하십니다. 그분의 연주를 들어본 사람은 외팔로 그것도 산조가 아닌 정악을 연주하는 것에 감탄을 마지 않습니다. 그리고 스님의 연주는 듣는 이로 하여금 어렵지 않게 정말 편한 마음으로 들을 수 있게 하는 마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삼스님을 국악 전문가 한 분이 이 년여 전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추천했습니다. 하지만, 이심스님은 아직도 무형문화재가 아닙니다. 그 까닭을 물었니 다름이 아닌 외팔로 연주하기에 자격이 안 된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나라가 장애인을 사랑하는 나라가 아님이 여실히 증명하는 것입니다. 어떤 연주인지가 종요로운 것이지 외팔이냐 아니냐가 무슨 무형문화재의 조건이 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1336. 단오엔 주변에 부채를 선물 하십시오 어제는 단오였습니다. 단오는 우리 겨레가 설날, 한식, 한가위와 함께 4대 명절로 즐겼습니다. 그런데 농가에서는 단옷날 중에서도 오전 11시∼오후 1시인 오시(午時)가 가장 양기가 왕성한 시각으로 생각하여 약쑥, 익모초, 찔레꽃 등을 따서 말려두었다가 다발로 묶어서 대문 옆에 세워두면 재액을 물리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창포주 등의 약주를 마셔 재액을 예방하려 하였지요. 또 조선의 풍속에는, 단옷날에 임금을 가까이 모시던 여러 신하가 시를 기록한 단오첩(端午帖)을 써서 대궐 기둥에 붙였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이 날에는 공조(工曹)에서 부채를 만들어 임금께 진상(進上)하고 이 부채를 신하들에게 나눠 주었지요. 그렇게 한 까닭은 다가오는 여름에 더위 타지 말고 건강하라는 뜻이었습니다. 만일 주변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단오엔 부채를 선물하면 어떨까요?
1335. 생얼(쌩얼)의 원래 말은 민낯 요즘 여성들이 얼굴에 화장하는 것은 때마다 밥 먹는 것처럼 일상적인 일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같이 사는 식구가 아니면 여성의 민얼굴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특히 연예인들은 화장한 얼굴을 상표처럼 내놓기에 더욱 민얼굴은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가끔 어떤 연예인은 화장하지 않은 얼굴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때 화장하지 않은 민얼굴을 보통 “생얼” 또는 “쌩얼”이라고 말합니다. “생”은 ‘생쌀’, ‘생삼겸살’과 같은 뜻으로 “날것”을 말하겠지요. 그리고 “얼”은 물론 “얼굴”의 줄임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생얼은” 최근에 생긴 신조어이며, 원래는 토박이말로 “민낯”이란 것이 있습니다. “민낯”에서 “민”은 ‘꾸밈새나 덧붙인 것이 없음’을 나타내는 앞꾸밈말(접두어)입니다. ‘민머리’, ‘민다래끼’, ‘민날’처럼 쓰입니다. 이 시대엔 “생얼” 곧 “민낯”이 보기 어려운 것처럼 어쩌면 진실도 그런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은 화장이나 포장으로 가리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1334. 담배 피우고 토끼에게 골탕 먹는 호랑이 예전에는 할머니가 손자를 안고 옛날이야기를 많이 들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옛날이야기의 시작은 으레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때…”였지요. 그런데 조선시대만 해도 호랑이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숙종임금 때는 호랑이 피해로 한 마을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일도 있었으며, 경기도 지방에서 한 달에 무려 120여 명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 무서운 호랑이를 우리 겨레는 토끼에게 골탕먹는 어수룩한 동물로 만들어 버립니다. 또 ‘까치호랑이’라는 그림 속의 호랑이는 날카로운 발톱도 없고 우스꽝스럽게 그려져 그야말로 종이호랑이 꼴이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한 산신도에는 ‘담배 피우는 호랑이’가 보입니다. 그렇게 우리 겨레는 공포의 대상 호랑이도 어수룩하게 만드는 재주를 지녔는데 그것은 삶이 고달프더라도 익살로 여유롭게 살려 한 철학이 아닐까요?
1333. “장켄봉”과 “가위바위보” 일제강점기 때 발행된 일본잡지 ≪모던일본≫ “조선판(1939년)”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보입니다. “내지의 아이들은 승부를 정할 때 일반적으로 ‘장켄봉, 아이코데쇼’라고 한다. 조선의 아이들도 역시 ‘장켄봉, 아이코데쇼’라고 하는데 그 방법은 거의 같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장켄봉, 아이코데쇼’라는 말이 조선어 ‘자, 조곰 보쇼―, 아이고 또 한본―보쇼, 일본어역으로 ‘자 한 번 보여줘. 망했다, 다시 한 번 하자‘라는 것으로 조선에서 내지로 전해져 바뀐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장켄봉’의 모양을 보면 가위, 바위, 보자기와 유사하므로 조선어의 석(石, 돌), 협(鋏, 가위), 보(褓, 보자기)에 해당하는 것처럼도 생각된다.” 어렸을 적 우리는 ‘가위바위보’가 아닌 ‘장켄봉’이라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장켄봉’은 분명히 일본말이었는데 ≪모던일본≫ 내용을 볼 때 어쩌면 우리 것이 일본으로 전해져 다시 역수입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