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9. 아쟁, 음악 전체를 감싸 안고 깊이를 더해주는 악기 우리 국악기 가운데엔 아쟁(牙箏)이 있는데 7현으로 된 현악기의 하나입니다. 활로 줄을 문질러 연주하는데, 현악기 가운데 가장 좁은 음역을 가진 저음 악기이지요. 원래 7줄이지만 요즈음에는 10줄로 만들기도 합니다. 거문고보다 큰 몸통에 긁은 줄을 얹고, 개나리 나무로 만든 활대에 송진을 바르고 줄을 문질러 소리를 냅니다. 조선 전기에 이미 향악에서 쓰였는데 국악기 중 합주 때 저음역을 담당하는 악기로 관악합주에도 해금과 함께 편성됩니다. 아쟁은 서양음악의 콘트라베이스처럼 음악 전체를 감싸 안고 깊이를 더해줍니다. 요즘 아쟁산조를 연주하거나 창극·춤음악·민요 따위의 반주나 민속무용의 반주에 자주 사용되는 산조아쟁은 궁중음악보다 가락이 많고 속도가 빠른 곡을 연주하기에 줄과 줄 사이가 좁고 줄의 굵기도 정악아쟁보다 가늘며 전체 길이도 짧습니다.
1228. 훈민정음 창제에 정의공주가 큰 몫을 했다 세종임금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당시 최만리를 비롯한 집현전 학자 대부분이 반대하는 분위기였기에 비밀 프로젝트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성운학에 능통했던 세종도 완전히 혼자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 누가 옆에서 창제를 도왔을까요? 세종은 훗날 문종이 되는 세자, 수양대군, 안평대군, 둘째딸 정의공주 등 자식들의 도움으로 훈민정음 스물여덟 자를 만들었습니다. 특히 정의공주의 시댁 죽산안씨 족보에 보면 "한글의 변음과 토착을 세종임금이 대군들에게 풀라고 하니 대군들이 못 풀자 세종이 정의공주에게 하명하였는데 정의공주가 변음과 토착(사투리로 추측)을 풀어 올려 세종이 극찬하시고 상으로 노비 수백 구를 하사하셨다."라는 기록이 있지요. 이렇게 훈민정음 창제에는 여성인 정의공주가 다른 왕자들보다 더 큰 몫을 해냈다고 합니다.
1227. 정조 때 술 빚고 안주 만들기를 금하다 정종대왕실록 35권, 16년(1792) 9월 5일자에 보면 사간원 정언(正言) 이명연이 “가을철에 쌀값이 매우 비싸니 겨울과 봄에는 더욱 치솟을 것인데, 백성의 일이 진실로 염려스럽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가장 낭비가 심한 것이 술 빚는 것이니 이를 금하게 하자고 임금에게 말씀을 올립니다. 그런 논의에 좌의정 채제공은 술 빚는 것을 금지하는 것도 좋지만, 안주가 더 큰 문제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근래에 백성의 풍속이 점차 교묘해져서 푸줏간의 고기와 시장의 생선이 태반은 술안주로 쓰이고 있습니다. 진수성찬을 무절제하게 차리는 바람에 시장의 반찬 값이 날마다 뛰고 있으니 엄히 금하소서.”라고 합니다. 정조 때 양반들의 음식 사치가 극에 달했던 모양입니다. 그에 따른 피해는 고스란히 양반이 아닌 일반 백성에게 돌아갈 것을 이명언과 채제공은 걱정한 것입니다. 참고 : 정조의 본래 묘호는 정종(正宗)이었으므로 그 실록의 본래 이름도 《정종문성무열성인장효대왕실록(正宗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實錄)》 입니다.
2008년도 장영실 자격루 연수 답사(아이들 데려오기 허용)◆ 장영실 자격루 완전 복원 기념 세미나와 답사
1226. 후보자 부인이 한복을 입어야 대통령 된다? 한 주간 신문에 15·16·17대 대통령 선거를 분석한 결과 투표장에서 후보자 부인이 한복을 입었을 때 그 후보자가 당선되었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15대 때 당선된 김대중 후보의 부인 이휘호 여사는 옥색 한복을, 16대 때는 당선된 노무현 후보의 부인 권양숙 여사는 아이보리색 한복을 입은 반면, 낙선한 후보의 부인 한인옥(이회창)·강지연(권영길) 여사는 양장 차림이었습니다. 또 17대 때는 김윤옥(이명박)여사는 백아이보리색 한복을 입었지만, 민혜경(정동영) 여사는 양장을 입었지요. 한복닷컴이 한국통계정보연구원에 의뢰 ‘한국인의 대통령과 부인 한복에 대한 인식’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네 명 가운데 한 명이 한복 입은 대통령 후보 부부 모습이 투표에 영향을 끼친다고 대답했습니다. 또 한복은 예부터 행운을 가져온다고 알려졌으며, 한국인에겐 한복이 가장 잘 어울린다는 분석을 신문은 내놓습니다.
1225. 무자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12지신의 맨 처음 쥐해 무자년((戊子年) 새해가 밝았습니다. 오늘은 글 대신 이무성 화백이 독자 여러분을 위해 그린 12지신상 쥐 그림을 보내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1224. 정해년 한해 여러분의 사랑 정말 고맙습니다 황금 돼지해라고 하는 정해년 한해가 저물었습니다. 올 한해 참 많은 일이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섣달에 있었던 태안 기름유출 사고는 정말 큰일이었지요. 특히 기업과 정부의 잘못으로 벌어진 태안 사태가 죄 없는 주민들과 온 국민에게 아픔을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이어졌던 자원봉사의 물결은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드문 우리 겨레의 특징, “더불어 살기”의 본보기입니다. 젊은이들이 겨울 바다를 등지고 곱은 손으로 기름 닦아내는 것을 볼 때 가슴이 찡했던 것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동짓날 팥죽으로 고수레를 하는 마음과 섣달 그믐날 아이들이 풍물굿을 쳐 거둔 곡식을 노인들만 계신 집이나 병든 사람이 있거나 어려워 떡을 해먹을 수 없는 집에 담 넘어 던져주던 “담치기” 풍속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정해년 한해 베풀어주신 사랑 정말 고맙습니다.
1223. 양반 박연이 악공에게 피리를 배우다 세종 때 음악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긴 박연은 본래 충북 영동의 유생이었는데 공부하는 틈틈이 피리를 배웠습니다. 그런 박연이 과거를 보러 한양에 올라가 이곳저곳 둘러보다가 궁궐 내 전악서에서 연습하던 어느 악공의 피리 소리를 듣고는 곧바로 자기 연주를 평하여 달라고 했습니다. 박연의 피리 소리를 들은 악공은 “가락이 상스럽고 장단에 맞지 않는데다 옛 버릇이 굳어져 고치기가 어렵겠다.”고 말합니다. 박연은 양반이었지만 악공의 말에 화를 내지 않고 겸손한 자세로 간절히 가르침을 청했습니다. 그 뒤로 날마다 부지런히 배우더니, 얼마가 지난 뒤에는 오히려 그 악공이 스승으로 삼을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조선 전기의 학자이며 문신인 성현의 《용재총화(慵齋叢話)》제8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박연이 과거 공부와 함께 음악에도 매달렸기에 세종임금에게 큰 신하가 된 것입니다.
1222. “너무 고맙다”라고 쓰지 마세요 방송을 보거나 주변 사람과 이야기하다 보면 “너무 고맙다”라는 이상한 말을 자주 듣습니다. “너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한계가 정도에 지나게. 분에 넘게”라고 풀이되어 있으며, “할 일이 ∼ 많다/ ∼ 걱정하지 마세요.” 등의 예문이 보입니다. “적이 너무 많다.”, “정치꾼들을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라고 쓸 수도 있을 것입니다. “너무 고르다가 눈먼 사위 얻는다”란 속담도 있구요. 곧 “너무”는 부정을 뜻하는 부사로 “고맙다”라는 말 앞에는 올 수가 없지요. 달리 말하면 “너무 고맙다”라거나 “너무 예쁘다”라고 쓰면 자칫 비아냥거리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말하는 것을 아무도 지적하지 않는데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제발 “너무”가 아닌 “정말”로 바꿔 “정말 고맙다.”, “정말 예쁘다.”라고 했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같아요”란 말을 쓰지 말아야 합니다.
1221. 근대식 공립학교, 학생들에게 생활비를 주었다 우리나라에 근대식 학교가 세워진 것은 고종 23년(1886년) 공립 육영공원이 서울 정동에 문을 열면서부터입니다. 이후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의 사립학교가 세워졌습니다. 입학 나이는 만 8살~12살이었지만 실제 장가가서 어른이 된 14살, 심지어는 30살이나 먹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는 학생들에게 매달 6원씩의 생활비를 주었고, 점심값과 담뱃값으로 날마다 6전씩 주어 매달 3~4원씩은 저금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까닭은 학생 구하기가 정말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서양 사람이 어린애를 잡아다 눈알을 뽑아서 사진기를 만든다든지, 천연두 예방접종을 소젖으로 해야 하는데 소젖이 없어서 여자를 잡아다 젖을 뽑은 것이라는 해괴한 소문이 돌았던 까닭입니다. 이러다 보니 이화학당에서는 수구문 밖 염병막에서 다 죽어가는 여자애를 데려다 학생을 만들기까지 했다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