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0. 고려 때에도 온 나라엔 소나무가 많았다 “광주(廣州)ㆍ양주ㆍ영주 등 3주에는 큰 소나무가 많다. 소나무는 두 종류가 있는데, 다만 다섯 잎이 있는 것만이 열매를 맺는다. 나주도(전라도)에도 있으나, 삼주(三州)의 풍부함만 못하다. 열매가 처음 달리는 것을 솔방[松房]이라 하는데, 모양이 마치 모과와 같고 푸르고 윤기가 나고 단단하다가, 서리를 맞고서야 곧 갈라지고 그 열매가 비로소 여문다.” 위는 송나라 사람 서긍이 쓴 ≪고려도경≫ 토산(土産)편에 나오는 글입니다. 서긍은 소나무가 광주 등 3주에 많다고 하였지만 이는 온 나라를 제대로 돌아보지 못한 탓이라 여겨집니다. 또 “다섯 잎이 있는 것만 열매를 맺는다”라고 했는데 원래 소나무 잎은 잎자루에 두 개만 달린 것이며 다섯 잎이 달린 잣나무를 착각한 듯합니다. 고려 때에도 온 나라에 얼마나 소나무가 많으면 서긍 같은 이가 책에도 기록할 정도였을까요?
1219. 신흠의 세 가지 즐거움 조선 중기의 문인 신흠은 뛰어난 문장력으로 대명외교문서의 제작,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 제작에 참여해 선조의 믿음을 얻었습니다. 그의 ‘야언(野言)’이란 글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즐거움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즘 저런 즐거움을 즐기기는 어렵겠지만 곰곰이 새겨볼 대목입니다. “어느 맑은 밤 편안히 앉아 등불을 은은히 하고 차를 끓인다. 세상은 온통 고요한데 시냇물 소리만 졸졸졸 들려와 이부자리도 펴지 않은 채 건듯 책을 읽어본다. 이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다. 비바람 몰아치는 날 사람들 오고 감이 뚝 끊겨 온 세상이 고즈넉하고 온 집안이 조용하다. 빗장 걸고 방을 치우고선 눈앞에 가득한 책을 기분 내키는 대로 꺼내서 보는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다. 텅 빈 산에 겨울이 찾아와 소복이 쌓인 눈 위로 싸락눈 날리고, 앙상한 나뭇가지들 바람결에 흔들리고, 추위에 떠는 산새가 들판에서 우짖을 때, 방안에서 화로를 끼고 앉아 차 끓이고 책 읽는다.”
1218. 방문판매원 방물장수와 매분구 이야기 옛날엔 연지 ·분 ·머리기름 등의 화장품을 비롯하여 거울 ·빗 ·비녀 등의 장식물과 반짇고리에서 패물에 이르는 잡다한 물건들을 커다란 보퉁이에 싸서 등에 지고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전전하면서 행상을 한 방물장수가 있었습니다. 방물장수는 여염집 여인들에게 세상 물정이나 저간의 사정 등을 전하여 주는 전달자 구실도 하였으며, 특수한 심부름을 하여 주는 중개자, 혼인 중매를 하는 매파의 구실도 하였지요. 특히 조선시대 숙종 때 이야기에는 방물장수 가운데 오늘날의 미용사원과 비슷한 매분구가 등장합니다. 매분구는 화장품과 화장도구를 집집이 방문하여 판매한 사람들이었지요. 이 매분구는 최근 방영되는 케이블 텔레비전 드라마 “별순검”에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당시는 여성의 외출이 오늘날처럼 자유스럽지 못했으므로 매분구는 대단히 반가운 존재였을 것입니다.
1217. 오늘은 동지, 해가 부활하는 날 “동지는 명절이라 기운이 일어난다. / 시절식으로 팥죽을 쑤어 이웃과 즐기리라 / 새 달력 펴내니 내년 절후(節侯) 어떠한고 / 해 짧아 덧없고 밤 길어 지루하다.” 11월 조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동지는 해가 적도 아래 23.5°의 동지선(남회귀선)과 황경 270°에 이르는 때이며, 절기가 시작하는 날이기도 하지요. 동지(冬至)라는 이름은 드디어 겨울에 이르렀다는 뜻이며,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날입니다. 옛사람들은 이날을 해가 부활하는 날로 생각하고 잔치를 벌여 태양신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동국세시기≫에는 동짓날을 작은 설, 즉 다음해가 되는 날이란 의미로 ‘아세(亞歲)’라 했지요.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난 성탄절은 신약성서에 쓰이지 않아서 옛날에는 1월 6일이나 3월 21일을 성탄절로 지내기도 했지만 4세기 중엽에 로마 교황청이 성탄절을 동지설날과 같은 날로 정했습니다.
1216. 훈민정음은 분명히 표절이 아닙니다. 최근 어떤 사람에게서 충격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소위 상고사를 연구하는 학자에게 들었다며 훈민정음은 가림토문자를 표절해놓고 창제라고 했으니 세종대왕은 사기꾼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과연 그의 말이 맞을까요? 분명히 훈민정음 정인지 서문에 보면 “象形而字倣古篆” 곧 물건의 형상처럼 글자를 만들었으나 옛 전서를 본떴다”고 합니다. 이렇게 옛 글자들을 참고하여 창제했음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글자에 관한 학문에 능통했던 세종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글자를 창제한 것이 아니라 가림토문자, 이두, 산스크리트어 등 그때까지 있었던 여러 가지 글자들을 참고해 만든 것입니다. 많은 발명이 다른 이전의 발명을 참고하여 만들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무조건 모방이거나 표절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이 현존하는 글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글자로 인정받는 한글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1215. 전화로 3년상을 치른 순종 유교의 영향이 컸던 우리나라는 부모가 돌아가시고 나서 3년상을 치르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부모님의 묘소 옆에 초막을 짓고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올리며, 살아계실 때처럼 섬기는 것이지요. 얼마 전엔 현대판 3년상이 텔레비전에 방영되어 관심을 끈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화로 3년상을 치른 일도 있었다지요.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은 아버지 고종과 어머니 명성황후의 묘소인 홍릉에 맘대로 갈 수가 없자 매일 아침 전화를 걸어 곡을 했습니다. 내관이 송화기를 들고 홍릉으로 신호를 보내면 능지기가 수화기를 봉분에 가져다 댑니다. 그러면 순종이 곡을 시작했다고 하지요.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부모님의 3년상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지금이야 옛날처럼 3년상을 치를 수는 없겠지만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효도하는 것은 3년상보다 더욱 종요로운 일입니다.
1214. 백성이 추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뽑을 것인가? “시골 마을 오막살이 집에서 갈포옷에다 짚신을 신으며 고집이 있어 자신을 아끼는 사람도 어떤 사람과 벗을 삼자고 하면, 그 역시 먼저 어진가 어질지 않은가를 물어서 어질면 취하고 어질지 않으면 버릴 것이다. 하물며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추하게 여기는 자를 뽑아 자리에 앉혀 놓고 나라의 큰일을 함께 의논한단 말인가.” 위 글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신흠의 상촌집(象村集) 사습편(士習篇)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신흠은 뛰어난 문장력으로 대명외교문서의 제작,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 제작에 참여한 사람이지요. 신흠은 오늘의 선비가 권세, 이익, 명예, 겉치레, 경쟁 등만을 추구하는 타락한 형태를 보이는데 이런 선비는 결국 온 세상에 화를 미치게 한다고 말합니다. 또 신흠은 백성이 추하게 여기는 사람을 뽑아 국가의 대계를 의논하는 것을 한탄합니다. 대통령 선거날에 생각할만한 글귀입니다.
1213. 떡을 찌고 콩나물 길러 먹던 시루 이야기 어렸을 때 솥 위에 시루를 얹어놓고 떡을 찌던 어머니가 그립습니다. 시루는 떡이나 쌀 등을 찔 때 쓰는 한국 고유의 찜기인데 떡시루 말고도 집에서 콩나물을 길러 먹던 콩나물시루도 있지요.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시루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청동기시대의 유적인 나진 초도패총에서 출토된 것입니다. 상고시대의 시루 모양은 지금과는 조금 다른데 바닥 구멍은 꽃잎 모양으로 뚫려 있고 쇠뿔 모양의 손잡이가 달렸습니다. 시루는 바닥에 있는 구멍을 통하여 뜨거운 김이 올라와 시루 안의 음식이 쪄지게끔 되어 있으며, 시루바닥과 둘레가 꼭 맞는 솥을 골라 물을 붓고 시루를 앉힙니다. 이때 시루와 솥이 닿는 부분에서 김이 새는 것을 막으려고 밀가루나 멥쌀가루를 반죽하여 지름 1센티미터 정도로 시룻번을 바릅니다. 군것질거리가 별로 없던 시대는 이 시룻번도 맛있게 먹었습니다.
1212. 몸뻬, 일제가 만들어낸 태평양전쟁을 위한 옷 일제는 태평양전쟁이 어려워지자 국가총동원법(1938)과 비상시 국민생활개선기준(1939) 등을 통해 허리와 발목 부분을 고무줄로 처리한 부인 표준복 몸뻬(もんぺ)를 입으라고 강요하고, 화려한 화장 및 파마를 못하게 했습니다. 심지어 1944년엔 몸뻬를 입지 않으면 버스와 전차도 못 타고, 관공서나 극장도 드나들지 못하게 했으며, 여학생 교복으로도 입게 합니다. 당시 언론들도 이 일제의 몸뻬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했습니다. 매일신보 1942년 6월 13일 자는 “몸뻬는 조선 부인이 입는 옷과 비슷한 점이 많다.”라고 했으며, 잡지 ‘신여성’ 1944년 11월호는 “나라가 원하는 여성이란 근검과 절약을 실천하고, 나라와 사회를 위해 자기의 욕구를 기꺼이 희생하는 사람”이라며 몸뻬 입기를 부추겼습니다. 해방 뒤에도 일할 때 좋다고 여전히 이 태평양전쟁을 위한 옷, 몸뻬를 입는 사람이 있었지요.
◆ 장영실 자격루 완전 복원 기념 세미나와 답사- 세종과 장영실 문화재 현장 취재 보고회 ▲ 최근 국립고궁박물관에 새롭게 복원전시한 자동시보장치 있는 자격루세종과 장영실에 대한 1년간의 현장 답사, 치열한 취재 그 놀라운 결과를 공개합니다.말로만 떠받들며 실제로는 철저하게 핍박하는 이 땅의 엉터리 언어, 과학문화를 고발합니다. ♠ 때: 12월 28일(금) 오후 1시 30분- 3시 : 강좌와 답사 비평 4시 - 6시 : 자격루 답사(경복궁 고궁박물관), 세종 장영실 공동과학연구소 ‘흠경각’ 답사 6시 - 9시 : 뒤풀이(각자 부담) 또물또 송년회♠ 곳 : 강연 장소 : 알짬터 연구실(서울 경기대 입구, 5호선 충정로 역 서대문역 중간) - http://cafe.daum.net/alzzamto(02-365-3996/7) 답사 장소 : 경복궁 고궁박물관♠ 후원: 경복궁 고궁박물관, 알짬터 독서토론 한마당,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오마이뉴스, 한국싸이버대학교♠ 내용 ▶ 이 땅에 세종과 장영실은 있는가 _ 관련 기록 유적지 답사 비평 : 김영조(오마이뉴스 기자) ▶ 세종과 장영실, 그리고 조선의 과학과 문화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 김슬옹(목원대 겸임교수, 상명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