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1. 예순 살에 종9품으로 시작한 강세황, 6년 뒤 당상관 조선시대만 해도 장수하는 사람이 드물어 임금이 직접 예순 살이 넘은 문신들에겐 양로연을 , 일흔 살이 넘은 사람에겐 기로연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 문인이며 화가였던 강세황은 양로연에 참여할 나이인 예순 살이 되도록 벼슬을 하지 못한 포의한사(布衣寒士)였습니다. 하지만, 예순 살 때 양로연에서 영조 임금의 눈에 띄어 종9품 영릉참봉을 하사받은 뒤 예순여섯 살에 종2품 당상관에 올랐지요. 남들은 평생을 걸려도 오르지 못할 자리에 강세황은 6년 만에 오른 것입니다. 다른 이들은 이제 쉬거나 이미 죽고 없을 나이에 그는 새롭게 시작하여 성공했습니다. 중국의 화가 석도는 일흔다섯 살 때 유명한 “도원도”를 그렸고, 일본의 가쓰시카 호쿠사이는 예순여섯 살을 넘겨서 “붉은 후지산”을 그렸습니다. 이를 보면 자기 앞에 닫힌 문이 조금 늦게 열린다고 해서 절망할 일은 아닙니다. 참고 :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조정육, 아트북스
1210. 조선시대의 초상화 당나귀 귀로 한쪽만 그렸다 우리는 그동안 조선시대의 초상화는 극사실화로, 수염 한올 한올까지 또 사팔뜨기ㆍ곰보ㆍ검버섯까지 정확하게 그린 것을 압니다. 그뿐만 아니라 산수화는 진경산수화여서 산과 강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책 지은이에게 얘기를 듣고 또 다른 사실을 알았습니다. 조선시대의 초상화는 물론 극사실화지만 그건 사람의 생각마저 그리는 것으로 구도와 특징을 잘 살리는 그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귀는 늘 당나귀 귀이고, 한쪽만 그렸으며, 눈은 정면을 바라보지만 코는 1/4쯤 옆으로 돌린 모습이랍니다. 한국인은 코가 낮아서 정면으로 그리면 보기가 싫다나요. 진경산수화를 시작한 정선의 그림을 보면 인왕산의 바위에 무게감을 주려고 검정색으로, 폭포는 실제보다 길게 그려 폭포소리가 훨씬 우렁차고 세차게 들리도록 그렸습니다.
아이와 어른이 같이 읽어도 좋을 조선의 화가 이야기[서평] 조정육이 쓴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 조정육 씨가 길벗어린이를 통해 내놓은 책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표지 ⓒ 길벗어린이 당신은 피카소가 그린 어려운 그림과 함께 조선의 그림, 정선의 “금강전도”를 보았는가? 혹시 귀를 자른 고흐와 함께 자신의 눈을 송곳으로 찌른 최북을 아는가?어쩌면 이런 물음은 어리석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직 대다수의 한국 사람은 서양 화가들을 줄줄 외우고, 서양 그림을 자주 볼 기회가 있지만 조선의 그림과 화가를 알 기회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교육과 언론의 잘못에서 온 것이겠지만 이를 소개하는 책이 별로 없었던 탓이기도 하다.그런데 마침 이 조선의 화가, 조선의 그림을 맛깔스럽게 소개한 책이 나왔다. 그 책은 우리의 화가, 우리의 그림에 푹 빠져 여러 책을 내기도 했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조정육 씨가 ‘길벗어린이(대표 이호균)’를 통해서 낸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이 그것이다.글쓴이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그러면서 문득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해오던 중국식 그림기법으로는 조선 산천을 제대로 그릴 수 없다는 것을, 조선의 산과 강은 조선식으로
1209. 우리의 전통무용, 정중동이 살아있어야 그저께 전 한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의 공연에 다녀왔습니다. 그 공연엔 그분 말고도 여러 소리꾼과 춤꾼이 함께해 동행이란 이름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한 네 사람의 춤꾼 가운데 세 사람에게 저는 크게 실망했습니다. 공연한 춤은 승무, 살풀이춤, 태평무, 진쇠춤 등인데 모두 가볍게 추어서는 안 되는 진중한 것들입니다. 특히 태평무와 진쇠춤은 궁중무용의 성격을 지닌 것이어서 춤추는 듯 멈추고, 멈추는 듯 춤추는 정중동의 특징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예전 수원 재인청 도방 이동안 선생님이 추던 춤을 보면 한발 한발 띄는 것조차도 정말 조심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날 공연은 마치 아이들이 촐싹거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해방 뒤 일본식 교태가 들어간 춤을 추는 춤꾼들이 있다는 평가를 하는 분들이 있는데 춤 공연에서 유심히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1208. 곰살가운 사람이 되면 좋을 일입니다 세력 있는 사람의 주위에서 총기를 어지럽히는 사람이 많은데 그를 ‘해가림’으로 불러주십시오. 이런 사람은 더불어 사는 세상의 근심거리입니다. 또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이 젊은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때도 있으니 그 가운데 하나가 ‘곧은목 성질’인데 융통성 없이 외곬으로만 나아가는 성질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는 말은 듣기에 매우 거북한데 그럴 때 하는 말이 ‘귀 거칠다.’이지요. 또 ‘글컹거림’ 곧, 말을 함부로 하여 남의 심사를 뒤틀리게 하거나, 나이 먹을수록 없고 쓰잘 데 없는 ‘곤쇠아비’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 대신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공을 세우는 사람 ‘굄돌’, 곰처럼 순하고 듬직한 사람, 곧 ‘곰손이’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또 나이 들면서 오히려 젊은이에게 상냥하고 부드럽고 속 너르다는 뜻의 ‘곰살갑다(곰살궂다, 곰살맞다)’라는 말을 듣는 사람이 되어야지요.
1207. 매일신보 1910년 여기자 모집, 유부녀만 뽑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신문은 1882년 발행된 관보 ‘한성순보’였으며, 민간 최초의 신문은 ‘독립신문’이었는데 그때까지 기자들은 모두 남자들뿐이었습니다. 그 뒤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1910년 창간한 ‘매일신보’는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 식민지화를 선동하는 신문이었지요. 그 ‘매일신문’이 조선 언론 처음으로 여기자를 채용했는데 “…… 개화된 여성으로 현명하면서도 여러 가지 지식이 있는 20~30살가량의 고등보통학교 졸업 정도에 글재주가 있는 기혼 부인을 구함”이란 광고를 냈습니다. 이 광고를 통해 처음 채용된 사람은 이각경으로 “조선 가정주부께”라는 논설을 처음 썼는데, 긴 치마와 고무신 차림으로 많은 이름난 사람을 대담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기업들이 기혼여성을 꺼리지만 당시는 기혼여성이 추문을 일으키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1206. 유배생활, 출장 간 것처럼 지내기도 “여러 친구가 나의 어려움을 보고 첩을 얻을 것을 권했다. 아무개 씨의 딸과 중매를 드는 사람이 있어 날짜까지 잡았는데 겨우 6,7일을 남기고 있었다. 이때 처가 들어왔다. 일이 이렇게 되어 좋은 일이 이루어지지 못했으니 정말 우스운 일이다. 5필의 말과 6명의 노비가 한꺼번에 오니 어떻게 먹고살까? 그렇지만, 어찌 산 사람의 입에 거미줄 치려고” 위 글은 17세기 유생 이필익이 유배지에서 있었던 일을 적은 ≪북찬록(北竄錄)≫에 있는 내용입니다. 흔히 유배생활이라고 하면 무척이나 고초를 겪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대부분 고생이 심했겠지만 일부는 이처럼 출장 가거나 여행 간 것처럼 편하게 지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특히 유배지가 유배자와 같은 정치적 성향의 인물이 다스리는 곳이면 오히려 재충전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1205. 꼴찌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 “꼴찌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많은 겨레는 어떤 일에서든 흙이 무너지고 기와가 깨지듯 그렇게 단번에 무너지지는 않는다. 우승자는 당연히 존경할 만하다. 그러나 뒤떨어졌으되 기어이 결승점까지 달려가는 주자와 그런 주자를 비웃지 않고 진지하게 보는 구경꾼, 그들이야말로 중국 미래의 대들보이리라.” 위는 《광인일기》, 《아큐정전(阿Q正傳)》등을 쓴 중국의 위대한 문학가 겸 사상가 루쉰(魯迅, 1881~1936)이 쓴 산문집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이욱연 편역, 도서출판 예문)에 나온 글입니다. 이 책은 제 “얼레빗”을 받아보시고 가장 많은 답글을 보내주신 대구의 들꽃님이 선물해주신 것이지요. 우리의 사상가는 아니지만 우리에게도 큰 가르침을 주는 말이라 생각하여 소개해 드립니다. 꼴찌가 되더라도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자기 할 일을 다하는 모습은 정말 종요롭습니다.
1203. 조선 초기의 천문도, 한글판으로 다시 태어났다 전해지는 조선 초기의 천문도들은 태조 4년(1395년) 검은 석판에 새긴 국보 제228호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각석”, 숙종 13년(1687)에 새긴 보물 제837호 “복각천상열차분야지도(複刻天象列次分野之圖刻石)”, 박연이 그린 “혼천도(渾天圖)”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천문도들은 한자로만 쓰인 탓에 한자에 능통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무용지물이었지요. 그런데 최근 이를 한글판으로 번역해 그린 천문도가 나와 화재입니다. 국제천문연맹 천문학사위원회 위원장인 연세대 나일성 명예교수는 “한글판 천상열차분야지도”를 그려 일반에 공개했는데 무려 25년의 삶을 바친 역작입니다. 나교수에 의하면 이 천문도에는 서양 과 달리 왕궁을 중심으로 직제와 직위를 별자리 이름으로 했는데 재미있는 것은 뒷간이나 창고 이름도 들어 있다고 합니다. 이 천문도에서 뒷간별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입니다. 기사 참조 : “조선 천문도에서 뒷간별 찾아볼까?”(오마이뉴스)
1202. 라틴말만 우대했던 이탈리아, 이탈리아 말 세상되다 김수업 선생의 “말꽃타령”이란 책에 보면 이탈리아 말 애기가 나옵니다. 이탈리아도 예전에는 배웠다는 사람들이 이탈리아 말을 업신여기고, 라틴말을 쓰면서 우쭐거렸습니다. 농사를 지으며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은 죽으나 사나 이탈리아 말 밖에 쓸 수 없었지만, 귀족들은 라틴말을 쓰지 않으면 사람 구실을 못하는 줄 알았지요. 예전 우리나라 지배층이 한자를 숭상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13세기에 프란체스코라는 성인이 이탈리아 말로 설교를 하고 글을 쓰고 시를 지었습니다. 그 뒤 14세기 이분에게 감화를 받은 단테가 《토박이말을 드높임》이라는 논설을 라틴말로 써서 귀족들에게 돌리고, 이탈리아 말로 위대한 서사시 《신곡》을 지었지요. 이것이 이탈리아 말로도 시를 짓고 학문을 할 수 있다는 본보기가 되어,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 같은 사람이 뒤따르면서 토박이말로 세상을 바꾸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