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1. 백성의 편에서 살았던 토정 이지함 해마다 정월이 되면 우리는 토정비결을 봅니다. 이 《토정비결(土亭祕訣)》은 토정이란 호를 가진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문인인 이지함(1517~1578)이 쓴 책입니다. 그는 김시습·정렴 등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기인의 한사람으로 알려졌으며, 역학·의학·수학·천문·지리에 해박하였고, 진보적이고 사상적 개방성을 보였습니다. 이지함은 전국 각지를 돌아다닌 유랑 덕에 가난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두루 만납니다. 그래서 그는 가난한 백성을 위해 여러 가지 고민을 하고, 장사하는 법과 생산 기술을 가르치는 등 자급자족 능력을 기르도록 도왔습니다. 또 가난한 백성들에게 자신의 재물을 나눠주기도 했으며, 무인도에 들어가 박 수만 개를 수확해 바가지를 만든 다음 곡물 수천 석과 바꾸어 가난한 사람을 도왔습니다. 그는 명문가의 후손임에도 피지배층의 편에 서서 수공업, 상업, 수산업 등에 종사한 큰 인물입니다.
1200. 칠거지악에 해당하더라도 삼불거면 이혼 불가 20년 이상을 함께 산 부부 10쌍 중 2쌍이 이혼하는 등 중년이혼이 급증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선시대는 이혼할 수 있었을까요? 조선시대엔 질투를 할 때, 아들을 낳지 못할 때, 부모에게 공손하지 못할 때, 바람을 피우거나 나쁜 질병이 있을 때, 말이 많아 입방아에 오르고 물건을 몰래 훔쳤을 때 등은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 하여 부인을 버릴 수 있었던 여성에게만 불리한 제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양반은 임금의 허락을 받지 않고 이혼을 하면 벌을 받았습니다. 또 부모 삼년상을 치르고 있을 때나 가난했지만 혼인 이후 부유해졌거나, 부인이 돌아가 의탁할 곳이 없을 때 등 ‘삼불거(三不去)’의 경우에는 절대 이혼할 수 없었습니다. 고종 때는 자녀가 있는 경우를 하나를 더 보태어 ‘사불거(四不去)’가 되었습니다. 여성에게 절대 불리한 조건이었지만 그래도 일부는 요즘보다 더 인간적인 모습이란 생각입니다.
1199. 자격루 복원, 헐뜯을 일이 아니라 손뼉을 지금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자동시보장치가 있는 자격루를 복원하여 전시 중인데 ‘ㅈ’일보사에서는 엉터리 복원이라고 꼬집습니다. 저도 그 기자와 함께 그 자리에 2시간여 있었습니다만 저는 그 기자와 달리 그 복원에 크게 손뼉을 칩니다. 장영실이 만든 자격루는 어쩌면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발명품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복원품들은 자격루의 핵심인 자동시보장치가 빠진 껍데기였지요. 그래서 올바른 자격루의 복원은 문화계, 과학계 숙원사업이었습니다. 이에 한 공무원이 중심이 되고 과학자, 장인 30여 명이 1년을 함께하여 2005년 12월 복원 완료하고 그동안 이를 점검하고 확인해오다 이제야 공개한 것입니다. 그날 저는 공무원이 안내해 자격루 안에서 구슬이 떨어지는 것을 확인하며 많은 사진을 찍었습니다. 자신이 없으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 뜻과 과정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약간의 문제는 지적하는 정도로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1198. 자동시보장치가 있는 자격루 복원되었다 장영실이 만든 자격루는 정해진 시각마다 십이지신 모양의 나무인형이 팻말을 가지고 나와 시각을 알려주고 종, 북, 징이 저절로 울리도록 설계된 뛰어난 발명품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복원했다는 자격루들은 덕수궁에 있는 자동시보장치 없는 자격루를 토대로 복원했기에 모두 자동시보장치 없는 껍데기 자격루였습니다. 드디어 자동시보장치가 있는 자격루가 복원되었습니다. 문화재청이 시작한 복원사업은 지난 2004년 12월부터 2005년 12월까지 1년간 자격루연구회 이사장 남문현 건국대 교수와 국립고궁박물관 서준 선생을 중심으로 천문과학자와 중요무형문화재 기능장 등 30여 명이 함께한 것입니다. 무려 570년 만에 보루각 자격루가 제 모습을 찾았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11월 28일부터 12월 31일까지 개관기념으로 무료 관람을 할 수 있게 하였으니 가서 세종임금의 백성사랑과 장영실의 뛰어난 기술이 담긴 자격루를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1197. 남새와 푸성귀, 그리고 채소와 야채 이야기 "산사 옆에 잘 가꿔놓은 남새밭 / 몇 가지 종류의 푸성귀 얌전히 앉아 있다." (문병란의 시 ‘대처승의 남새밭’에서) 이 시에서 나오는 ‘남새’는 무엇이고 ‘푸성귀’는 무엇일까요? 먼저 ‘남새’는 밭에서 길러 먹는 채소를 가리키는 토박이말입니다. 이제 쓰지 않아서 거의 잊혔지만 평양 거리에는 ‘남새 상점’이란 간판이 흔히 보이고, ‘남새국, 남새닭알말이, 남새말이빵, 남새볶음, 남새비빔국수, 남새지짐’처럼 각종 음식 이름에도 두루 씁니다. 또 ‘푸성귀‘는 사람이 가꾼 채소나 저절로 난 나물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 남새보다는 쓰임새가 넓은 낱말입니다. 최근엔 이 남새나 채소가 아닌 ‘야채’란 말을 많이 씁니다. 야채(野菜)는 일본어 ‘야사이やさい野菜’에서 온 말입니다. 우리가 원래 쓰던 말인 ‘남새’, ‘채소’를 버리고 ‘야채’를 쓰는 일은 없으면 좋겠습니다. 말글생활에도 우리의 자존심은 살아있어야 합니다.
1196. 밤에 빨래를 널면 남편이 바람피운다 옛사람들 사이에선 하지 말아야 하는 금기가 있었습니다. 특히 옷과 관련된 금기 중에 밤에는 빨래를 널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까닭은 우선 빨래를 넌 모양이 죽은 사람을 부르는 초혼(招魂)과 닮았다고 여긴 것입니다. 또 악귀가 밤에 돌아다니다가 옷에 붙어서 옷의 주인을 괴롭힌다고 생각했으며, 남편이 바람을 피울 거라는 믿음도 있었지요. 이 밖에도 “덜 마른 옷을 입으면 억울한 소리를 듣는다.”, “옷을 입은 채 꿰매거나 단추를 달면 옷 복이 없어진다.”, “아랫도리를 고쳐서 윗도리를 만들면 등창이 난다.” 따위가 있습니다. 또 “해가 진 후에는 다듬이질을 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밤에 잠을 자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뜻이며, “다듬잇돌을 베고 자면 입이 삐뚤어진다.”라는 말은 차가운 다듬잇돌의 냉기가 올라오면 풍이 올 수도 있음을 경고한 말입니다. 옛사람들의 금기는 이렇게 슬기로움이 엿보입니다. 참고 : “옛날에도 일요일이 있었나요?”, 민병덕, 책이 있는 마을
1195. 조선시대 국수는 진가루가 아닌 메밀가루 판소리 춘향가 사설 중에 “얼맹이 쳇궁기(체구멍) 진가루 새듯”이란 대목이 나옵니다. 이 진가루, 곧 밀가루로 우린 국수를 만들어 먹지요. 그런데 《고려도경》에서 “고려에는 밀이 적어서 중국에서 수입하고 있다. 따라서 밀가루 값이 매우 비싸 잔치 때가 아니면 먹지 못한다.”라고 합니다. 또 서명응이 1787년 펴낸 《고사십이집(古事十二集)》에는 “국수는 본디 밀가루로 만든 것이나 우리나라에서는 메밀가루로 만든다.”고 기록되어 우리나라는 귀한 밀가루 대신 메밀가루나 녹두가루가 많이 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17세기 말의 요리책인 《음식디미방》이나 《주방문》에 메밀로 칼국수 만드는 방법이 소개되기도 했지요. 송나라 사람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고려 10여 가지의 음식 중 국수 맛이 으뜸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국수는 길게 이어진 모양 때문에 생일에는 수명이 길기를 비손하고, 혼례에는 맺은 인연이 길기를 바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1194. 평안도 항두계놀이를 아십니까? 우리 겨레는 예부터 더불어 살기 위한 여러 가지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두레인데 지방마다 조금씩 다른 이름, 다른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항두계놀이’도 역시 두레의 하나인데 협동작업을 하려고 조직된 평안도의 특수 농사꾼 계지요. 가뭄이 심하거나 홍수 또는 사고 때문에 농사일이 밀렸을 때 마을 사람들이 모두 하나 되어 농사를 돕곤 했는데, 이때 마을 사람들과 함께 이루어진 사연들을 노래로 표현하는 연희극이 ‘항두계놀이’입니다. 평안도 항두계 놀이는 전통 무의식적인 춤과 긴아리, 자진아리, 호미타령 등 토속민요와 수심가 엮음수심가 등 평안도의 대표적인 통속민요를 곁들여 연희합니다. 이는 우리나라 전통연희 형식을 비교적 충실히 갖추고 있어 민족 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공연작품인데 최근 서도연희극보존회(회장 유지숙) 주최로 공연을 해 호평을 받았습니다.
1193. 머리와 발, 어느 쪽이 높은가? “머리가 발꿈치에게 자신의 높음을 자랑했다. ‘온몸이 나를 높이고 그대는 몸의 아랫부분이니, 그대는 나의 종이 아닌가?’ 발꿈치가 말했다. ‘그대는 하늘을 이고 있고, 나는 땅을 밟고 있다. 그대는 오히려 이고 있는 것이 있지만 나는 땅을 밟고 있으면서도 감히 무시하지 않는데, 그대는 어찌 홀로 스스로 높이는가? 온몸이 그대를 높이는 것은 내가 받들어 주기 때문인데, 나의 공을 잊고 도리어 나를 천대한단 말인가? 그대가 높은 것을 자랑하는데 그대 또한 아래에 있을 때가 없겠는가? 이 말을 들은 머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조선 영조임금 때 규장각 교리를 지낸 성대중이 쓴 “청성잡기(靑城雜記)”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나름의 가치가 있게 마련인데 자신이 마치 최고인 것처럼 으스대고 다른 이를 무시하는 사람은 언젠가 이렇게 망신을 당할 수 있는 것이라는 교훈을 줍니다. 참고 : 궁궐 밖의 역사, 성대중 지음, 박소동 엮음, 열린터
1192. 겨우 목숨을 건진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 어떤 사람은 우리나라가 전해지는 역사서나 책, 문헌이 없다고 한탄합니다. 실제 중국에서 전해지는 역사서들이나 문헌에 견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역사서는 별로 없는 게 사실입니다. 게다가 일부 역사서는 편찬자가 사대주의에 빠져 기록된 것들이라고 문제제기를 받는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책이나 문헌은 세계문화유산에 올라있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 일기≫ 따위를 보아도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옛책들은 임진왜란, 625전쟁 등 전란 탓에 불타거나, 일본, 프랑스 등의 외세에 약탈당한 경우가 많습니다. 또 그와 반대로 어떤 책은 극적으로 목숨을 건지기도 했구요. 예를 들면 이규경이 쓴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는 군밤장수가 포장지로 쓰는 것을 최남선이 찾아냈는데 6·25전쟁 때 그만 불타버렸습니다. 다행히도 그 불타버린 책으로 필사본을 만들어 두었기에 겨우 목숨을 건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