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1. 실학파의 선구자 박제가, 중국을 최고로 생각했다 18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북학파 실학자 박제가는 중국 여행 경험을 바탕으로 당시 조선 사회의 문제점과 대책을 정리한 ≪북학의(北學議)≫를 써 조선을 개혁하려 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는 다음의 글들에서 보는 것처럼 중국은 무조건 최고로 생각하고, 대신 조선은 형편없다고 비판한 사람입니다. “중국의 자기는 정교하지 않은 것이 없다. 아무리 외진 마을의 쓰러져가는 집이라도 모두 금벽으로 그림을 넣은 병, 술병, 물동이, 주발 등의 자기를 가지고 있다. ~ 우리나라의 자기는 지극히 거칠다. 주둥이가 비틀어지고 추하여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을 지경이다. 우리나라에는 법도가 없는 상태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의 의술은 믿을 수 없다. 연경에서 약재를 수입해오지만 진품이 아니라는 것이 정말 걱정이다.” 박제가가 개혁을 위해 애쓴 인물이지만 이런 사대사상을 가지고 있음은 분명 한계입니다.
1170.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6.7미터×4미터짜리 대형지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지도가 1책에서 22책에 이르는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절첩식 책자로 모두 펼치면 6.7미터×4미터짜리의 대형지도임은 잘 모릅니다. 실물을 본 사람은 그 크기에 압도될 정도라고 하는데 보급을 위해 목판으로까지 새겼을 정도입니다. 또 대동여지도의 정밀함은 20세기 초 일본 해군이 가지고 있던 근대식 지도보다 더 우수한 것으로 평가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전에 김정호는 동여도(東與圖)라는 채색 필사본을 먼저 만들었습니다. 동여도는 김정호가 직접 손으로 그려 대동여지도보다 5천여 개 이상의 정보가 더 들어갈 정도로 정밀하고 우리나라 고지도 가운데서 가장 많은 정보를 담은 전국지도입니다. 김정호는 이 지도를 만든 뒤 대중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대동여지도를 만든 것으로 짐작됩니다.
1169. 오늘도 “나라말지키기” 서명운동은 이어집니다 경상남도는 1조 원을 들여 밀양시에 영어도시를 만든다고 합니다. 또 중앙정부의 제주도지원위원회는 7,800억 원을 투자해 제주 서귀포시를 영어도시로 바꿉니다. 이미 세워진 영어마을이 적자에 허덕이며, 실패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도 이젠 영어는 마을이 아니라 더 많은 예산을 들여 더 큰 도시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정부와 각 지방자치단체의 우리말 관련 예산은 그에 견주면 눈곱 만큼에 불과합니다. 중국은 중국어를 세계에 전파하려고 400억 원의 예산을 들여 여기저기 공자학당을 설립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몽골을 시작으로 중국,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에 설립하는 세종학당 관련 예산은 40억 원에 불과합니다. 만주족은 말(馬, 言)에서 내린 뒤 끝났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만주족처럼 말에서 내리지 않으려 오늘도 대학로 행사장에 서서 “나라말 지키기” 서명운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라말지키기서명운동 카페 : cafe.daum.net/signinghangul
1168. 조선시대의 소방서와 소방관 이야기 조선시대에도 소방서와 소방관이 있었습니다. 먼저 조선 전기에 한양을 건설하고 나서 화재가 잦자 집 사이에 방화장(防火墻, 불을 막는 담)을 쌓고, 곳곳에 우물을 팠으며,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개량했고, 1426년(세종 8) 일종의 소방서인 금화도감(禁火都監)을 설치하였습니다. 이 금화도감은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이되었다가 1481년(성종 12)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로 고쳤지요.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에는 멸화군(滅火軍)이란 상설소방대원이 있었는데 불을 없애는 군사라는 말이 재미있습니다. 정원은 50명이었고 24시간 대기하고 있다가 불이 나면 관원의 인솔하에 즉시 출동해서 불을 끄는 소방관입니다. 조선시대엔 실수로 자기 집을 태운 사람은 장 40대, 관가나 다른 사람의 집을 태운 사람은 장 50대, 불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힌 경우는 장 100대의 형을 받았지요. 일부러 집을 태우면 처벌이 더 무거웠음은 물론입니다.
1167. 신사임당은 고액권 지폐에 들어가면 안 된다(?) 최근 새로 발행되는 고액권 지폐에 넣을 초상의 최종후보로 백범 김구와 도산 안창호, 그리고 신사임당과 장영실이 뽑혔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그런데 신사임당은 일부 여성단체가 가부장제 사회의 여성상이라며 반대합니다. 그러나 보통 아는 것과는 달리 조선 중기까지는 여성이 벼슬길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남편에 복종하는 그런 풍토가 아니라 당당한 모습이었습니다. 당시의 결혼풍속은 이른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으로 여자 집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고, 신랑은 자신의 본가와 처가를 오가는 신세였지요. 따라서 조선 중기 이전 부인들은 시집살이는커녕 딸도 제사를 지내고, 재산도 똑같이 상속받는 당당한 인격체였습니다. 특히 신사임당은 남편에게 자신이 죽더라도 재혼은 하지 말라고 요구하기까지 한 여성이었습니다. 신사임당은 오히려 21세기에 맞는 여성상일지도 모릅니다.
1166. 조선시대 임금의 초상화는 어떻게 그렸을까? 조선시대 초상화의 특징은 ‘전신사조(傳神寫照)’ 곧 형상을 통해 정신을 전하는 것으로 곰보 자국, 검은 얼굴, 딸기코 등도 그대로 그리고 수염 한올 한올까지도 세밀하게 그렸습니다. 심지어 영의정이었던 체제공 영정에는 곰보자국도 그대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런데 감히 얼굴을 쳐다볼 수도 없었던 임금의 초상(어진)은 누가 그렸을까요? 어진(御眞)은 임금의 얼굴 부분을 그리는 주관화사(主管畵師) 1명을 중심으로 주관화사를 도와 옷을 그리고 색칠을 하는 1~2 명의 동참화사(同參畵師), 그림을 그리는 여러 가지 일을 도우면서 영정 제작을 배우는 3~4 명의 수종화원(隨從畵員)의 합동작품입니다. 어진을 다 그리면 화원들은 벼슬이 오르거나 상을 받지요. 또 주관화사는 ‘어용화사’라는 이름을 듣는 당대 최고의 화가로 대접받았습니다. 이런 내용은 어진을 제작하는 과정을 기록한 ≪어진도사도감의궤(御眞圖寫都監儀軌)≫에 나옵니다.
1165. 중요무형문화재 제89호 침선장을 아시나요? 문화재청이 지정하는 중요무형문화재 중에는 제89호 침선장이 있는데 바늘에 실을 꿰어 옷을 짓거나 꿰매는 장인을 말합니다. 침선을 넓은 의미로 해석하면 옷 전반을 만드는 일인데 옷을 말라서 바느질하는 봉제, 옷에 어울리는 무늬를 수놓는 자수, 옷에 곁들여 장식하려고 만드는 장신구공예 등입니다. 바느질하는 방법으로 기초가 되는 것은, 감침질 ·홈질 ·박음질 ·상침뜨기 ·휘갑치기 ·사뜨기 ·시침질 ·공그르기 ·솔기하는 법 등이 있습니다. 옷에 따라, 또는 옷의 분위기에 따라 알맞은 방법을 썼으며, 같은 옷이라도 겨울옷과 여름옷에 따라 홑바느질 ·겹바느질 ·솜두는 바느질 등 알맞은 바느질법을 사용합니다. 바느질에 필요한 기본재료는 옷감과 실이며, 바느질 도구는 자 ·가위 ·바늘 ·바늘집 ·골무 ·인두 ·인두판 ·다리미 ·누비밀대 ·실패 ·실고리 ·실첩 ·반짇고리 따위입니다. 현재 보유자는 구혜자 선생입니다.
1164. ‘민족’ 대신‘ 겨레’라는 말이 바람직 해 "공자가 민(民)이라는 말을 썼다.(民免而無恥. 논어2) 맹자는 임금에게 ‘백성과 함께 즐기라’(與民同. 맹자2)고 요구했다. 배달겨레 말이나 차이나 말에는 ‘민’이 있었지 민족(民族)이란 말이 없었다. 이 말[民族]은 일본말이다."라고 경상대 려증동 명예교수는 말합니다. 친일파로 꼽히는 최린이 1919년 일본말 ‘민족 자결(民族 自決)’이라는 말을 쓴 뒤 ‘민족’이란 말이 쓰이고 ‘겨레’가 잊혔습니다. 그러다가 1945년 광복이 되자 ‘겨레’라는 배달말이 다시 자라게 되어 ‘겨레’라는 신문사가 생겼고, ‘겨레체육대회’가 열렸는데 다시 친일파들이 득세하자 ‘겨레’가 힘을 잃고 ‘민족’이 살아났다고 합니다. ,br>‘민족’이란 말은 이미 우리말로 굳어졌습니다. 따라서 굳이 쓰지 말자고 주장하기는 어려워졌지요. 하지만 ‘민족’이란 말이 어떻게 쓰이기 시작했는지 알면 일본말에서 들어온 ‘민족’ 대신 토박이말 ‘겨레’라는 말을 쓰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요?
1163. 경복궁의 위치가 잘못되었다고 한 무학대사 조선왕조가 한양을 서울로 하고 궁궐을 지을 때 당대 풍수의 대가이며 불교계 왕사인 무학대사와 유학의 거목인 정도전 사이에 논쟁이 있었습니다. 무학대사는 “건물의 방위를 정함에 인왕산(서쪽 위치)을 주산(후광)으로 하여 낙산을 바라보는 형상이 국운이 장고할 것”이라고 하고, 정도전은 “일국의 장래를 어찌 미심쩍게 풍수에만 맡길 수 있겠는가? 임금이 백성을 잘 다스리려면 남쪽을 향하고 북쪽을 등져야 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정도전의 주장대로 북악산(청와대 뒤)을 주산으로 하여 남산을 바라보도록 경복궁이 지어졌습니다. 무학대사는 정도전의 주장대로 궁궐이 지어지자 북악산의 산세가 갈라지고 찢어지는 가파른 형상이라 200년 뒤 반드시 이 나라에 후환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며, 왕사의 직분을 버리고 산사로 들어가 잠적해 버렸다고 합니다. 조선 건국 200년 뒤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이 예언대로 된 것일까요?
1162. 위대한 과학자 장영실의 흔적은 없다 세종임금 때 장영실은 자동시보장치가 달린 자격루,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와 수표, 해시계의 일종인 현주일구, 정남일구, 앙부일구 따위의 다양한 과학기구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과학자인 장영실을 기리는 시설은 우리나라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장영실의 출생지 부산 동래의 축제 가운데 어린이 과학체험이 있을 뿐이며, 동래구와 부산시에 장영실과 관련된 어떤 행사나 시설도 없습니다. 부산의 장영실 과학고등학교도 이름만 붙였을 뿐입니다. 또 충남 아산시는 장영실을 시 인물로 꼽았지만 민간투자사업으로 장영실 과학관을 만들려고 추진 중일 뿐 현재 행사는 없습니다. 더구나 천안아산역 앞에 세운 동상은 공사장 안에 방치되어 있습니다. 다행히 “과학선현 장영실선생 기념사업회”에서 “장영실과학문화상”을 주고 있고, “장영실의 날 과학기술 전국대회”를 열고 있으며, “아산장씨대종회에서” 아산시 인주면에 묘소(가묘)와 추모비를 세워 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