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3. 조선시대 서당에선 무엇을 배웠을까? 조선시대는 서당이 기초교육을 담당하는 교육기관이었지요. 그 서당에서는 “하늘 천, 따 지”를 외우는 천자문을 맨 먼저 배웠음은 누구나 아는 일입니다. 이후 천자문을 떼고 나면 동몽선습과 명심보감을 배우게 됩니다. ≪동몽선습(童蒙先習)≫은 조선 명종 때 학자 박세무가 쓴 책으로 오륜을 풀이하고, 중국과 조선의 역사를 간략하게 썼습니다. 또 ≪명심보감(明心寶鑑)≫은 고려 충렬왕 때의 문신 추적이 중국 고전에서 보배로운 글 163항목을 가려서 모아 놓은 책입니다. 서당에서 공부하는 어린이들은 ≪동몽선습(童蒙先習)≫을 통해 오륜을 중심으로 인간의 윤리를 배우고, ≪명심보감(明心寶鑑)≫으로 사회생활에서 지켜야 할 도리를 배웁니다. 학문을 하든 정치를 하든 마음의 바탕이 올바르게 되어 있어야 한다는 당시의 교육관을 엿볼 수 있지요. 적어도 조선시대에는 지금처럼 명문대학을 가고 출세를 하도록 유치원과 초등학교 때부터 하는 지식 밀어넣기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1132. “해어화(解語花)”가 무엇인지 아시나요? 얼마 전부터 공연되는 뮤지컬에 “해어화(解語花)”란 제목이 붙었습니다. 그 “해어화”는 국어사전에는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뜻으로, 미인을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 말은 기생의 또 다른 별칭입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그들의 시와 풍류를 알아듣는다 하여 기녀들을 말을 하기도 알아듣기도 하는 꽃이라 해서 해어화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조선시대 기생들은 요즘 화류계 여성들과는 달리 가무악(歌舞樂)은 물론 시(詩)․서(書)․화(畵)에도 능했던 황진이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지요. 기생들과 관련된 말로 “기방오불”이란 말이 있습니다. 기방에서 하지 말아야 할 다섯 가지를 뜻합니다. “기생의 맹세를 믿지 마라, 기방에 꽃을 들고 가지 마라, 기방에서 처첩 자랑하지 마라, 기방에서 문자자랑 하지 마라, 기생 앞에서 제집 효녀․열녀 자랑하지 마라.” 따위입니다. 그건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겠지요?
1131. 고려시대, 옷에 향기를 쏘는 ‘박산로’가 있었다 우리 옛 여인들의 몸에선 항상 은은한 향이 풍겨왔고, 향수, 향로제조기술은 어진 부인의 자랑스러운 덕목이었습니다. 삼국사기에 보면 진지왕과 도화녀 이야기가 나옵니다. 도화녀는 폐위된 진지왕과 이레 동안 잠자리를 같이했는데 그때 사용한 향 때문에 향내가 진동했다고 합니다. 신라 시대에는 아랍 지역에 사향과 침향을 수출하였고, 일본에도 용뇌향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향을 수출할 정도였지요. 중국 문헌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남녀노소가 신분의 귀천에 관계없이 향주머니를 찼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 또 ‘고려도경(高麗圖經)’을 보면 고려에는 향을 끓는 물을 담아 옷에 향기를 쏘는 ‘박산로(博山爐)’가 있었지요. 또 고려의 귀부인들은 비단 향주머니 차기를 좋아했으며, 흰 모시로 자루를 만들어 그 속을 향초(香草)로 채운 자수 베개를 즐겨 썼다고 합니다. 우리에게서도 마음의 향기가 우러나왔으면 좋겠습니다.
1130. 어떤 때는 흐느끼고, 어떤 때는 앙증맞은 소리의 해금 국악기 가운데 최근 해금은 부쩍 인기를 얻고 있는데 고려 때 우리나라에 들어온 활로 현을 마찰시켜 소리를 내는 찰현악기(擦絃樂器)의 하나입니다. 해금은 본래 중국 요하(遼河) 상류 북방의 유목민족인 해족(奚族)의 현악기가 중국에 전래한 것이라고 합니다. 해금은 6줄에서 12줄까지의 다른 찰현악기에 견주면 줄이 두 줄뿐이지만 가슴을 후벼 파는 애절함과 비가 온 뒤 맑게 갠 하늘처럼 시원함, 어떤 때는 흐느끼고, 어떤 때는 앙증맞은 음색은 많은 이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역사는 거문고나 가야금처럼 깊지는 못하지만, 꽤 오랫동안 서민층에서부터 상류층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받아온 것입니다. 특히 최근 새롭게 창작된 퓨전곡과 대중음악들 가운데 특히 해금이 많이 쓰이는데 서양의 바이올린과 함께 연주하면 오히려 바이올린을 이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 까닭은 아마도 자유로운 조율과 함께 독특한 음색에서 오는 탓일 것입니다.
1129. 경복궁 흠경각의 물시계는 세종의 백성사랑이었다.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천문학자인 김돈이 지은 흠경각기(欽敬閣記)를 보면 세종 20년 정월에 흠경각(欽敬閣)을 완성하여 그 안에 물시계를 설치하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곧, 강녕전 서쪽에 흠경각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사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륜(玉漏機輪)을 설치한 것입니다. 흠경이란 말은 ‘농경사회 지배자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인 하늘을 보고 농경에 필요한 절기를 정하여 알리는 일’인 ‘관상수시(觀象授時)’를 실천하는 집이란 뜻입니다. 세종은 흠경각을 편전인 천추전 가까이 짓고, 수시로 드나들며, 천체의 운행을 관찰하여 농사지을 때를 알아 백성에게 알려주고, 하늘의 차고 비는 이치를 깨달아 왕도정치의 본보기로 삼았습니다. 또 세종은 흠경각루에는 갖추어놓은 춘하추동의 풍경과 7달의 농사짓는 모습을 보며 백성 사랑과 농사의 중요성을 늘 되새겼습니다. 세종은 백성을 끔찍이 사랑한 임금이었습니다.
1128. 손가락이나 손톱에 먹물을 묻혀서 그린 그림, 지두화 그림을 그리라는 협박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눈을 찔러 애꾸가 된 최북이란 조선 영조 때의 화가가 있지요. 그는 의미있는 그림을 선물했을 때 반응이 변변치 않으면 두말없이 그림을 찢었으며, 의미없는 그림에도 반색을 보이면 도리어 뺨을 치고, 받은 돈을 돌려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최북은 사회에 대한 반항과 부정으로 기존의 통념에 도전한 대신 그의 삶은 늘 고독이 함께 했습니다. 이런 최북의 삶은 ‘풍설야귀인도(風雪夜歸無人圖)’에 잘 나타납니다. 눈보라 치는 겨울 밤, 귀가하는 나그네는 거칠게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헤치고 의연히 걸어갑니다. 그림 속 나그네는 어쩌면 거침없는 성격과 고달픈 인생의 최북 자신인지도 모릅니다. 이 그림은 붓 대신에 손가락이나 손톱에 먹물을 묻혀서 그린 그림인 ‘지두화(指頭畵)’로 알려졌는데 이 그림을 그린 그의 손놀림에 불 같은 성격과 고독한 삶이 더해져 있는 것은 아닐까요?
1127. 가을비는 장인 구렛나루 밑에서도 피한다 지난 토요일은 비가 추적추적 내렸습니다. 곡식이 익어가는 계절에 굵고 거세게 퍼붓는 ‘자드락비’, 굵은 빗줄기가 세찬 바람을 타고 몰아치며 채찍으로 바닥을 후려치듯 좍좍 쏟아져 내리는 ‘채찍비’가 아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이젠 완연한 가을이겠지요. 가을비와 관련한 속담을 찾아봅니다. “가을비는 빗자루로도 피한다.”는 보통 가을에 오는 비는 적게 오기 때문에 빗자루로도 가려 막을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와 비슷한 말로 “가을비는 장인 구렛나루 밑에서도 피한다.”란 것이 있는데 가을비가 빗방울 하나하나는 굵은 듯하지만 비의 양도 적고, 빗줄기가 촘촘하지 못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겠지요. 그런가하면 “가을비는 내복 한 벌”이란 속담도 있는데 가을비가 내린 뒤에 갑작스럽게 추위가 시작되면 추위를 느끼기 때문에 내복을 꺼내 입는다는 뜻입니다. 또 “가을비가 잦으면 춥지 않다.”라는 속담은 대륙성 고기압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해 비가 자주 오는 것이므로 추위가 늦게 온다는 것을 뜻합니다.
1126. 마상재 무예 ‘좌우초마(左右超馬)’를 아시나요? 정조 14년(1790년) 이덕무·박제가·백동수가 펴낸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는 조선 후기의 무예 훈련 교범으로 장창(長槍), 쌍수도(雙手刀), 본국검(本國劍), 표창(標槍), 격구(擊球) 마상재(馬上才) 등의 무예가 들어 있습니다. 이 가운데 “마상재(馬上才)”는 달리는 말 위에서 기마수 ·마상재인이 갖가지 재주를 부리는 기예를 말합니다. 그 마상재의 재주종목에는 안장을 잡고 말의 옆구리에 붙어서 발이 땅에 닿을락말락하게 매달려가다가 몸을 솟구쳐 반대쪽 옆구리에 매달려 달리는데 말잔등을 서너차례 넘나들며 행해지는 재주인 “좌우초마(左右超馬)”, 두손으로 안장을 짚고 말의 목쪽에 머리를 대고 물구나무를 서는 “마상도립(馬上倒立)”, 한손으로 안장을 잡고 안장 뒤로 몸을 숨긴 후 다른 한손으로는 땅을 긁어서 모래흙을 끼얹는 것으로 재인이 몸을 말의 양쪽으로 번갈아 이동하면서 달리는 “좌우등리장신(左右鐙裏藏身)” 등이 있습니다.
1125. 창경궁 명정전과 문정전의 방향과 기둥이 다른 까닭 창경궁에는 정전인 명정전(明政殿)과 편전인 문정전(文政殿)이 있습니다. 그런데 명전전은 동향이며, 기둥이 둥근데 반해 문정전은 남향이고 네모 기둥입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요? 이 두 건물은 성종 때 세워졌는데 임진왜란 때 불이 타 광해군 때 다시 지은 것들입니다. 다시 지을 때 광해군은 문정전도 명전전처럼 동향 그리고 둥근 기둥으로 더 크게 하려고 했습니다. 이 때 사간원이 “문정전을 명정전과 다르게 지은 것은 거처하기에 편리하게 하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정전과 구별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문정전을 명정전과 동향으로 나란히 세우고 기둥을 둘글게 한다면 정전이 둘이 되므로 옳지 않으며, 궁궐을 고치는데 백성에게 고통이 따르니 안 된다.”며 반대했습니다. 이에 광해군이 사간원의 주장에 따랐고, 문정전의 방향과 기둥의 모양이 명전전과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1124. 고구려 사람들, 통이 넓은 바지를 입었다 요즘 한복이 잊혀가면서 한복에 많은 편견이 존재하는데 그 중에 가장 흔한 이야기는 “불편하다”입니다. 품이 넓은 옷을 입으면 활동하기 불편할 것이란 이야기이지요. 정말 불편할까요? 북한 용강군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벽화고분인 쌍영총(雙楹塚)의 주실(主室) 동벽에는 점무늬가 있는 통이 넓은 바지인 ‘대구고(大口袴)’를 입은 남자들의 그림이 있었고, 대구고와 함께 소매폭이 넓은 ‘대수삼(大袖衫)’을 입었습니다. 고구려는 용맹을 자랑하던 시대여서 사람들도 대단히 활동적이었을 것인데 이때의 귀족들이 현재의 한복과 조금 다르지만 소매가 넓은 저고리와 통이 넓은 바지를 입었다면 결국 한복은 활동성이 떨어지는 옷이 아니라는 반증일 아닐까요? 또 한복에는 옷을 간편하게 해주는 토시와 행전이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전통무예를 하는 사람들은 무예를 하는데 한복만큼 편한 옷이 없다고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