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6. 혁명가 김산에게 아리랑은 희망의 끈이었다. “우리는 불 옆에 둘러 앉아 노래를 부르고 이야기 하였다.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모두에게 가르쳐 주었다. 우리민요 아리랑, 우리는 이 노래를 부르고 모두 울었다. 중국 사람들은 이 노래가 아주 마음에 들어서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위는 김산이란 혁명가가 소비에트구역 전투에서 패하고, 다른 두 명의 조선인과 8명의 중국인이 함께 탈출하는 과정에서 식량을 구하기 위해 헤매던 중 아리랑을 부른 장면으로 님 웨일즈가 쓴 “Song of Ariran”이란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김산은 일제강점기 일본에 저항하던 혁명가였지만 체포되어 일본의 감옥에서 고통을 받았고, 일본의 간첩으로 오인되어 중국공산당에게 처형당했는데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에서 아리랑은 삶을 지탱하던 노래였답니다. 그 “Song of Ariran”이 최근 신나라에 의해 음반으로 출시 되었습니다.
1075. 문익점의 목화씨 10개 중 한 개만 성공한 까닭 조선 태조실록의 기록에 보면 문익점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올 때에 목면나무의 씨 십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고 돌아왔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다 실패하고 문익점의 장인이 심은 한 개만 성공했지요. 그 까닭은 사람들은 재배방법을 몰라서 그런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그것은 재배방법을 몰랐던 때문이 아니라 목화에 맞는 기후조건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문익검이 들여온 목화씨는 인도면으로 우리나라의 기후와는 맞지 않아 실패했고, 그나마 남쪽지방 따뜻한 곳에 재배했기에 한 개라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중국 신강자치지구 고창이란 곳과 함께 단군조선 때부터 초면이 자생했는데 초면은 우리의 기후와 맞는 품종이었지요. 또 인도면은 나무이며, 꽃의 크기가 술잔만 하지만, 초면은 풀이고 흰 버들개지처럼 꽃이 작다고 합니다. 참고 : “한국 고대 복식”, 박선희, 지식산업사
1074. 문익점이 목화씨를 숨겨 들어왔다는 것은 허구 우리는 그동안 문익점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붓두껍에 목화씨 6알을 숨겨 가지고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문헌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조선 태조실록 14권, 7년(1398년) 6月 13일자 기록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문익점은 계품사인 좌시중 이공수의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올 때에 길가의 목면나무를 보고, 그 씨 십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고 돌아왔다.” 고려사의 기록에도 “문익점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본국으로 돌아오면서 목화씨를 얻어가지고 와서...”라고 되어있지 숨겨들어 왔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당시 목화는 원나라 곳곳에 널리 심어져 있는 것으로 반출금지 품목도 아니어서 붓두껍에 숨겨 가지고 들어올 물건은 아니었습니다. 문익점의 목화씨 사건은 실제 사실과는 다르게 신화가 되어버렸습니다.
1073. 올해는 판소리 동초제 창시자 김연수 탄신 100돌 판소리의 유파 중에는 동초제도 있습니다. 동초제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춘향가’의 예능보유자였던 판소리의 명창 동초 김연수(1907∼1974)가 1930년대 초 여러 판소리 명창들의 소리 중 좋은 점만 골라 창시, 자신의 호를 따서 '동초제'라고 했습니다. 특히 동초제는 사설이 명확하여 청중이 듣기에 아주 좋다는 특징이 있지요. 올해는 그 동초 김연수 선생이 태어나신 지 100돌이 되는 해입니다. 그 해를 맞아 지난 5월 30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는 김연수를 이어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춘향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오정숙 선생이 김성예 등 제자들과 함께 춘향가를 완창했습니다. 73살의 많은 나이에도 마지막일지 모르는 무대에서 스승에게서 배운 동초제를 혼신을 다해 소리를 해서 큰 손뼉을 받았습니다. 오는 11월에는 김성예의 무대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1072. 민족지도자 이상재 선생의 외침 “저 서구열강을 보라. 학술의 발달이 저 같으며 도덕의 진보가 저 같으되 그 나라가 기운차게 일어나 날로 강성해가니 이는 그 문화가 동양 고대처럼 인민을 몰아서 전제하(專制下)에 굴복하게 하던 문화가 아니라 자유를 구가하며 모험을 숭상하는 문화인 까닭이니 한국의 뜻있는 군자여! 자국 고유의 장점을 보존하며, 외래 문명의 정화(精華)를 채취해서 신국민을 양성할만한 문화를 진흥할 지어다.” 위는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의 민족지도자 이상재 선생이 ‘대한매일신보’ 1910년 2월 19일자에 쓴 ‘문화와 무력’이란 제목의 논설 일부입니다. 이는 국수주의나 사대주의가 아닌 우리 고유문화의 장점 위에 다른 문명의 우수한 것을 더하여 국민을 이끌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자고 주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가 아닐까요?
1071. 비와 관련된 재미있는 속담들 지금은 장마철이어서 비가 자주 내리는데 우리 속담에는 비와 관련한 것이 많습니다. 먼저 “여름비는 잠비, 가을비는 떡비”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여름철에 비가 오면 모심기와 보리타작이 끝났기 때문에 비가 와도 들에서 할 일이 없고, 무더위를 식혀 주어 낮잠 자기에 알맞은 날씨이고, 가을에 비가 오면 햇곡식으로 떡을 해먹게 된다는 뜻입니다. 또 “여름소나기는 소 등을 가른다.”라는 말은 한여름에 나타나는 소나기는 한정된 지역만 뜨거워져 생긴 구름에 의해 발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아주 좁은 지역에만 오게 됩니다. 이것을 과장해서 소머리 부분은 비가 내리고 엉덩이 부분에는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밖에 “장마는 나이 많은 아내의 잔소리와 같다.”라는 것도 있습니다. 장마가 끝난 줄 알면 다시 비가 내리곤 해서 이는 아내의 잔소리와 같이 그칠 듯 그칠 듯 하면서도 이어진다는 의미입니다.
1070. 한자이름에서 한자를 떼어버리다. “주민등록증에 이름이 한자로만 적히던 시절, 내 주민등록증에는 오랫동안 가운데 이름이 ‘鳳’(봉)자가 아닌 ‘風’(풍) 자가 적혀 있었다. ‘鳳’ 자를 어느 유식한(?) 동사무소 직원이 ‘几’ 속에 ‘又’를 써야하는 약자를 획이 하나 없는 ‘X’ 자를 썼기 때문에 ‘風’의 약자(간체자)가 돼 버린 것이다.” 이에 민족문제연구소 이봉원 운영위원장은 한자이름이지만 한자를 떼버리겠다고 생각하고, 이 아닌 으로 해달라고 법원에 개명신청을 하여 허가를 받았습니다. 나이가 어느 정도 들어 사회생활 그것도 창작생활을 오래 해왔기에 전혀 다른 이름으로 바꾸면 남에게 다소 혼란을 줄 수가 있고, 또 이것저것 다 고치려면 매우 번거롭기도 할 것이기 때문에 한말글(한글과 한국말) 이름으로 바꾸는 대신에 쓰고 있던 한자이름에서 한자만 떼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정체성과 자존심을 지키려 한 것이지요.
1069. 효창원은 국립묘지가 되어야 합니다. 어제는 백범기념관에서 백범 김구 선생 58주년 추모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추모식에 참석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바로 옆에 자리한 백범 선생님의 묘소에 참배하지 않았습니다. 묘소 참배없는 추모식은 정치적인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더구나 국방부장관이 보낸 화환에는 한자로 국방부장관(國放部長管)이라고 써서 나라를 내놓는 장관이 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추모식장에 걸린 펼침막에는 온통 한자로 적혀있었습니다. 한자를 모르는 사람은 추모도 하면 안 되나요? 또 기념관 후문에서는 효창원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란 모임에서 효창원을 국립묘지로 승격해야 한다는 작은 시위가 있었습니다. 현재 백범 선생님을 비롯하여 임시정부 요인 7분이 묻힌 묘역이 국립묘지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헌법에 대한민국은 임시정부를 잇는다고 했지만 이것이 진정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 것인지 묻는 것입니다.
1068. 해금과 아쟁은 어떻게 다를까요? 한 공연장에서 어떤 아버지는 아들에게 알려줍니다. “저 악기는 아쟁이라는 거야.” 전 깜짝 놀랐습니다. 해금을 아쟁이라고 하다니? 전 그 아버지에게 조용히 해금과 아쟁 모양새의 다른 점을 일러주었습니다. 그런데 해금과 아쟁을 혼동하는 것은 이 아버지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그러합니다. 아쟁과 해금은 똑같이 활로 줄을 문질러 연주하는 찰현악기(擦絃樂器)이지만, 아쟁은 가야금처럼 가로 뉘어서 연주하며, 8~10줄(예전엔 7줄)을 가지고 있고, 해금은 세로로 세워서 연주하고 2줄 밖에 없는 악기입니다. 또 아쟁은 서양의 첼로처럼 장중한 저음이 나지만, 해금은 바이올린처럼 높고 고운 소리를 냅니다. 최근 해금은 아름다운 창작국악으로 널리 연주되어 인기가 높지요, 하지만 아쟁은 서양 관현악에서 첼로가 빠질 수 없듯이 국악 관현악에서는 저음으로 든든하게 받쳐주는 중요한 악기입니다.
1067. 세종은 백성들 삶의 질 향상에 정성을 쏟았다. 세종은 백성을 끔찍이 사랑하는 임금이었습니다. 훈민정음의 창제뿐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복리후생 정책에도 정성을 쏟았습니다. 우선 세종은 농사직설을 펴내고 농법을 조선에 맞게 개량ㆍ보급해 토지 1 결당 쌀 생산량을 최고 4배까지 증가시킵니다. 또 의녀 제도를 온 나라에 확산시켜 부녀자들의 의료조건을 개선하고, 산모와 남편의 출산휴가를 주었으며, 죄수의 생명보호를 위해 감옥 안에서의 사망자 상세보고 시스템을 마련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신분의 귀천없이 80살이 넘으면 임금이 벌이는 양로연에 참석할 수 있도록 했으며, 화재의 위험이 큰 도성의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바꾸고, 온돌과 마루를 온 나라에 보급시켰습니다. 또 제생원 제도를 개선해 버려진 아이들의 죽음을 막기도 합니다. 세종임금은 이렇게 백성의 행복한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임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