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3. 우리 겨레의 ‘더불어 살기’, 현대에 되살려야 미국에서는 오랫동안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던 한 사람이 무고한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이번 사건을 보면서 우리는 생각해 봅니다. 참살극의 잘못은 총을 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소수민족에 대한 우월감과 배타심을 가진 백인의 미국인들에겐 그는 하나의 놀림감이었을 것이고, 이것이 참살극을 잉태한 원인일 것입니다. 우리 겨레는 ‘더불어 살기’가 철학이었습니다. 설밑의 ‘담치기’, 정월 초이레의 ‘이레놀음’, 입춘의 ‘적선공덕행’이란 세시풍속이 있었고, 짐승들을 위한 ’고수레‘, 새들을 위한 ’까치밥 남기기‘, 온 마을 사람이 같이 하는 ’김장 하기‘, 연주자와 청중이 함께 하는 ’풍물굿‘들은 고통받는 이웃을 두고 보거나 즐기지 않았습니다. 이런 우리 겨레의 ’더불어 살기‘ 철학을 현대에 되살릴 때 ’왕따‘도 참살극도 없어지지 않을까요?
1012. 태극무늬는 오랜 옛날부터 우리 겨레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태극도형이 중국 주렴계(周濂溪)의 ‘태극도설’에서 비롯되어 중국 것이므로 국기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주렴계는 송나라 신종 때 즉 우리나라 고려 문종 때인 1070년경의 사람입니다. 하지만, 신라 때인 682년에 세웠다는 감은사(感恩寺) 석탑 장대석에 새겨진 태극도형은 주렴계의 태극도설보다 400년 가까이 앞선 것입니다. 또 중국 주렴계 태극은 음이 검정, 양은 흰색이며, 음양의 구역이 좌우 대칭으로 되어있고, 음양의 머리 부분에는 점이 있으며, 둘레에는 8괘가 배치되어 있어서 우리와는 다릅니다, 하지만, 우리의 태극무늬는 음은 청색, 양은 홍색으로 되어 있으며, 음양의 권역은 좌우 또는 위아래 대칭으로 되어 있고, 네 귀퉁이에 4괘를 배치한 것이지요. 태극무늬는 우리 겨레가 오랜 옛날부터 써온 것이므로 중국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참고 : “태극기”, 허정윤ㆍ반재원, 도서출판 한배달
1011. 간송 선생이 수집한 것은 민족정신입니다. 일요일마다 텔레비전에서는 진품명품이란 프로그램이 방영됩니다. 거기엔 여러 가지 문화유물을 내놓고 출연자들이 값을 매겨 봅니다. 그런데 우리 문화재 가운데 가장 값이 나가는 것은 무엇일까요? 최고가 문화재는 600억 원에 달하는 국보 제83호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며, 400~500억 원대의 국보 제87호인 신라 금관총 출토 금관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문화유산을 돈으로 따지는 건 선조의 예술혼에 누를 끼치는 일이어서 바람직하지 않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간송 전형필 선생은 일제강점기 때 현재 남은 유일본인 훈민정음 원본(국보 제70호)을 비롯한 많은 우리 문화재를 자신의 온 재산을 다 바쳐 수집했습니다. 그래서 말년에 경제적으로 고통을 받았지만 그는 문화재를 팔지 않았습니다. 간송 선생이 수집한 것은 돈이 아니라 민족정신이었음이 분명합니다.
1010. 얻고 잃음에 마음을 쓰지 않는다. “최홍효는 나라에서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다. 일찍이 과거에 나아가 답을 쓰는데, 한 글자가 왕희지의 글씨와 비슷하게 써졌다. 않아서 하루 종일 살펴보다가 차마 낼 수가 없어, 답안지를 품에 넣고 돌아왔다. 이는 얻고 잃음에 마음을 쓰지 않은 것이라 말할 만하다.” 이 글은 ‘열하일기’를 쓴 조선후기 실학자 겸 소설가 박지원의 ‘형언도필첩서(炯言挑筆帖序)’에 있는 내용입니다. 무슨 일이든 몰두를 해야만 이룰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해서 출세에 도움이 될지, 먹고 사는 데 보탬이 될 지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자체로 좋아서,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어 한다는 말입니다. 평소 수백 수천 번을 써도 만족스럽지 않던 것이 몇 년에 한번 열리는 과거시험장에서 왕희지 글씨를 닮은 글자가 써지자 출세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는 얻고 잃음에 마음을 쓰지 않고 그저 글씨 쓰는 것을 좋아한 것입니다. 참고 : “죽비소리”, 정민, 마음산책 ▶ 얼레빗에 그림을 그려 주시는 이무성 화백님이 얼레빗 즈믄번 글을 보시고, 축하의 그림을 그려 주셨습니다. 맨 위에는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1000회 기념 축화‘라고 쓰였으며, “천년을
1009. 성매매 사건, 조선은 효시하고 일본은 용서 조선시대 일본과 교역을 하기 위한 왜관이 있었습니다. 숙종 16년 이 왜관에서 아주 특별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명원이라는 사람이 아내와 딸, 여동생을 왜관에 들여보내 일본인에게 몸을 팔게 했습니다. 이 사실이 동래 관헌에게 알려지면서 두 명은 옥에서 죽고, 나머지 다섯 명은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아 놓는 ‘효시(梟示)를 당했습니다. 조선인과 일본인의 성적 접촉은 단순히 도덕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유교의 나라 조선의 기강을 흔드는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했던 까닭입니다. 하지만, 조선으로부터 똑같은 처벌을 요구받은 일본은 관련자를 용서하고, 쓰시마 섬으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일본 나가사키에 네델란드 무역선이 드나들던 ‘데지마 상관’이 있었는데 일반 여성의 출입은 엄격히 통제했지만 몸을 파는 게이샤는 맘대로 드나들도록 하여 돈을 벌게 한 일본의 성문화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참고 : 에이치디역사스페셜5 “실리인가 이상인가, 근대를 향한 역사의 선택, 효형출판
1008. 임금, 출생에서 죽음까지 모든 의례를 기록했다. 조선시대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를 비롯하여 기록의 왕국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기록하여 후세에 경계가 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 가운데는 임금이 태어나서 죽은 다음까지의 의례를 모두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습니다. 먼저 탄생과정을 기록한 ‘호산청일기(護産廳日記)’, 태를 보관할 장소를 선정하고 태실(胎室)을 만들어 안장하는 과정을 기록한 ‘안태의궤(安胎儀軌)‘, 뒤에 왕자가 왕세자로 책봉되면 ’세자책례도감의궤(世子冊禮都監儀軌)‘를 기록합니다. 그런 다음 혼인을 하게 되면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 임금으로 즉위하면 태실을 태봉(胎封)으로 올리고, 주위 석물을 배치하는 과정을 기록한 ’태실가봉석난간조배의궤(胎室加封石欄干造排儀軌)‘를 기록하며, 임금이나 왕비가 죽으면 ’국장도감의궤(國葬都監儀軌)‘로 마무리 합니다.
1007. 에움길ㆍ거님길ㆍ굽돌이길, 아름다운 길 이름들 우리 토박이말에는 아름다운 길 이름들도 있습니다. 늘어선 집들의 뒤쪽으로 난 길로 마을 앞 ‘큰길’에 상대되는 ‘뒤안길’, 차나 사람이 많이 다니는 큰 길은 ‘한길’, 나지막한 산기슭에 경사지게 있는 좁은 길은 ‘자드락길’ 같은 말은 지금은 잊혔지만 예전에 많이 쓰던 아름다운 말입니다. 이밖에 정겨운 말들로 우회로는 ‘에움길’, 등처럼 굽은 길은 ‘등굽잇길’, 본디 길이 없던 곳인데 많은 사람이 지나가 한 갈래로 난 길은 ‘통길’, 산책로는 ‘거님길’이라고 하며, 강이나 냇가에 돌이 많이 깔린 길은 ‘서덜길’, 미로(迷路)는 ‘홀림길’, 풀이 무성하게 난 길은 ‘푸서릿길’, 이라고 하지요. 흔히 관공서에서 마을 안에 나있는 길을 ‘이면도로(裏面道路)’라고 억지 한자말을 만들어 쓰는데 원래 있던 토박이말 ‘속길’을 살려 쓰고, 외래어와 우리말을 합친 커브길은 ‘굽돌이길’로 쓰면 좋을 일입니다.참고 :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우리말 풀이사전”, 박남일, 서해문집
1006. 조선시대 목숨을 걸고 밀수한 인삼 “중국 배가 와서 시끄럽게 하고, 홍삼을 몰래 사가는 것을 단속하되, 아울러 이러한 내용을 개성 유수(開城留守)와 평안도·함경도) 두 도의 관찰사에게 경계하라고 명하였다.” 이는 고종실록 1권, 1년(1864) 2월 3일자 기록입니다. 또 1828년 북경에 다녀온 박사호의 기행문인 '심전고(心田稿)'에는 "연경에 가지고 가는 것이 금지된 물건은 금, 인삼, 담비가죽인데 홍삼은 그중에서도 가장 엄격했다. 연경 사람들이 그 값의 10배를 주고 사기 때문에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몰래 거래하므로 그것을 막을 도리가 없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중국에서 인삼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몰랐는데 서양에도 신비의 영약으로 알려질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인삼은 요즘 시세로 따져 금값의 1/3 정도로 거래될 만큼 조선의 효자 상품이었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목숨을 걸고 밀수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1005. 북한의 패션쇼, 조선옷 품평회 “피복연구소 옷전시회장에서 열린 전시회에서는 치마저고리를 비롯해 달린옷(원피스), 나뉜옷(투피스), 셔츠, 외투 등 올해 창작된 92점의 여성 옷작품이 선보였다. 경쾌하고 발랄한 음악에 맞춰 아름답고 화려한 옷을 맵시입게 차려입은 모델들이 등장하자 관중들 속에서는 연이어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위 글은 언론에 보도된 북한의 ‘조선옷 품평회’ 관련 기사의 일부입니다. 북한은 패션쇼라는 말 대신에 ‘조선옷 품평회’라는 말을 씁니다. 그리고 ‘조선옷 품평회’는 우리처럼 서양옷 위주가 아닌 조선옷(한복) 중심에 서양옷이 보태지는 그런 형태입니다. 조선 경공업위원회 피복연구소에서 펴낸 이란 책에도 '조선옷 품평회'의 사진이 나와 있습니다. 여기에는 피복전문가들과 애호가들이 참가했는데 명절옷, 결혼식옷, 일상옷, 기타옷으로 나뉘어 10여종의 1000여벌의 옷이 출품되었습니다.
1004. 효창원, 불법 시설물 고발해야 국가지정문화재는 국보, 보물, 사적 등이 있습니다. 사적도 중요한 국가지정문화재의 하나인 것입니다. 그런데 백범 김구 선생님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 일곱 분의 묘소가 있는 효창원도 사적의 하나입니다. 그 중요한 국가지정 시적, 효창원이 훼손되었습니다. 사적에는 원래 사적과 관련 있는 시설 외에는 설치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효창원 주변에는 효창운동장이 있고, 곳곳에 대한노인회관, 육영수송덕비, 북한반공투사위령탑, 원효동상 등 불법 시설물들이 즐비합니다. 또 허가도 받지 않은 습지 시설까지 버젓이 조성해 놓았습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일곱 선열의 엄숙한 묘소에 이런 시설이 들어섰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일 것입니다. 어제 “효창원을 사랑하는 사람들” 등의 단체에서 효창원의 올바르게 성역화를 하기 위한 토론회가 있었고, 불법 시설물을 즉각 고발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