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0. 조선시대 무인이 입었던 겉옷, 철릭 가끔 드라마에 보면 조선시대 무신이 입던 공복인 철릭을 봅니다. 철릭의 기본형태는 깃이 곧은 직령(直領)이며, 웃옷과 아래옷이 연결된 겉옷인데, 발굴된 유물을 보면 웃옷과 아래옷 비율이 같은 것부터 아래옷이 세배까지 긴 것도 있습니다. 소매의 폭은 좁은 착수부터 폭이 넓은 광수포까지 있지요. 또 허리에 주름을 잡는데 보통 0.1에서 0.2센티미터이며, 요선철릭은 허리에 가로로도 주름을 잡아 아름답습니다. 철릭은 고려말부터 조선시대 전 시대에 걸쳐 입었는데 몽고의 질손으로부터 유래한다고 하며, 고려시대에 정착되었다고 봅니다. 철릭은 무신뿐만 아니라 조선 때부터 악동무복, 행사시 군사들의 시위복에 이어 임금의 평상복인 곤룡포의 겉옷 및 사대부 관복인 단령의 겉옷, 하급직인 별감, 악공, 향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입었습니다.
939. 입춘의 세시풍속, 아홉차리 입춘의 세사풍속 중엔 ‘아홉차리’가 있는데 이날 각자 아홉 번씩 일을 되풀이하면 한 해 동안 복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액이 생긴다고 합니다. 글방에 다니는 아이는 천자문을 아홉 번 읽고, 나무꾼은 아홉 짐의 나무를 하며, 노인은 아홉 발의 새끼를 꼽니다. 계집아이는 나물 아홉 바구니를, 아낙들은 빨래 아홉 가지를, 실은 감더라도 아홉 꾸리를 감지요. 또 밥을 먹어도 아홉 번, 매를 맞아도 아홉 번을 맞았습니다. 아홉 번 한다는 뜻은 우리 겨레가 ‘9’라는 숫자를 가장 좋은 양수(陽數)로 보았기 때문이며, 부지런하고, 열심히 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이날 ‘입춘에는 크게 좋은 일이 있고, 새해에 경사스러운 일이 많기를 바란다.'라는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이란 춘련을 대문에 써붙이면서 봄을 맞습니다. ’얼레빗‘을 받으시는 분들께 누리편지 대문에 춘련을 붙여 드립니다.
938. 입춘엔 ‘적선공덕행’을 해야 액을 면한다. 내일(2월 4일)은 봄이 오고, 새해가 시작되는 입춘(立春)입니다. 이 입춘날 우리 겨레에겐 ‘적선공덕행(積善功德行)이란 세시풍속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좋은 일을 꼭 해야 한 해 동안 액(厄)을 면한다고 믿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밤중에 몰래 냇물에 징검다리를 놓거나, 거친 길을 곱게 다듬거나, 다리 밑 거지 움막 앞에 밥 한 솥 지어 갖다 놓는 것들을 말합니다. “입춘날 절기 좋은 철에/ 헐벗은 이 옷을 주어 구난공덕(救難功德) 하였는가 / 깊은 물에 다리 놓아 월천공덕(越川功德) 하였는가 / 병든 사람 약을 주어 활인공덕(活人功德)하였는가” 상여 나갈 때 상여머리에서 부르는 상엿소리입니다. 우리 겨레는 입춘날 적선공덕행(積善功德行)을 했는지에 대해 죽은 뒤 염라대왕의 심판을 받는다는 생각마저 하는 아름다운 풍속이 있었지만 이제 모두 잊혔습니다.
937. 딸을 서른 살이 넘도록 시집보내지 못하면 중죄인 조선시대는 나이가 찬 처녀, 총각이 결혼하지 못하고 있으면 음양의 화기가 상하여 나라가 어려워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가 오랫동안 이어지면 나라는 혼인을 못하여 원한에 사무친 총각, 처녀들을 파악해서 정해진 기간 안에 강제로 혼인하도록 했습니다. 나라에서 강제 혼인 명령이 떨어지면 노총각, 노처녀를 둔 집안에서는 배우자감을 찾기 위해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나라에서는 강제 혼인명령만 내린 것이 아니라 노처녀가 시집 못 간 까닭을 파악하여 보고하도록 했으며, 나라가 돈을 대어 치장을 하고 혼수를 장만해 시집가도록 했습니다. 또 서른 살이 넘도록 시집보내지 않으면 그 집 가장을 중죄인으로 다스리도록 했지요. 특히 정조임금은 혼기를 넘긴 미혼자를 조사하여 2년마다 한 번씩 혼인을 시켰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936. “가젹이 저렴하다.” 대신 “값도 싸다”로 써야 날마다 배달되는 우리말 편지에서 “기 송부한”과 “지참”이란 말을 꼬집습니다. ‘기(旣)’는 ‘이미’라는 뜻이고, ‘송부(送付)’는 ‘편지나 물품 따위를 부쳐 보내다.’라는 뜻이어서 ‘이미 보내드린’ 라고 하면 좋을 일입니다. 더구나 “지참”은 “持參(じさん)”이란 일본말 찌꺼기입니다. 그저 ’가지고 오십시오.’ 하면 될 것을 왜 그러는지 안타깝습니다. 법원에서 보내는 서류도 보면 “명령이 송달된”이라고 썼습니다. ‘송달(送達)’은 소송에 관련된 서류를 일정한 방식에 따라 당사자나 소송 관계인에게 보내는 일을 말합니다. 그러면 ‘명령이 송달된 날’은 ‘명령을 받은 날’로 하면 더 좋지 않을까요? 텔레비전에서 한 시민은 “가격도 저렴해서”라고 합니다. 이는 “값도 싸서”로 하면 말도 줄어들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이들도 관공서나 어쭙잖은 지식인들을 뒤따라 한자말을 씁니다.
935. 조선시대 임금은 일식과도 전쟁을 했다. 조선시대에는 일식이 일어나면 하늘의 경고라고 생각하여 구식례(救食禮)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일식 시간을 1시각이나 늦게 맞춘 일월식술자(예보관)가 매를 맞는 것을 본 세종임금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자명종 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들도록 했습니다. 중국의 기준에 맞추어 계산했으니 제대로 맞을 턱이 없었지요. 사실 일식, 월식은 천재지변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일식을 한자로 쓰면 ‘日蝕’과 ‘日食’ 두 가지로 앞에 것은 해를 좀먹는다는 뜻, 뒤에 것은 해를 먹는다는 뜻으로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구식례는 임금이 일식과의 전쟁을 한다고 생각하여 각 관청에서는 관리들이 소복을 입은 채 일식 때는 북을 치고, 월식 때는 징을 쳐 임금이 이기기를 응원했습니다. 소복을 입은 것은 나라에 불길한 기운을 불러온 죄인이라 생각한 까닭입니다.
934. 대군과 군, 공주와 옹주, 왕실의 호칭들 역사 드라마를 보면 왕실에 여러 가지 호칭이 등장합니다. 같은 왕자라도 정실 왕비에게서 태어나면 대군, 후궁에게서 태어나면 군입니다. 또 왕비의 딸이면 공주, 후궁의 딸이면 옹주라고 부릅니다. 선조임금은 14명의 왕자가 있었지만 정비인 의인왕후에게선 소생이 없었고, 계비인 인목왕후에게서 태어난 영창대군만이 유일하게 맏이로 대군이 될 수 있었으며, 공빈 김씨의 태생인 임해군 등은 나머지 왕자들은 형이었지만 군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왕비는 임금과 함께 품계를 초월한 존재이지만 후궁들은 모두 내명부의 품계를 받습니다. 그 품계도 임금의 사랑을 얼마나 받았는지, 임금의 승은을 입었는지, 자식을 낳았는지, 자식 가운데 왕자가 있는지에 따라 정일품 ‘빈’, 종일품 ‘귀인’, 정이품 ‘소의’, 그리고 숙의, 소용, 숙용, 소원, 숙원 등으로 나뉩니다.
933. 백성, 언문을 배워 익명 벽서를 붙이다. “하연(河演)은 까다롭게 살피고, 또 늙어서 일하는데 잘못하는 일이 많았으므로 어떤 사람이 벽 위에다 ‘하정승(河政丞)아, 또 나랏일을 그르치지 마라!’라고 하였다.” 세종실록 126권 세종 31년의 기록입니다. 하연은 대제학을 거쳐 영의정에 오른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마 이 하정승의 정책으로 피해를 본 사람이 언문 익명 벽서(壁書)을 붙여 비판한 것으로 보입니다. 봉건 계급사회 조선시대, 일반 백성은 억울한 일이 있어도 하소연할 길이 없었습니다. 더더욱 글을 모르니 방법을 찾을 수도 없었지요. 그런데 세종임금이 쉬운 글자, 훈민정음을 반포하자 백성들이 이를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익명의 벽서가 나붙곤 했다고 합니다. 훈민정음의 탄생은 절대군주 아래의 억울한 백성에게 통용되었던 지하신문 구실을 한 것입니다. 세종임금의 백성사랑이 언문 익명 벽서를 만든 것이지요.
932. 고려는 중국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나라 ‘선화봉사고려도경(줄여서 고려도경)’ 제9권 ‘의물(儀物)’ 편에 보면 송나라 사람 서긍은 고려를 다른 여러 오랑캐에 비하면 찬연히 빛난다고 말합니다. 그 까닭으로 서긍은 “여러 오랑캐 나라는 비록 임금이 있으나, 임금이 나아갈 때 깃발 십여 개가 따르는 데에 불과하여 신하들과 거의 뚜렷한 분별이 없다. 다만, 고려는 그 임금과 신하가 거동할 적에 법도가 있다.”를 들고 있습니다. 임금이 거동할 때 위엄을 보이기 위하여 격식을 갖추어 세우는 병장기(兵仗器)나 물건 그리고 악귀를 몰아내는 신을 그린 깃발이 따르는 것들이 송나라와 별로 다르지 않았음을 말한 것입니다. 또 서긍은 공자(孔子)가 고려에 살고 싶다 하고 더럽지 않다고 했음도 아울러 말합니다. 이를 볼 때 고려는 중국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나라였을 것이라 짐작합니다.
931. 나라에서 권장한 검은색 두루마기, 못 입겠다. 우리 겨레는 예부터 흰색옷을 주로 입었는데 물론 조선시대 양반들도 대부분 흰색 도포를 입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고종임금은 흰색이 비경제적이라는 까닭에서 검은색 두루마기를 권장합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1903년에는 옅은 색 두루마기를 아예 못 입게 하고, 검은색만 입도록 했습니다. 포졸들이 길을 막고 검은 두루마기가 아니면 지나가지 못하게 했고 흰 옷에 먹칠을 하기도 했는데 이는 무리였지요. 결국, 이러한 조치는 단발령만큼이나 민심을 들끓게 했는데 곳곳에서 충돌이 빚어지고 소란이 일었다고 합니다. 급기야 "국모 명성황후의 원수도 갚지 못했는데 흰 상복을 벗는다는 것은 온당치 않다."라는 상소가 올라왔고, 그 뒤에 단속이 느슨해졌습니다. 이는 대한제국의 시인이며, 학자 ·우국지사 황현이 쓴 역사서인 '매천야록'에서 전하는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