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2. 조선시대 혼수 때문에 아내를 버린 이야기 요즘 한 연예인 부부가 결혼한 지 채 보름도 되지 않아 고소사태까지 벌어진 사건으로 세상이 분분합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세종실록 110권 27년 10월 9일자에 보면 혼례 예물이 적은 것을 이유로 여자를 버린 사람에게 벌준 이야기가 나옵니다. 기록에 의하면 전 현감 정우가 박자형을 사위로 삼았는데, 자형이 혼례 예물이 적은 것은 물론, 뚱뚱하고 키가 작다며, 여자를 버리는 도의에 어그러진 행동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의금부에 가두고 국문을 해도 오래도록 자백을 얻지 못했지요. 이에 임금이 “의금부에서 자형이 만취하여 술주정을 한 것으로 판결하려고 하니 잘못이다. 자형이 이불과 의복이 화려하지 못한 것에 혼수가 적다며 아내를 버린 것이 분명하다.”라고 했습니다. 의금부에서 다시 국문하니 과연 그대로였기에 자형에 매 60에, 징역 1년에 처하고 다시 아내와 살도록 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910. 구들,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난방방법 어제는 24절기 중 스물세 번째인 소한(小寒)으로 눈도 많이 오고, 동장군의 위세가 대단했습니다. 하루가 늦었지만 소한 이야기를 해드립니다. 소한은 양력으로 해가 바뀌고 처음 오는 절기입니다. 절후의 이름으로 보면 대한(大寒)이 가장 춥겠지만 실제는 소한이 1년 중 가장 추운데 절기의 기준이 중국 화북지방에 맞춰졌기 때문에 조금 다는 것입니다. "대한이 소한집에 가서 얼어 죽었다."든가 "소한 얼음 대한에 녹는다.", ‘소한 추위는 꾸어다가도 한다.’라는 말처럼 대한보다 춥습니다. 어제 눈이 많이 내렸는데 "눈은 보리 이불이다.", "사람이 보지 못하는 사이에 눈이 내리면 풍년이 든다.", "함박눈 내리면 풍년 든다."라는 말처럼 눈이 오면 풍년이 든다고 믿었습니다. 또 "첫눈 먹으면 감기에 안 걸린다.", "장사 지낼 때 눈 오면 좋다.", "첫눈에 넘어지면 재수 좋다."라며 눈을 좋은 조짐으로 보았지요. 참고 : “온돌, 그 찬란한 구들문화”, 김준봉·리신호, 청흥
909. 전통차에 붙은 다양한 별명들 차에는 여러 가지 또 다른 이름, 별명이 있습니다. 먼저, 가장 흔히 듣는 ‘작설차(雀舌茶)’는 차의 술이 참새의 혀와 닮았다는 뜻이며, ‘응조차(鷹爪茶)’는 매의 발톱과 닮았다는 뜻이고, ‘맥과차(麥顆茶)’는 보리의 알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또 ‘죽로차(竹露茶)’는 대나무숲에서 이슬을 먹고 자란 차, ‘춘설차(春雪茶)’는 봄눈이 채 녹기 전에 돋아난 차나무 움과 같은 여린 잎으로 만든 차, ‘감로차(甘露茶)’는 아침이슬이 가시기 전에 찻잎을 따서 만든 차를 말하지요. 그 해에 따서 만든 차는 햇차이고, 청명 전에 딴 잎으로 가공한 명전차(明前茶), 잎을 따는 때에 따라 춘차(春茶), 하차(夏茶), 추차(秋茶)도 있습니다. 차는 가공방법에 따라서 덖음차(전통차)와 찐차(녹차)로 가르는데 이 덖음차를 중국에서는 초청차(炒靑茶)라고 하며, 일본에서는 부초차(釜炒茶)라고 합니다. 참고 : 한글새소식 412호 “‘살사리꽃’ 이름을 찾아서”(이성근)
908. ‘살사리꽃’을 아십니까? 가을을 수놓는 꽃 하면 누구나 국화와 코스모스를 떠올릴 것입니다. 또 그 꽃들에는 아름다운 시 구절도 적지않고요. 이 중 코스모스는 ‘cosmos’란 알파벳이름을 우리말로 바꿔놓은 것으로 멕시코가 원산지인 국화과의 한해살이풀입니다. 코스모스는 흔히 관상용으로 심는 것이지만 한방에서는 뿌리를 빼고 식물체 전체를 ‘추영(秋英)’이라는 약재로 쓰는데, 눈이 충혈되고 아픈 증세와 종기에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코스모스는 원래 ‘살사리꽃’이라는 우리 토박이말 이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서양이름에 떼밀려 잊혔습니다. 그래서인지 국어사전에 이 ‘살사리꽃’은 없습니다. 다만, 북한의 조선말사전에만 문화어로 올라있을 뿐입니다. 분명히 존재했던 우리말이 이렇게 스러져 갑니다. ‘살리리꽃’이라고 쓰면 국가보안법에 걸릴까 봐 안 쓰는 건 아니겠지요. 참고 : 한글새소식 412호 “‘살사리꽃’ 이름을 찾아서”(이성근)
907. 쌍춘년에 결혼하면 좋다는 것은 상술입니다. 오늘은 ‘쌍춘년(雙春年)’ 이야기입니다. 병술년은 입춘을 기준으로 한 양력으로 2006년 1월 29일부터 2007년 2월 17일까지인데 2006년 2월 4일과 2007년 2월 4일에 두 번의 입춘(入春)이 들어있는 쌍춘년이어서 결혼하려는 신랑신부들로 예식장을 잡기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이렇게 입춘이 두 번 있는 까닭은 음력을 기준으로 한 태음력이 계절과 많이 어긋나기에 이를 보완하려 19년에 7번의 윤달을 두었는데 이 때문에 양력을 기준으로 하는 입춘이 한 해에 두 번 들거나, 한 번도 없는 '망춘년(亡春年)'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음력 한해가 385일인 이 쌍춘년은 기원전 221년부터 서기 2100년까지 불과 12번에 불과할 정도여서 ‘결혼하면 백년해로할 수 있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쌍춘년은 지난 2004년과 2006년. 2009년. 2012년 등 2~3년마다 돌아오는 것으로 상술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906. 진짜 새해 첫날은 입춘인 2월 4일입니다. 지난 12월 31일 ‘얼레빗’에서 병술년 마지막 날이라고 했더니 한 회원이 병술년에서 정해년으로 바뀌는 것은 양력 또는 음력 1월 1일이 아니라 입춘이라는 지적을 해주셨습니다. 맞습니다. 정해년의 시작은 역학으로 볼 때 대부분의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설날도, 양력 1월 1일도 아닌 입춘을 기준으로 합니다. 즉 새해 첫날은 입춘인 2월 4일이고, 그날부터 내년 입춘까지가 정해년 '돼지해'인 것입니다. 따라서 양력 2007년 1월 1일을 새해 첫날이라고 생각하여 관행대로 말한 것이지만 정확하게는 정해년 새해라고 하려면 2월 4일 입춘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역시 아기를 황금돼지해에 낳으면 행운이 온다는 말도 입춘을 기준으로 해야 맞습니다. 새해 인사는 하더라도 기준은 제대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정확하게 짚어주신 회원님께 고맙다는 말씀드립니다.
회원 여러분!지난 2006년은 여러분들의 격려와 사랑 덕분에 잘 헤쳐 왔습니다.새로 밝아온 2007년은 여러분들께 환한 나날이길 비손합니다.고맙습니다.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모두 두림
905. 정해년, 모두에게 황금돼지해가 되기를 정해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그런데 정해년은 황금돼지해라고 해서 아이를 낳으려고 하는 부모가 많습니다. 보통 돼지해는 12년 만에, '붉은돼지해'를 뜻하는 '정해년(丁亥年)'은 60년 만에 돌아오게 됩니다. '정해년'는 오행(五行)에서 '정(丁)'이 '불'을 뜻하기 때문에 '붉은돼지해'라고 부르고, '황금돼지해'는 십간십이지(十干十二支)에 오행을 더해 따지기 때문에 600년 만에 한 번 나타난답니다. 그래서 황금돼지해에 난 아이는 아주 좋은 행운을 타고난다는 것이지요. 황금돼지해를 중시하는 풍습은 조선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다산과 풍년을 기리던 백성들의 염원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개인의 운명은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에 '황금돼지해'는 억지라고 말하는 역술가도 있습니다. 올 정해년은 새로 태어나는 아이만이 아닌 모두의 황금돼지해였으면 좋겠습니다.
904. 뒷짐지고 하늘 보며, 한해 마무리하기 병술년 한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우리는 병술년을 시작하면서 새롭게 마음을 가다듬고 계획했습니다. 그 새로운 마음, 계획이 오늘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는지 되돌아보는 날입니다. 어떤 분은 올 한해 환한 나날이었을 수도 있고, 어떤 분은 고통의 순간이 많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한 분이었든, 불행한 분이었든 이젠 다 같이 한 해를 마무리해야 할 때입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덕무가 쓴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의 ‘사소절(士小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옵니다. “찡그리고 답답하며 분한 마음을 갖는 사람은 마음이 늘 부담스럽기 때문에 남을 곧잘 탓하고, 따라서, 남도 역시 그를 미워하게 된다. 허허 웃고 태연한 기상을 갖는 사람은 마음이 늘 원만하기 때문에 남을 곧잘 사랑하고, 남도 역시 공경하게 된다.” 뒷짐지고 하늘 보기를 즐겨했던 선비들의 마음가짐을 보는듯합니다.
903. 자살하는 백성이 나오지 않도록 하라. 영조대왕실록 제30권 7년 12월 13일 기록에 “고양에서 북한 산성의 적곡을 먹은 이가 독촉에 몰려 자살하자 휼전을 베풀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고양에 사는 장(張)가 성을 가진 한 백성이 북한산성(北漢山城)에 쌓아둔 적곡(糴穀)을 먹었는데, 현관(縣官)의 독촉에 몰려 결국은 스스로 목매달아 죽는 데 따른 것입니다. 이 일이 알려지자 임금이 이재민을 구제하기 위한 특전인 휼전(恤典)을 베풀라고 명했다고 합니다. 또 임금은 “죽은 뒤에 휼전을 베푸는 것은 애당초 죽음이 없도록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여러 도(道)에 단단히 타일러서 경계하여 적곡(糴穀)을 받아들임에 있어 너무 독촉을 하지 말도록 해 백성의 힘을 펴주게 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나라만이 할 일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 세밑을 맞아 주위를 돌아보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