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5. 팔만대장경이 아닌 장경판전이 세계문화유산 합천 해인사에는 국보 32호 ‘팔만대장경’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팔만대장경이 아니라 그 경판을 보관하는 국보 52호 ‘장경판전’이 세계문화유산입니다. 팔만대장경은 동산인 때문에 세계문화유산이 될 수가 없고, 장경판전이 지정된 것은 500년 넘도록 경판을 완벽하게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경판전은 건물의 앞뒤에 환기창이 있는데 앞면은 위창이 작고, 아래창이 크지만, 반대로 뒷면은 위창이 크고, 아래창이 작습니다. 이런 구조가 완벽한 통풍이 되도록 했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여기에 서남향으로 배치하여 직사광선이 들지 않도록 했으며, 내부 바닥엔 숯, 횟가루, 소금을 뿌려 습도를 조절하고 해충을 막아낸 것입니다. 1975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현대과학으로 지은 새로운 건물로 옮겼다가 실패하고 원래의 장경판전으로 다시 옮겼다고 합니다. 참고 : ‘손 안의 박물관’, 이광표, 효형출판
874. 조선의 풍속과 전통이야기, ‘조선상식문답“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세시풍속을 알려면 최남선이 1946년에 펴낸 ‘조선상식문답’을 보면 됩니다. 이 책은 1937년 1월 30일부터 9월 22일까지 매일신보에 160회에 걸쳐 연재한 ‘조선상식’을 재정리한 것입니다. 이 책은 조선의 풍속과 전통을 재인식시키고, 조선의 마음을 열어주기 위하여 문답식으로 쉽게 쓴 것입니다. 제1편 ‘국호’부터 시작하여 지리, 물산, 풍속, 역사 등 10편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제5편 명일(名日)은 세시풍속 이야기입니다. 특히 10월 상달의 유래와 더불어 10월 3일을 개천절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의 대표적 지식인이었던 최남선은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기초하는 등 민족대표로 활동했지만 1927년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찬위원회’ 촉탁, 1936년 조선총독부 최고의 영예직인 중추원 참의를 지내는 등 일제에 적극 협력했습니다. 참고 : “구한말·일제강점기 민속문헌 해제”, 국립문화재연구소
873. 봉숭아, 봉선화, 봉숭화, 무엇이 맞을까? 예전에 여자들의 손톱에 봉숭아 꽃물을 들이곤 했습니다. 봉숭아 꽃잎과 이파리를 짓이겨 백반을 넣고 손톱에 묶은 뒤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예쁘게 물들어 있었지요. 지금도 시골에 가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아들이 어렸을 적 시골에 갔을 때 아내에게 봉숭아 물을 들여주니 자기도 들여달라고 해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이 봉숭아를 어떤 사람은 봉선화, 봉숭화라고도 말합니다. 무엇이 맞을까요? 봉숭아의 본래 말은 봉선화(鳳仙花)로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에서 다 같이 쓰는 말입니다. 현행 표준어 규정에서는 이 본래의 ‘봉선화’와 널리 쓰이는 ‘봉숭아’만을 표준말로 삼고 있습니다. ‘봉숭화’나 봉송아‘들은 표준말이 아닙니다. 발목 부근에 안팎으로 둥글게 튀어나온 뼈를 보통 ’복숭아뼈‘ 또는 ’봉숭아뼈‘라고 말하는데 이는 ’복숭아뼈‘도 ’봉숭아뼈‘도 아닌 ’복사뼈‘가 맞습니다. 참고 : “나만 모르는 우리말”, 조경숙, 김슬옹, 김형배 공저 / 모멘토
872. 우리 겨레는 왜 유달리 ‘3’을 좋아했을까? 우리 겨레는 오랜 옛날부터 ‘3’이라는 숫자를 좋아하고 신성시했습니다. 상고사에 보면 환인은 환웅에게 천부인 3개와 3천의 무리를 주어 사람 세상으로 내려가도록 했고, 환웅은 풍사, 우사, 운사 셋을 거느리고 사람들을 다스렸습니다. 그런가 하면 요즘에도 가위바위보를 할 때에 '삼세번 ‘ 합니다. 그렇게 ’3‘을 좋아한 까닭이 무엇일까요? 우선 숫자 ‘1’은 모든 사물이며, 어떤 수와도 섞이지 않은 순양(純陽)의 수입니다. 또 맨 처음의 숫자여서 모든 사물이 생겨난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어서 숫자 ‘2’는 처음 순음(純陰)의 수이며, 음과 양, 하늘과 땅, 남자와 여자처럼 둘이 짝하여 하나가 된다는 화합과 대립의 수입니다. 여기에 숫자 ‘3’은 ‘1’과 ‘2’가 처음 결합하여 생겨난 변화의 수이며, 음양의 대립에서 하나를 보탬으로써 완성과 안정, 그리고 조화를 상징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입니다.
871. 일본 헤이안 시대의 귀족복식은 25겹 ▲ 일본 헤이안시대의 “당의상장속(唐衣裳裝束)”, “12단(單)”이라고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조선시대의 여성 한복이 원래 여러 겹의 속옷과 더불어 많은 옷을 입어 불편했겠다고 합니다. 또 남성 한복도 속저고리에 적삼, 배자, 두루마기들은 입어 많은 듯합니다만 따지고 보면 서양옷도 큰 차이는 없을 것입니다. 또 우리 한복의 겹쳐 입기보다 엄청난 겹쳐입기를 하는 복식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일본 헤이안시대(794~1192)의 귀족복식인데 그 가운데 하나는 무려 25번이나 겹쳐 입는 것도 있었다고 합니다. 비단을 수없이 겹쳐 입는 것이니 당연 그 무게도 상당하지 않을까요? 그런 옷을 입고 자리에 한번 앉으면 일어나기가 어렵고 급하게 이동하려면 기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실은 한 세미나에서 일본 학습원여자대학(學習院女子大學) 마쓰다(增田美子) 교수가 밝힌 것입니다. 우리 한복에 대한 잘못된 편견들이 한복의 계승, 발전을 막고 있습니다.
풍류가객들의 한마당, 열린 국악무대 보았는가? 탑(TOP)음반 100번째 발매 기념공연 ▲ (왼쪽)무대에 펼쳐진 100번째 기념공연 펼침막, 왼쪽엔 권오순 여사의 사진과 장사익씨가 쓴 글이 보인다 / (오른쪽) 100번째 탑시디 표지 ⓒ 김영조 ▲ 구수한 진행 솜씨를 보인 양정환씨 ⓒ 김영조 세상에는 별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남자가 여자와 결혼하여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보편적인 삶이지만, 남자나 여자가 아닌 국악과 50평생을 함께 하는 사람도 있다. 바로 탑예술기획 대표 양정환씨가 그이다. 그런 그가 지난 11월 17일(금) 저녁 7시 30분에 한국문화의집에서 '탑시디(TOPCD) 이야기와 소리의 밤'을 열었다. 그는 이 공연에 이야기 진행을 맡아 구수한 말솜씨를 자랑했다. 한국문화의집은 총 243석의 아담한 공연장이다. 이번 공연은 그가 1996년에 발매를 시작한 탑시디 시리즈의 음반 100번째를 기록한 것과 미국 의회도서관, 영국 대영도서관 소장자료 제공을 기념한 것이라고 한다. 거기에 더하여 어머니 권오순 여사의 효부상 수상 50년을 아울러 기념하는 공연이다.공연은 시작부터 예스럽지 않다. 진행자 양씨가 무대 아래에서 마이크를 잡고 시작하더니 알려
870. 부석사 무량수전의 배흘림 기둥 “더하고 뺄 것 하나 없는 완벽함,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천년이 살아 숨 쉬는 상쾌한 균형과 절제” 이 말들은 경북 영주에 있는 국보 제18호 부석사 무량수전(고려 13세기)에 대한 예찬입니다. 그런데 그런 찬사를 들은 까닭 가운데 하나가 바로 배흘림 기둥입니다. 배흘림 기둥이란 가운데 부분을 약간 튀어나오게 한 기둥을 말합니다. 이렇게 가운데를 볼록하게 하면 기둥의 머리 부분이 넓어 보이는 착시현상을 막아주며, 건축물의 무게가 기둥의 중간에 집중되는 것을 고려하여 건축물을 견고하게 하고 안전을 배려한 것입니다. 기둥의 종류에는 배흘림 기둥 외에 위로 올라가면서 지름이 조금씩 좁아지는 ‘민흘림 기둥’, 위아래 지름이 일정한 원통형 기둥이 있습니다. 배흘림 기둥과 함께 무량수전은 안허리곡, 안쏠림, 귀솟음이란 훌륭함도 있습니다.
869. 오행의 상생과 상극은 무엇을 말할까요? 우리 겨레는 예부터 음양오행의 철학으로 살았습니다. 음양(陰陽)은 하늘과 땅, 그리고 낮과 밤, 남자와 여자, 따뜻함과 차가움 등으로 이해하면 되지만 오행은 무엇이고, 또 상생과 상극은 무엇일까요? 오행을 한자로 쓰면 음양이 걸어가는 다섯 가지 걸음을 뜻합니다. 오행은 나무(木), 불(火), 흙(土), 쇠(金), 물(水) 이 다섯 가지의 관계와 변화에 대한 이론을 체계화한 것을 말하며, 행(行)은 고정되지 않고 변화한다는 뜻을 말하지요. 또 상생(相生)은 서로 도와 이롭게 하는 것이고, 상극(相剋)은 서로 맞서거나 해를 끼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목생화(木生火)’는 불은 나무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고, 수생목(水生木)은 나무는 물이 있어야 산다는 뜻입니다. 또 ‘수극화(水剋火)’는 물을 타오르는 불을 끄는 것이며, ‘금극목(金剋木)’은 쇠는 나무를 자른다는 뜻을 말합니다.
868. 명성황후는 2년 2개월 만에 장례를 치렀습니다. 몇 년 전 우리는 텔레비전 방송에서 “명성황후” 드라마에서 명성황후 시해장면을 보면서 분을 삭이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는 일본 낭인들의 손에 처참하게 시해당한 뒤 시신을 거두지 못해 장례를 치르지 못하다가 2년 2개월 만에 국장을 치렀습니다. 그리곤 명성황후 장례의 모든 것을 기록한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를 펴냈습니다. 그런데 파란만장하고 슬픈 국상의 기록인 이 의궤가 지금 우리 땅에 없습니다. 일본 궁내청 서고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조선왕실의궤 환수위원회’가 확인한 것입니다. 일제가 훔쳐간 ‘조선왕조실록오대산본’을 93년 만에 일본에서 되찾아 왔지만, 아직도 오대산사고에 보관되었던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와 여러 권의 조선왕실의궤들을 찾지 못하고 있어서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조선왕실의궤 환수위원회’ 카페 : http://cafe.daum.net/doorgatemoon)
867. 태종임금, 도박한 사람을 엄히 다스리다. “도박놀이를 금지하라고 명하였다. 도대평 등 16명에게 각각 매 80대, 장용봉에게 매 1백 대를 때리고, 도박하여 얻은 물건은 관에 몰수하였다. 대개 도박놀이는 고려의 말년에 성행하였는데, 하루아침에 도박하여 벼락부자가 된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경박한 무리가 요행히 따기를 바라고 이 짓을 하다가 처자(妻子)를 빼앗기고 가산을 탕진하는 자가 있기에 이르렀다. 태조임금이 먼저 그 놀이를 금지하였는데, 태종임금 때에 와서도 남은 풍속이 없어지지 않은 것을 듣고, 해당 관서에 명하여 도박한 사람을 체포하고 엄히 금지하였다.” 위 내용은 태종실록 제27권 14년 5월 19일 조에 나오는 것으로 태조임금 때에 금지한 도박이 여전히 남아있음을 알고 태종임금이 도박을 한 사람들을 벌주어 엄히 다스린 기록입니다. 도박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남에게손해를 끼쳐도 된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