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0. 경주 안압지에 동물원이 있었다. 삼국사기 기록에 보면 “문무왕 14년(674),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진기한 새와 기이한 동물을 길렀다.”란 기록이 있습니다. 또 안압지 발굴 당시에 수많은 동물 뼈가 출토되었습니다. 기러기와 꿩, 오리와 같은 새들을 비롯해 산양과 노루, 말과 사슴, 개 멧돼지 같은 포유류에 이르기 까지 종류도 무척 다양합니다. 또 호랑이와 곰 같은 맹수류의 빼도 나왔다고 합니다. 최근 안압지에서 출토된 글을 적은 작은 나무 조각인 신라 목간(木簡)을 보면 “관장조사(倌獐助史)”라는 게 있습니다. 이는 노루 ‘장(獐)’자 쓰인 것으로 노루를 관리하던 직책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따라서 안압지 숲에는 온갖 동물이 뛰어노는 동물원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궁궐에서 동물원을 만들었던 것은 신라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에도 유행했었다고 합니다. 참고 : 에이취디역사스페셜(효형출판)
839. 창덕궁 후원에는 초가와 원두막이 많았었다. 조선의 임금들이 유달리 창덕궁과 창경궁을 사랑했던 것은 넓고 아름다운 후원 때문인데 이 후원은 북한산과 응봉(성동구)에서 뻗어내린 자연스런 구릉지입니다. 이 후원은 자연을 크게 변형시키지 않으면서도 연못, 정자, 꽃밭들을 갖추어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했습니다. 이 때문에 창덕궁 후원은 전통적인 한국 정원문화를 대표합니다. 또 창덕궁 후원의 정자들은 규모가 매우 작습니다. 이는 자연경관을 누르지 않으면서, 자연 속에 포근히 안기려는 소박한 마음이 담긴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정자 가운데는 시골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초가나 농막이 의외로 많았었다고 합니다. 동궐도에는 열여섯 채의 초가가 있는데 지금은 청의정만 남아 있습니다. 초가나 원두막이 많았던 것은 임금이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려보고자 했던 것이라 여겨집니다.
838. 관노 장영실은 조선 최고의 과학자 과학자들은 누구나 우리 역사 중 과학문화의 황금기는 세종임금의 재위기간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때 관노 출신이며, 기생의 아들인 장영실의 업적이 가장 큽니다. 그는 종3품 상호군까지 올랐는데 신분 제약이 엄격한 봉건시대에 장영실이 종3품까지 올랐다는 것은 세종임금의 사람을 보는 눈이 뛰어남과 신분차별을 두지 않는 인재 기용이었음을 알게 합니다. 장영실은 천문시계 혼천의, 한국 최초의 물시계 자격루, 천체관측용 대 ·소간의, 휴대용 해시계 현주일구와 천평일구, 앙부일구, 태양의 고도와 뜨고 짐을 측정하는 규표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어가의 제작감독을 했던 장영실은 어이없게 어가가 부서져버리는 바람에 곤장을 맞고 파직을 당합니다. 어가를 허술하게 만들었을 리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장영실의 신분상승에 불만을 가진 보수세력이 꾸민 계략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837. 자연스럽게 풍욕을 하게 해주는 한복 사람들은 품이 넉넉한 한복을 싫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넉넉함은 몸을 조이지 않아 편하게 하며, 관절을 부담스럽지 않게 하지요. 또 한복의 가장 큰 특징이랄 수 있는 넉넉함은 옷과 몸 사이에 충분한 공기층으로 단열효과가 생기기 때문에 추울 땐 따뜻하게, 더울 땐 선선하게 해주는 구실을 합니다. 실제 몸에 딱 맞는 운동복을 입었을 때는 춥지만 한복을 입어보면 두껍지 않아도 춥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소매를 보면 아래는 배래로 넓히고, 소매 부분을 좁게 하며. 토시를 차고, 바지는 사폭으로 넓게 하며, 대님으로 묶은 다음 행전을 찹니다. 이는 밖의 공기를 차단하면서도 소통하게 하는 슬기로움인데 한국의 지형상 꼭 필요한 풍욕을 자연스럽게 하도록 돕는다고 한의사들은 말합니다. 옷을 입어도 단순히 맵시만 볼 것이 아니라 건강을 생각하는 슬기로움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835. 부지깽이도 덤빌 만큼 바쁜 상강 내일은 24절기의 열여덟 번째 절기인 상강(霜降)입니다. 이때는 맑고 상쾌한 날씨가 계속되며 밤에는 기운이 뚝 떨어지면서 서리(霜)가 내리기(降) 시작한다 하여 상강이지요. 옛사람들은 상강기간 때 초후에는 승냥이가 산 짐승을 잡고, 중후에는 풀과 나무가 누렇게 되고 떨어지며, 말후에는 겨울잠을 자는 벌레가 모두 땅에 숨는다고 하였습니다. 봄에 시작했던 농사일도 상강 때쯤이면 가을걷이가 마무리되는데 우리 속담에는 "가을에는 부지깽이도 덤빈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가을철에는 바빠서 아무 쓸모없던 것까지도 일하러 나선다는 뜻입니다. 또 "가을 판에는 대부인(大夫人)마님이 나막신짝 들고 나선다"라는 속담도 있지요 그만큼 추수기엔 존귀하신 대부인까지 나선다는 말로 대단히 바쁜 계절임을 나타냅니다. 도시 사람도 이 계절 뭔가 거두는 노력을 하면 어떨까요?
834. 식생활에서도 필요한 우리의 정체성 미국의 건강 전문잡지 ‘헬스’는 김치를 세계 5대 건강식품의 하나로 꼽았습니다. 서양에서는 한국인의 식생활이 비교적 균형 잡힌 것으로 본다고 하는데 정작 한국 사람들은 서구형의 식생활을 닮아갑니다. 특히 요즘 한국 사람들은 밥량이 줄면서 대장암이 증가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옆으로 가는 횡행결장(장의 한 부분)이 거의 직선인 서양인들에 비해 한국인들의 횡행결장은 아래로 늘어져 굽어 있어서 80cm 가량 더 깁니다. 이는 주로 곡류섭취를 해오던 오랜 식습관에 의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이 한국식 신체구조에 맞지 않는 서구식 식습관으로 바뀌면서 육류소화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그만큼 장에 노폐물이 쌓이면서 이 노폐물이 종양과 암으로 변질되는 것이라고 학자들은 진단합니다. 식생활에서도 우리의 정체성은 필요한가 봅니다
832. 조선시대 과거시험의 부정행위들 숙종실록 41권 31년 2월 18일조에 다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균관 앞마을의 한 아낙이 나물을 캐다가 노끈이 땅에 묻힌 것을 발견하고 잡아 당겼는데 대나무 통이 묻혀 있었습니다. 대나무 통은 땅속을 통해 과거시험이 열리는 성균관 반수당(泮水堂)까지 연결되어 있었지요. 부정행위자는 대나무 통 속에 노끈을 넣어 과장(科場)에서 시험문제를 노끈에 매달아 보내고, 밖에 있는 사람이 이 답안지를 작성해 노끈에 묶어 보낸 것입니다. 당국이 조사를 했으나, 범인은 잡을 수 없었습니다. 조선시대 과거는 예상 답안지를 미리 만들어 가는 것, 시험지를 바꾸는 것, 채점자와 짜고 후한 점수를 주는 것, 합격자의 이름을 바꿔치기 하는 것 따위의 부정행위가 많았다고 합니다. 또 세도가의 자제는 천자문을 몰라도 합격했고, 임금이 직접 주관한 과장에서도 술판, 싸움판이 벌어지기 일쑤였습니다.
833. 고위층들의 고액 떡값은 ‘벼슬덤’이라고 해야 할부(割賦)라는 말은 일본식 한자말을 빌려다 쓴 말입니다. 그럼 이에 맞는 우리 토박이말은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드림셈’이란 말이 있었습니다. 이런 좋은 말을 놔두고 잘난 채하는 지식인들이나 상인들이 남의 말을 빌려다 쓰면서 토박이말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런 말에는 이자를 뜻하는 ‘길미’, 외상의 상대되는 '맞돈‘도 있습니다. 외상의 상대되는 말로 보통 ’현금‘ 또는 ’현찰‘을 씁니다만 이는 수표나 어음, 현물 따위의 상대되는 말이어서 맞는 말이 아닙니다. 명절이나 기념할 날에 아는 이들에게 인사치레로 건네주는 적은 액수의 돈을 ‘떡값’이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떡 한 번 해먹을 수 있는 작은 돈인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상류층들은 그 떡값이 수천만 원에 이릅니다. 그래서 고위층들이 그 직책을 빌미로 받는 큰돈은 ‘떡값’이 아니라 ‘벼슬덤’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참고 :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우리말 풀이 사전"(박남일, 서해문집
하늘채, 어울림, 사랑으로... 예쁜 아파트 이름들 토박이 이름은 외국어 이름의 홍수 속에서 돋보인다. ▲ 현대인의 대표 주거공간이 된 아파트들 아파트는 요즘 대표적 주거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그 아파트 이름들 가운데 우리는 ‘來美安’, ‘XI', 'the #', 'Lotte Castle', 'I PARK'들이 익숙한 이름이다. 대부분 영어이고, 한자로 되거나 영어+한자, 한자+한글, 영어+한글 조합들도 많다. 하지만, 순수 토박이 이름은 찾아보기가 힘든 정도이다.2004년 한글날에을 맞아 부동산 정보제공업체 네인즈가 2000년 이후 입주한 아파트 733개 단지 22만6087가구의 브랜드를 조사한 결과를 보면 ‘Meridian', 'SK View'처럼 외국어 이름은 412개 단지 10만8009가구로 47.8%, 건설사 이름 을 쓴 아파트는 29.2%, ’美羅住‘ 같은 한자어 이름은 13.2%, ’e-편한세상‘과 같이 외국어와 한글이 섞인 이름은 5.9%, ’강변‘처럼 땅이름들을 빌려 쓴 이름은 1.3%로 나타났다.대신 토박이말 이름을 가진 아파트는 2.3%인 25개 단지 6165가구에 그쳤다. 2006년 현재 토박이말 이름으로 밝혀진 아파트는 코오롱건설의 ‘
831. 경복궁은 225년만 왕궁으로 쓰였다. 조선의 궁궐은 모두 다섯 개인데 그 가운데 우리는 조선 궁궐의 대표로 경복궁을 꼽습니다. 그건 경복궁은 태조가 맨 먼저 지었으며, 경복궁을 중심축으로 동묘와 사직이 배치되고, 한양이라는 도시가 설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복궁을 법궁(法宮), 정궐(正闕)이라고 불렀고, 나머지는 이궁(離宮), 별궁(別宮)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임금이 실제로 가장 오래 머문 곳은 경복궁이 아니라 두 개지만 하나의 궁궐처럼 쓴 창덕궁과 창경궁이었습니다. 경복궁에 임금이 머문 것은 225년에 불과했지만 창덕궁과 창경궁에 머문 시간은 무려 426년이나 됩니다. 그 까닭은 임금들이 정권 초기부터 왕자들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으로 원혼이 깃들었을 경복궁을 피한 탓입니다. 또 창덕궁은 깊은 숲, 아름다운 후원들이 궁궐의 안주인이 거처하기에 더 좋았기 때문입니다. 참고 : “조선의 집, 동궐에 들다” (한영우, 효형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