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3. 사람은 대들보감도, 기둥받침대감도 필요하다. “집을 짓는 데 있어서 큰 나무는 대들보로 올리고, 작은 나무는 서까래로 만들어서 재목에 따라 알맞게 쓰는 것은 훌륭한 목수의 능력이오, 길고 좋은 나무만 골라 쓰고, 짧고 굽은 것을 버리는 것은 졸렬한 목수의 행위라오. 게다가 재목을 구하면서 그 재목을 기르지 않는 것은 마치 3년을 굶으면서도 농사를 지으려고 하지 않는 것과 다를 것이 없오.” 조선 초기 학자 최충성(崔忠誠)의 글 ‘잡설(雜說)1’에 나오는 글입니다. 선비는 나라에서 나무와 같은 존재로 봅니다. 큰 인재는 나라의 기둥, 대들보, 주춧돌로 쓰지만 그렇다고 작은 인재가 없으면 기둥 받침대나 짧은 덧기둥은 무엇으로 하겠습니까? 깊은 두메에서 가난하게 살았다고 해서 어찌 쓸모가 없는 사람일까요? 사람에겐 다 그에 맞는 구실이 있는 것입니다. 지식이 짧거나 재주가 없다고 남을 무시할 일이 아니라 인재를 길러야 합니다.
732. 보이차에 맹목적으로 열광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보이차를 마셔야 차의 경지에 제대로 들어가는 것처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보이차는 중국 윈난성에서 생산되는 중국의 명차인데 보이현에서 모아서 출하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보이차는 제조과정에서 오래 묵히면 묵힐수록 비싼 차가 되며, 대체로 20년 이상이면 최고품으로 칩니다. 또 보이차는 가공한 다음 미생물에 의한 발효를 거치기 때문에 후발효차(後醱酵茶)이지요. 문제는 국내에서 판매되는 보이차들이 비위생적으로 유통되기도 하며, 가짜가 많다는데 있습니다. 가짜라는 것은 오래 묵힌 차가 명차라는 점 때문에 제조날짜를 고치거나 원래의 제조방법인 건창발효가 아닌 습창발효 즉, 이른 시간에 물을 뿌려두고 가공하기에 흙냄새가 나며, 진드기가 있기도 하는 것입니다. 가짜인지도 모를 보이차에 열광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731. 소서 때는 새각씨도 모심어라 내일은 24절기의 열한 번째이며, 본격적으로 더위가 몰려온다는 소서(小署)입니다. 이때는 장마전선이 우리나라에 오래 자리 잡아 습도가 높아지고, 비가 많이 옵니다. 소서와 관련한 말에는 “소서 때는 새각씨도 모 심어라.”, “소서 때는 지나가는 사람도 달려든다.”라는 것들이 있습니다. 소서 때는 김을 매거나 피사리를 해 주며, 논둑과 밭두렁의 풀을 베어 퇴비를 장만하기도 하는 바쁜 시기라는 뜻이겠지요. 이때는 채소나 과일들이 풍성해지고, 보리와 밀도 먹게 됩니다. 특히 이때의 시절음식은 밀가루 음식인데 이때 제일 맛이 나서 국수나 수제비를 즐겨 해먹지요. 채소류로는 호박이며, 생선류로는 민어가 제철입니다. 민어는 포를 떠서 먹기도 하고, 회를 떠서 먹기도 하며, 매운탕도 끓여 먹는데 애호박을 송송 썰어 넣고 고추장 풀고 수제비 띄워 먹는 맛은 환상이랍니다.
730. 판소리에서 고수는 어떤 사람일까? '고수(鼓手)'는 북이나 장구로 소리꾼의 소리에 장단을 맞춰주는 사람입니다. 판소리에서 ‘1고수 2명창’이란 말이 있을 만큼 고수는 중요합니다. 고수는 연출가인 동시에 지휘자로 북반주는 명창의 소리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지요. 고수는 추임새를 넣어 소리꾼이 소리를 신명나게 할 수 있도록 이끄는 구실도 합니다. 수많은 군사가 싸우는 장면에선 힘차고 복잡하게 쳐주고, 심청가에서 떡방아 찧는 소리를 할 때는 떡방아 소리처럼 쳐줍니다. 또 소리꾼의 소리가 느려지면 고수는 약간 빨리 쳐 빠르게 이끌어가고, 빠르면 늦춰주면서 속도를 조절합니다. 반대로 소리꾼이 기교를 부리기 위해 속도를 늘일 때 북장단도 같이 늘어지기(따라치기)를 하고, 소리꾼이 잘못하여 박자를 빼먹거나 늘였을 경우 얼른 이를 가늠하여 맞춰주기도 하는데 이를 '보비위'라고 하지요.
729. 세종임금의 두 번째 며느리는 동성애자였다. 조선시대에도 동성애자들이 있었다는 기록이 세종실록에 전합니다. 세종임금이 말합니다. 내가 늘 듣건대 시녀와 종비들이 사사로이 서로 좋아해 같이 자고, 자리를 같이한다고 하므로 궁중에 금지령을 엄하게 내렸다.” 그 뒤 그런 풍습이 진정되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세종의 맏아들인 문종의 둘째 부인 봉씨가 동성연애를 하다가 들킨 것입니다. 세종이 직접 세자빈 봉씨를 불러 사실을 물으니 상대인 여종 소쌍과 함께 동성애를 한 사실을 시인했습니다. 이 봉씨는 임신했다고 거짓말을 하는가 하면, 시녀들이 변소에서 일보는 것을 엿보고, 술을 즐겨 큰 그릇으로 연거푸 마셔 몹시 취하곤 하는 사고뭉치였다고 합니다. 결국, 세자빈 봉씨는 쫓겨난 뒤 친정아버지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그 친정아버지도 자결했습니다. 동성애자는 예나 지금이나 인정받기 어려웠나 봅니다.
728. 수원 화성의 내력이 있는 화성성역의궤 수원 화성을 지은 내력은 화성성역의궤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궤는 그 내용의 방대함에서 놀라움을 줄 뿐만 아니라 그 자세하고 치밀한 기록 내용으로도 후대 사람들에게 많은 교훈을 남깁니다. 의궤에는 건물별로 집 짓는데 들어간 못의 규격과 수량, 못의 단가까지 쓰여있으며, 한 건물을 짓는 데 몇 사람의 장인이 며칠을 일했는지까지 알 수 있습니다. 또 공사에 종사한 장인에 대해서도 직종별로 일일이 이름을 기록하고 있지요. 의궤에 따르면 공사비용이 80여만 냥, 쌀 1500석, 석재 20만 1400덩이, 일반목재 2만 6200주, 기와 53만 장, 벽돌 69만 5000장이나 들어간 큰공사입니다. 또 연 70여만 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는데 장인은 1800명, 그 중 석수(石手)는 642명, 목수는 335명이 일을 한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기록문화의 나라, 조선을 말해줍니다.
727. 효과좋은 약쑥, 강화도의 사자발쑥 '쑥'은 단군신화를 시작으로 우리 겨레와 함께 해온 식물입니다. 삼국유사 (三國遺事) 에는 "쑥 한 묶음과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는 곰이 사람이 되기 위해 먹었던 것이 마늘과 쑥이라는 이야기이지요. 단군의 어머니가 쑥을 먹고 사람이 되었으니, 우리 몸에는 쑥의 성분이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그 쑥 중에서도 '사자발'을 닮았다고 해서 '사자발쑥'으로 불리는 쑥이 강화도에 있습니다. 사자발쑥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사자 발바닥 모양 같은 쑥이라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 후기의 의서(醫書) 방약합편(方藥合編)에도 사자발쑥 기록이 보입니다. 이미 조선시대 사자발쑥은 강화도의 특산품으로 인정받고 있었던 것이지요. 학자들의 연구논문에도 이 사자발쑥이 다른 약쑥인 인진쑥, 황해쑥(싸주아리)보다 더 나은 것으로 밝혀집니다.
726. 임진왜란 때 경복궁에 불 지른 사람은 백성 1592년 4월 30일 새벽 선조는 한양(서울)을 버리고 떠납니다. 하지만, 도성의 문은 굳게 닫히고, 백성의 피난길은 막혔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밧줄을 타고 성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생겼으며, 도성 안은 약탈과 겁탈이 기승을 부리고, 불을 지르는 일도 늘었습니다. 결국은 경복궁도 불타고 마는데 그동안은 경복궁을 왜병이 불태웠다고 알려졌었습니다. 그러나 '선조수정실록’에 보면 불을 지른 사람은 성안 백성이었습니다. “임금의 피난행렬이 떠나려 할 즈음 도성 안의 간악한 백성이 먼저 내탕고에 들어가 값진 물건들을 다투어 가져갔다. 이윽고 행렬이 떠나자 난민이 크게 일어나 먼저 장례원과 형조를 불태웠다. 이는 두 곳의 관서에 공사 노비의 문서가 있음이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궁성의 창고를 크게 노략질하고, 불을 질러 자취를 없앴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의 세 궁궐이 모두 타 버렸다.” "어, 그래? - 조선왕조실록", 노회찬, 일빛
725. 나이 든 사람이 조심해야 할 것들 나이가 지긋한 분들은 삶의 꽃등(절정)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품위를 지키지 못하고, 젊은이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를 봅니다. 융통성 없이 외곬으로만 나아가는 성질을 ‘곧은목성질’이라고 하는데 그런 사람이 하는 사람이 하는 말은 듣기에 매우 거북합니다. 그럴 때 하는 말이 ‘귀거칠다’입니다. 또 말을 함부로 하여 남의 심사를 뒤틀리게 하는 것을 ‘글컹거리다’라고 합니다. 나이 먹을수록 ‘곤쇠아비’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나이는 많아도 실없고 쓰잘 데 없는 사람을 ‘곤쇠아비’라고 말하지요. 나이 들면서 오히려 젊은이들이 ‘곰살갑다(곰살궂다, 곰살맞다)’라고 하는 사람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곰살갑다’는 상냥하고 부드럽고 속 너름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면 살수록 얼굴에 평화가 가득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724. 고려시대엔 여자가 중심이었다. 호주제를 고수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남성 본위의 호주제가 전통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역사의 기록을 보면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 중기까지는 오히려 여성이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의 학자 이곡(이색 아버지)의 가정집(稼亭集) ‘원 황제에게 올리는 글(代言官請破取童女書)’에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고려 사람들은 차라리 남자는 살림을 내보내 따로 살도록 할망정 여자는 집에서 길러 부모와 같이 살기를 바라는 풍속이 있습니다. 이는 마치 진나라에서 데릴사위를 보는 것과 같은 풍속입니다. 결국, 부모를 봉양하는 데 있어 여자가 중심이 되기 때문에 그들은 딸을 낳으면 곱게곱게 기르면서 그 딸이 빨리 자라 자기를 봉양해 주기를 바란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귀여운 딸을 빼앗겨 4,000리 밖의 중국으로 보내야 한다면 그들의 마음이 어찌하겠습니까?”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옛글 백가지”, 조면희. 현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