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9. ‘윷놀이잔치’는 무식하고, ‘척사대회’는 유식한가요? 우리는 숫자를 읽고 말할 때 ‘하나, 둘, 셋...’이라고 하거나 한자말로 ‘일, 이, 삼...’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십진법을 쓰는 우리는 이제 십, 백, 천, 만처럼 거의 한자말을 씁니다만 원래는 ‘열, 온, 즈믄, 골’처럼 토박이말이 있었습니다. 한자를 좋아하고, 한자말을 써야 유식한 것이라고 잘못 생각한 언론인이나 지식인들이 토박이말 대신 한자말을 쓰면서 이런 아름다운 우리의 토박이말은 목숨을 다했습니다. 명절이 되면 마을에서 윷놀이잔치를 하는 데가 있습니다. 그런데 펼침막을 보면 ‘척사대회’라고 유식한 채 합니다. 척사대회는 ‘던질 척(擲)’, ‘윷 사(柶)’를 쓰는 것인데 그저 ‘윷놀이잔치’라고 쓰면 모두가 쉽게 알아듣고 친근감이 있지 않을까요? 물론 요즘은 한자보다 무분별하게 영어가 쓰는 사람이 많아 크게 걱정스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688. ‘대나무 가을’을 아십니까? 오늘은 24절기의 여덟 번째 절기로 만물이 점차 자라서 가득 찬다(滿)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소만(小滿)입니다. 이때부터 여름 기분이 나기 시작하는데 가을보리를 거두고, 이른 모내기를 하며, 밭농사의 김매기 등을 하게 됩니다. 이때 즐겨 먹는 냉잇국은 시절음식으로 인기가 있었습니다. 또 죽순(竹筍)을 따다 고추장이나 양념에 살짝 묻혀 먹기도 하며, 보리도 익어 밀과 더불어 여름철 주식을 대표하게 됩니다. 온 천지가 푸름으로 뒤덮였지만 대나무만큼은 푸른빛을 잃고 누렇게 변하게 됩니다. 이는 새롭게 탄생하는 죽순에 자기의 영양분을 공급해주었기 때문인데 마치 어미가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어린 자식을 온 정성으로 키우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봄의 누래진 대나무를 가리켜 '대나무 가을(죽추:竹秋)이라고 합니다.
687. 나귀에서 떨어지는 윤두서의 모습 조선 후기의 학자 윤두서의 '나귀에서 떨어지는 진단 선생(진단타려도, 陳摶墮驢圖)이란 그림을 보셨나요? 이 그림은 난세에 시달리던 중국 선비 진단(호 희이)이 좋은 임금이 나타났다는 깜짝 소식에 기뻐하다가 그만 타고 가던 나귀에서 떨어졌음에도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선비 얼굴은 윤두서 '자화상'에 나오는 모습으로 바로 윤두서 자신인 것입니다. 이 그림은 성군을 갈망하는 선비의 마음을 그린 것인데 이를 본 숙종 임금이 화제(畵題, 그림 위에 쓰는 시와 글)를 직접 적었습니다. 이 시대의 우리의 마음도 같을 것입니다. ‘희이 선생 무슨 일로 갑자기 안장에서 떨어졌나? / 취함도 아니요, 졸음도 아니다. 따로 기쁨이 있었다네. / 협마영에 상서로움 드러나 참된 임금 나왔으니 / 이제부터 온 천하에 근심걱정 없으리라.'
686. 봄비 뒤에 우후죽순 자라는 죽순 죽순(竹筍)은 대나무의 땅속줄기 마디에서 돋아나는 어린순을 말합니다. 우후죽순(雨後竹筍)이라는 말처럼 봄비가 촉촉이 온 이후에 쑥쑥 자라는 죽순은 그 맛이 부드럽고 순해 선비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죽순 맛을 못 잊은 평양감사가 한겨울에 죽순을 구해오라는 명령을 내리자 하인들이 대바구니를 삶아 올렸다는 이야기가 있다지요. 죽순으로 만드는 음식은 죽순나물, 죽순물김치, 죽순냉채, 죽순회, 죽순구이, 죽순장아찌, 죽순주, 무죽순말이 따위가 있습니다. 통통하고 껍질에 솜털이 많고 이삭 끝이 노란 것, 뿌리 사마귀는 작고 검지 않은 것을 고르는 것이 죽순을 제대로 고르는 비법입니다. 죽순은 고혈압, 동맥경화, 심장병 예방에 좋은 음식이지만 평소 설사를 자주 하거나 몸이 찬 사람은 많이 먹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또 죽순에는 섬유질이 많아 변비에 좋고, 대장암을 예방한다고 합니다.
685. 조선시대에 펴낸 의궤는 무슨 책일까요? 조선은 기록의 나라였습니다. 세계문화유산이 된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가 그를 증명합니다. 그런데 이에는 의궤(儀軌)들도 한 목을 합니다. 의궤는 조선시대에는 나라의 큰 행사가 있으면 그 내용을 자세히 기록해서 책으로 펴낸 것입니다. 큰일을 상세히 기록함으로써 일을 하는 사람들이 정성을 다하도록 하고, 후세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는 책일 것입니다. 임금이나 왕세자가 결혼할 때 임시로 설치한 가례도감에서 가례 절차를 기록한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 임금과 왕비의 국장을 치른 내용을 적은 '국장도감의궤(國葬都監儀軌)', 임금이 직접 농사짓는 친경의식의 절차 및 소요 물품 등에 대한 '친경의궤(親耕儀軌)' 따위가 있습니다. 또 ‘화성엉역의궤(華城城役儀軌)와 '사직서의궤(社稷署儀軌)', '보인의궤(寶印儀軌)', '친잠의궤(親蠶儀軌)', '진찬의궤(進饌儀軌)' 등도 의궤의 하나입니다.
아직도 영문으로 된 메일주소를 쓰나요? '한글메일 갖기 운동' 본격적으로 펼친다 ▲ 한글메일을 쓰면 이렇습니다. ⓒ 김영조 현대인 치고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따라서 누리편지(이메일)의 사용도 당연한 시대가 되어버렸다. 매일 아침 누리편지를 확인하지 않고는 하루가 답답하다는 말이 나올 지경이다. 또 누리편지는 나라밖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과의 즉시 연락이나 사진, 문서의 바로 보내기가 가능한 세상으로 바꾸어 놓았다.하지만 가끔 잘못된 주소로 누리편지를 보내곤 답장이 오지 않는다고 오해를 하는 경우도 있고, 중요한 편지가 전달되지 않아 낭패를 보는 일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그만큼 한글을 쓰는 우리에겐 영문의 사용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제 보편화된 한글도메인주소처럼 누리편지 주소를 한글로 하자는 운동이 시작되었다.물론 이 일이야 한글이메일기술을 개발하고, 이를 보급하기 위해 나선 넷피아 자회사 ‘한글메일(대표이사 배진현)’이 있기에 가능한 일인 건 사실이다. 지난 4월17일 저녁 광화문 한 음식점에서 한글메일 갖기 운동본부(이하 한글메일운동)의 창립이 선포되었다. 한글메일운동은 창립취지문에서 "한글단체와 국어정보화 운동을 하
684. 독도 이름에 대한 이야기 우리는 일본과 오랫동안 독도 싸움을 합니다. 그런데 독도란 이름은 언제부터 쓰였을까요? 맨 처음 독도 이름은 우산도(于山島, 512년)였는데 이것이 삼봉도(三峰島, 1471) → 가지도(可支島, 1794) → 석도(石島, 1900)로 바뀌다가 1914년 경상북도에 편입하면서 독도(獨島)란 이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울릉도 주민들은 독도를 ‘독섬’이라 부르는데 ‘독섬’은 돌의 사투리 ‘독’과 ‘섬’이 합친 말이며, 한자어 ‘독도’는 ‘독섬’을 한자화하는 과정에서 음이 같은 ‘독’(獨)을 따서 만든 이름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독도’는 ‘홀로 떨어진 섬’이 아닌 ‘돌로 된 섬’이란 뜻이지요. 하지만, 일본은 독도를 다케시마(죽도:竹島)라고 부르는데 독도에는 대나무가 자랄 수 없고 소나무’가 자랐던 그루터기만 발견되었습니다. 땅이름에서도 일본인들이 얼마나 억지주장을 하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683. 아기들의 옷, 배냇저고리와 두렁이, 풍차바지바지 옛날 갓난아기들이 입었던 옷은 배냇저고리와 두렁이, 봇뒤창옷입니다. 이중 배냇저고리(깃저고리)는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처음 입는 옷으로 깃을 달지 않고, 고름도 몇 가닥의 실로 만들어 부드럽고 편안하게 만듭니다. 또 두렁이는 어린 아이의 배를 둘러주는 치마 같은 옷이며, 봇뒤창옷은 아기집에서 떨어져 나온 뒤 입는 큰 옷이란 뜻으로 배냇저고리의 제주도 말입니다. 아기가 삼칠일이 지나면 배내옷을 벗고 저고리와 풍차바지, 개구멍바지를 입기 시작합니다. 풍차바지(십자바지)는 뒤가 길게 터지고, 그 터진 자리에 풍차(좌우로 길게 대는 헝겊 조각)를 달아 지은 바지입니다. 뒤를 튼 까닭은 아기가 용변을 볼 때 편리하도록 한 것으로 돌 때까지는 여자 아이에게 입히기도 했습니다. 돌이 지나면 남아 3-5세까지 입히는 것이 보통입니다. '개구멍바지'는 풍차를 달지 않는 것만 다릅니다.
682. 오늘은 위대한 세종임금 탄신일입니다. 세종임금은 세계 최고의 글자인 훈민정음 창제 말고도 학문 창달, 과학의 진흥, 외치와 국방, 음악의 정리 등에서 뛰어난 업적을 보였는데 한글인터넷추진총연합회 최기호 회장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세종임금이 재위하던 시절 서양은 문예부흥기(르네상스)였다. 그 때 서양엔 음악에 모차르트, 미술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 과학에 갈릴레오가 있었다. 하지만, 동시대의 우리 한국엔 이 사람들을 합한 세종임금이란 위대한 인물이 있다.” 이 위대한 세종임금은 태조 6년(1397년) 5월 15일 서울 북부 준수방(俊秀坊:현재 종로구 통인동 137)에서 조선 3대 임금인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준수방은 경복궁 서쪽문인 영추문길 맞은편 의통방 뒤를 흐르는 개천 건너편인데, 청운동을 흘러내리는 한줄기 맑은 물과 옥인동으로 내려오는 인왕산 골짜기의 깨끗한 물줄기가 합치는 곳입니다.
681. 자신의 공에 대해 한 마디도 않는 충신 임진왜란 때 문신 이정암이 황해도 연안성에서 왜적을 맞아 싸우게 되었습니다. 성안에는 5백의 군사가 있었고, 쳐들어온 왜병은 3천 명이 넘었답니다. 그는 섶을 쌓고 그 위에 앉아 지휘했는데 성이 함락되면 스스로 불을 질러 타죽겠다는 것이었지요. 합심하여 나흘간을 죽기 살기로 싸웠습니다. 죽고 부상한 왜병이 반이 넘자, 왜병은 마침내 연안성을 포기하고 떠납니다. 이 연안성 싸움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거둔 몇 안 되는 승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마침내 보고서가 조정에 닿았는데, ‘신은 삼가 아룁니다. 적이 아무 날에 성을 포위하였다가 아무 날에 포위를 풀고 떠나갔나이다.’ 단 두 줄뿐이었습니다. 자기의 공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않는 이 이정암을 김육은 명신록에 올렸습니다. 참고 : 정민, 마음산책“朝廷聞公被圍, 上下憂危 及捷至, 只言賊以某日圍城解去, 一無張皇語. 議者言 : 却賊易, 不아伐功尤難” -김육(조선 중기의 문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