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9. 사람의 관계와 토박이말 사람의 관계를 나타내는 토박이말 중에는 재미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먼저, 서로 ‘너’, ‘나’ 하고 부르며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는 ‘너나들이’라고 합니다. 또 나이 차가 조금 나지만 서로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는 ‘자치동갑’이지요. 그런가 하면 서로 겨우 낯을 아는 정도의 사이를 ‘풋낯’이라고 하며, 마치 한 몸같이 친밀하고 가까운 사이는 ‘옴살’입니다. 여자의 처지에서 사내 또는 남편을 뜻하는 ‘계집’의 상대말은 ‘남진’인데, 유부남을 토박이말로는 ‘남진아비’, 반대로 유부녀는 ‘남진어미’입니다. 이밖에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고 우연히 만나서 어울려 사는 남녀 즉, 동거부부를 ‘뜨게부부’라고 하는데 재미있습니다. 또 부부를 낮추어 부르는 말로 ‘가시버시’가 있는데 혼인 청첩장에 “오늘 혼인하는 저희 가시버시를 축복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하면 정감이 있지 않을까요? 이런 토박이말들을 찾아서 쓰면 좋을 일입니다. 참고 :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우리말 풀이사전” (박남일, 서해문집)
568. 몸가짐에 줏대가 있어야 바르게 되리 “삼가 뉘우침이 적고, 청렴하면 위엄이 선다. 지극히 험한 일이 닥쳐도 아무 일 없는 듯이 여기라. 몸가짐에 줏대가 있으면 마침내 바르게 되리. 양덕은 반드시 드러나게 마련. 맡은 일 찬찬히 살피시게나.” 위 글은 조선 중기의 학자 권상하의 글 ‘증신정언연행(贈申正言燕行)에 나오는 글입니다. 이 글을 정민 교수는 다음처럼 풀이합니다.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도 삼가고 삼가시게. 그래야만 후회할 일이 적을 것이야. 혼자 다하겠다는 생각, 나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마음, 잠시 접어 두시게. 공연히 재물 욕심일랑 아예 부리지도 말아야 아랫사람에게 위엄이 서는 법이라네. 생각지 못한 힘든 일도 적지 않을 것이네. 침착하게 아무 일도 아닌 듯 대범하게 처리하시게. 음덕이야 가려져 잘 드러나지 않겠지만, 양덕은 밖으로 환한 빛을 발하게 마련일세.” 우리 모두 곰곰이 생각하고 좌우명으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참고 : ‘죽비소리’ (정민, 마음산책)
윤두서 자화상에 귀와 목이 없는 까닭? 국립중앙박물관, 1월 8일까지 조선시대 명품그림 전시 ▲ 국립중앙박물관 전경 ⓒ 김영조 우리는 피카소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알아도 김정희의 세한도, 윤두서의 자화상은 잘 모른다. 그거야 대중의 잘못이 아니고, 우리 교육의 문제일 테지만 우리 그림에 대한 애정은 이 시대에 새롭게 요구되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그림을 직접 보기는 참 어렵다. 대부분의 명품 그림들이 개인 소장품이기 때문이다.그런데 마침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그런 그림들을 보는 행운을 전한다고 한다. 지난 4일부터 8일까지 새 국립중앙박물관 미술관 1회화실에서 조선 시대 최고 화가들의 그림, 그것도 개인 소장이어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그림들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 기간이 끝나면 이 작품들은 바로 소장가들에게 돌려 준다.그래서 나는 부랴부랴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 사전에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의 이수미 연구관과 통화를 한 뒤 찾아갔지만 바쁜 그에게 많은 것을 얻지는 못했다. 하지만 전시 작품 중 아주 특별한 작품을 소개 받았다. 그것은 바로 자화상으로 유명한 조선 후기의 학자 윤두서(1668~1715)의 '나귀에서 떨어지는 진단 선생(진단타려도, 陳
567. 100발의 불화살, 문종임금의 대신기전 우리나라 최고의 ‘로켓’박사인 채연석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전 원장은 세종의 맏아들인 문종임금이 연구책임자가 되어 당시 최고 성능의 로켓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로켓은 ‘커다란 귀신 같은 기계화살’이란 뜻을 가진 ‘대신기전(大神機箭)’으로 한번에 100발의 불화살을 발사하며, 최고 2킬로미터까지 날아갑니다. 또 대신기전의 설계도를 보면 ‘척/촌/푼/리’ 단위가 나오는데 이중 리는 0.3mm로 0.1mm 단위까지 정밀하게 화약무기를 제조했다고 합니다. 그는 “세종이 북쪽 두만강에서 압록강까지 4군 6진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대신기전이라는 무기가 있기 때문에 가능했고 당시 왜군도 200여 년 동안 대신기전 때문에 조선을 침입하지 못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문종이 2년 만에 죽지 않고, 수십 년간 통치했다면 화약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해 세계 평정도 가능했을 것이라는 게 채 전 원장의 주장입니다. 참고 : 인터넷 과학신문 ‘사이언스 타임즈’ 서현교 객원기자, 2006년 1월 14일자
566. 문화재의 종류엔 무엇이 있을까? 문화재란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을 뜻합니다. 이에는 형태를 갖춘 것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여러 세대를 거치는 동안 전해져온 여러 가지 예술활동과 인류학적인 유산, 민속, 법, 습관, 생활양식 등 겨레의 뿌리를 표현하는 모든 것까지 포괄합니다. 국가지정문화재를 보면 먼저 제70호 훈민정음(訓民正音) 외 404개의 국보, 제1호 서울 흥인지문 외 1840개의 보물, 제1호 경주 포석정지 외 455곳의 사적, 제1호 경주 불국사 경내 외 8곳의 사적 및 명승, 제2호 거제 해금강 외 14곳의 명승, 제53호 진도의 진도개 외 385종의 천연기념물, 제1호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 외 126종의 중요무형문화재 따위가 있습니다. 이 밖에도 중요민속자료와 지방문화재도 있습니다. 우리는 문화재를 통해 과거 조상이 살아온 삶과 그들의 슬기를 배우게 되며 겨레의 자긍심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565. 따뜻한 화가, 이중섭 이야기 이중섭(1916-1956)은 가장 한국적인 작가인 동시에 가장 현대적인 작가로 평가받는 화가입니다. 이런 이중섭을 전 서울대 미대 학장을 지낸 김병종씨조차 처음엔 너무 과대평가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김병종씨는 이후 이중섭을 순수하고 따뜻한 영혼의 소유자란 점에서 평가하고 있습니다. 극심한 어려움 속에서 겨우 작품 몇 점 팔아 생긴 돈을 거리에서 만난 불쌍한 사람에게 몽땅 줘버린 이야기, 새벽마다 무릎을 꿇고 숙소이던 여관 복도를 말끔하게 걸레질하고 안뜰 디딤돌에 놓인 손님들 고무신을 씻어 햇볕에 말려놓곤 했다는 이야기, 동네 개구쟁이들을 모아 일일이 수돗가에서 얼굴과 손을 씻겨주던 이야기, ‘남들은 저렇게 바쁘게 열심히 사는데 나는 그림 그린답시고 놀면서 공밥만 얻었다.’며 일절 음식을 먹지 않았던 이야기. 이중섭이 위대한 화가였음이 드러나는 감동적인 이야기들입니다. 참고 : 김병종의 화첩기행 1 ‘예의 길을 가다’, 효형출판
564. 임금님 수라상에 흰쌀밥과 잡곡밥 두 그릇 흰쌀을 한자말로 백미(白米)라 부릅니다. 백미는 흰 백(白) 자와 쌀 미(米) 자를 붙인 말입니다. 그런데 이 ‘백’ 자와 ‘미’ 자를 바꾸어 붙이면 ‘지게미’(술을 거르고 난 찌꺼기) ‘박(粕)’ 자가 되는데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원래 쌀에서 비타민과 미네랄은 씨눈에 66%, 쌀겨에 29%, 쌀몸에 5%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쌀겨는 물론 쌀눈까지 떼어내 비타민과 미네랄을 5%만 남겨 놓았기에 찌꺼기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건강한 삶을 살려면 흰쌀밥만이 아닌 현미밥을 먹어야 할 것입니다. 또 현미밥과 함께 잡곡밥을 먹으면 더욱 좋습니다. 한의학에서 남성의 정액성분은 오곡으로부터 온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임남성이 되지 않으려면 가능한 현미밥과 오곡밥을 먹고, 채소 위주의 식사를 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임금의 수라상에는 흰쌀밥과 잡곡밥 두 그릇을 올려놓았는 기록이 있습니다.
563. 우리말 중 가장 많이 쓰는 말은? 우리가 쓰는 말 중 가장 많이 쓰는 말은 무엇일까요? 1950년대 우리말의 잦기 조사가 처음 이루어진 이후 지금까지 여러 차례 조사가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국립국어원에서 1990년대 현대소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가 나왔는데 소설은 그 시대의 현실 말글을 가장 잘 반영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자료입니다. 이 보고서 중에는 몇 가지 재미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가장 많이 쓰인 닡말은 ‘이다’로서 전체의 3.34%를 차지합니다. 그 뒤를 대이름씨 ‘나’가 이었고, ‘것, 수, 있다, 하다, 없다, 되다, 아니다’ 따위가 많이 쓰였습니다. 대체로 의미와 기능의 폭이 넓은 낱말들입니다. 50위 안에 든 한자말은 한 낱말로서 33위에 ‘여자’가 있으며, 100위 안에도 여덟 낱말 정도입니다. 이것은 사전에 실린 한자어가 우리말 전체의 70%에 이른다고 하지만, 실제 말글생활에서의 비중은 의외로 낮음을 말해줍니다. 참고 : ‘말이 올라야 나라가 오른다’, 한겨레신문사 중 ‘우리말 사용 빈도, 권재일’
562. 누비옷으로 만드는 아름다움과 보온 한복을 입었던 옛사람들은 한겨울 추위를 누비옷으로도 견뎠습니다. 누비는 2겹의 옷감 사이에 솜을 넣고 줄줄이 홈질하는 바느질입니다. 옷감의 보강과 보온을 위한 것으로 몽골의 고비 사막 일대에서 시작되어, 기원전 200년쯤 중국과 티베트에서 쓰였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엔 치마, 저고리, 포, 바지, 두의(頭衣), 신발, 버선. 띠 등 옷가지와 이불에 따위에 누비가 다양하게 쓰였습니다. 누비는 원래 솜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지만, 아름다움을 위한 목적도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이전 출토된 옷이 없어 확인할 수가 없으나, 일본 나라시대의 정교한 누비옷 유물이 있음을 보아, 한국에서는 이보다 앞선 때부터 누비를 해 왔을 것입니다. 누비는 무늬의 모양에 따라 줄누비, 잔누비, 오목누비 따위로 나뉩니다. 이 가운데 홈집이 촘촘한 잔누비는 홈질줄의 간격이 1밀리미터 정도인데 정말 정교하고 아름답습니다.
561. 벼슬을 받은 부부 소나무 소나무 중에는 벼슬을 가진 부부 소나무가 있습니다.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속리산 들머리의 '정이품송(正二品松)'이란 벼슬을 가졌습니다. 종양으로 고생하던 세조는 복천암 약수가 좋다고 하여 찾아가던 중, 한 소나무 밑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나무 가지에 가마가 걸릴까 봐 "연 걸린다"라고 꾸짖자 이 소나무가 가지를 번쩍 들어 무사히 지나가게 해주었는데 뒷날 세조는 이 소나무에 정이품의 벼슬을 내렸다고 합니다. 천연기념물 103호로 나이는 약 600살 가량 됩니다. 그런가 하면 보은군 외속리면에 정이품송이 남편인 암소나무, ‘정부인소나무’가 있습니다. 밑동부터 가지가 두 갈래로 갈라져 나온 소나무를 암소나무라고 부르는데 정부인소나무는 땅 위 70cm에서 가지가 둘로 갈라졌습니다. 정이품송과 연결하여 정부인 소나무로 불린듯하며, 천연기념물 352호로 역시 나이는 약 600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