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곁으로 돌아온 민족음악가 '윤이상' 신나라, 윤이상 서거10주년 기념음반 발매 ▲ 윤이상 선생 ⓒ2005 윤인숙 지난 10월 11일에 장충동 경동교회 여해문화공간에선 의미 있는 연주회가 열렸다. 그것은 성악부분에선 윤이상 선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제자이며, 윤이상 선생이 1995년 베를린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가장 가까이에서 선생을 모셔온 윤인숙씨가 서거 10주년 추모음악회를 연 것이다.그날 윤인숙씨는 객석의 맨 앞에 별도로 의자 하나를 마련해 놓았다. 윤이상 선생의 혼을 위해 특별석을 마련한 것이다. 우리의 눈으론 볼 수는 없었지만 분명 그 자리엔 내내 윤이상 선생의 혼이 자리를 잡고 있었을 것이란 느낌을 주었다. 그건 영상을 통해서나마 윤 선생을 볼 수가 있었고, 윤 선생의 음악을 윤인숙을 통해서 생생히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윤이상 선생은 누구인가? 그는 1959년 독일에서 열린 다름슈타트음악제 때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을 발표, 유럽음악계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1967년 동베를린공작단사건에 연루되어 서울로 강제소환, 2년간의 옥고를 치렀으나 온 세계 음악가들의 항의와 국교 단절까지 불사했던 독일의 강력한 요구에 풀려날 수 있었다.
491. 조선시대의 반도체였던 인삼 조선시대 우리의 인삼은 지금의 반도체에 비유될 만큼 대단한 가치가 있었다고 합니다.인삼은 금과 같은 값을 치를 정도로 인기가 있었고, 나라의 재정에 커다란 보탬이 되었습니다. 특히 중국에서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몰랐는데 서양에도 신비의 영약으로 알려질 정도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네델란드 상인들은 인디언들을 동원해서 미국의 산속을 뒤졌고, 1747년 메사추세추 주의 스톤 브리지라는 곳에서 많은 양의 야생 삼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야생 삼들은 조선의 인삼에 비해 질이 낮았지만 1/5 정도로 값이 싸서 인기를 끌 수밖에 없었고, 이에 조선 인삼은 값이 폭락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고 합니다. 무역전쟁은 지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전 18~19세기에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인삼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엘리자베스 여왕, 빌 클린턴 대통령 등도 인삼의 애용자였었다고 합니다. 참고 : “교양으로 읽는 인삼이야기” (옥순종, 이가서)
490. 한복의 진동은 직선이어야 합니다. 한복의 저고리를 보면 몸판과 팔이 붙는 자리가 있는데 이를 ‘진동’이라고 합니다. 특히 한복의 진동은 평면재단을 하여 직선이 됩니다. 그러면 가슴과 어깨 사이에 주름이 잡히고 넉넉해져 몸을 편하게 해줍니다. 그런데 이 주름이 보기 싫다고 서양옷처럼 입체재단을 하여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몸쪽으로 파내어, 주름이 없는 저고리를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서 한 술 더 떠 어깨에서 가슴으로 바느질 선(다트)을 넣어 가슴이 돋보이도록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한복의 철학과는 다른 것입니다. 한복은 넉넉하게 하여 몸을 편하게 하고, 몸을 가려주는 옷인데 서양옷처럼 몸을 드러내고 몸을 조이는 옷이 된다면 이미 한복으로서의 가치는 사라진 결과일 것입니다. 몸을 드러내려면 서양옷이 훨씬 효과적이며, 굳이 한복을 입을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디자인이 뛰어나도 한복답지 않다면 좋지 않을 것입니다.
489. 아시아와 함께 한 국립국악관현악단 10월 28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는 국립국악관현악단 10돌 기념 공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공연은 아주 특별하게도 아시아 음악인들과 함께 한 공연입니다. 국악관현악단이 중심이 되어 한국의 대금(이생강), 해금(김영재) 그리고 아세안 10개국 음악가들로 구성된 아세안 오케스트라, 북한의 옥류금, 중국의 얼후, 일본의 고또가 같이 한 것입니다. 이 방식은 이날 공연의 지휘자인 박범훈 중앙대 총장이 자신 있게 열고, 공통된 힘, 자국의 독특한 음악들을 합하여 하나 된 관현악단을 만들자며 10년 전 새롭게 시도하였습니다. 우리는 보통 국악과 서양 음악이 맞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이날 공연은 국악과 아시아 악기, 서양 악기가 이렇게 잘 맞을 수도 있다는 믿음을 갖게 했습니다. 청중들은 감격의 손뼉을 아낌없이 치고, 두 곡의 음악을 덧붙여 선물 받았습니다.
488. 삼국시대에는 쇠솥이 재산목록 1호였다. 한국전쟁 때의 사진에는 피난민들이 가마솥과 이불을 지고 가는 모습이 많이 나옵니다. 그것은 먹고 자는 문제가 중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삼국시대에는 이 쇠솥이 웬만한 집의 재산목록 1호였으며, 생존의 마지막 수단이었다고 합니다. 한국역사연구회가 펴낸 책 ‘삼국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를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신라 고승 가운데 의상대사의 제자인 진정법사가 있었다. 그는 출가하기 전에 집이 너무 가난하여 품을 팔아서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집안의 마지막 재산으로 다리가 부러진 쇠솥 하나를 가지고 갖고 있었다고 한다.” 최근 다른 솥보다 이 무쇠솥에서 지은 밥이 더 맛있다는 결과가 나오면서 무쇠솥의 인기가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무쇠솥에선 밥을 지을 때 아주 적은 양의 철분이 배어 나오기 때문에 밥맛이 좋아지는 것이라는 주장도 나옵니다.
487. 컴퓨터에서 한글을 올바르게 쓰도록 돕는 프로그램 요즘은 많은 사람은 컴퓨터가 없으면 한시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컴퓨터를 활용해서 정보 검색도 하고, 게임도 하며, 글도 쓰고, 편지도 주고받습니다. 하지만, 컴퓨터를 통해서 글을 쓸 때 맞춤법에 자신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웬만큼 글을 쓴 사람들도 일본투나 번역투의 잘못된 말에 익숙해서 자기의 글이 어디가 잘못된 줄도 잘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실수를 잡아주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산대 권혁철 교수가 개발한 ‘바른한글’인데 글 따위의 워드프로세서와 연동해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붉은 점선으로 표시하고 왜 잘못된 것인지의 도움말과 함께 고쳐줄 수 있도록 합니다. 아직 이 프로그램이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프로그램을 개발한 것 자체가 훌륭한 일입니다. 일반인들도 바른한글 누리집(http://www.barunhangul.com/)에 들어가면 이를 무료로 쓸 수가 있습니다.
486. 조선시대에는 하루 몇 끼를 먹었을까? 지금 동서양을 막론하고 하루 세 끼를 먹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리고 의사들은 하루 세 끼 먹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을 살을 빼기 위해서 밥을 굶기도 합니다. 그러면 조선시대 사람들은 하루 몇 끼를 먹었을까요? 한국역사연구회에서 펴낸 책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에 보면 조선시대에는 두 끼가 기본이었다고 합니다. 점심은 먹을 수도, 먹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계절에 따라 달랐는데 19세기 중반 이규경이 지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대개 2월부터 8월까지 7달 동안은 세 끼를 먹고, 9월부터 이듬해 정월까지 5달 동안은 하루에 두 끼를 먹는다고 되어있습니다. 즉 해가 긴 여름, 그리고 농사철에는 활동량이 많았으므로 세 끼를, 해가 짧은 겨울, 농한기에는 두 끼를 먹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겨레는 이미 운동 정도에 따라 열량을 조절하는 슬기로움이 있었습니다.
485. 창작 판소리 ‘열사가’를 아시나요? 현재 남아있는 우리의 전통 판소리는 춘향가, 심청가, 홍보가, 수궁가, 적벽가 등 다섯 바탕입니다. 그런데 이 전통 판소리가 아닌 새롭게 만든 창작 판소리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창작 판소리가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대부분 잘 모릅니다. 창작 판소리의 시작은 ‘열사가’입니다. ‘열사가’는 전남 담양 태생의 박동실 명창이 창작하여 보급시킨 것입니다. 박동실은 북으로 간 소리꾼이어서 잊혔지만 해방 앞뒤로 박동실의 명성은 대단했다고 합니다. 당시 한국을 대표하는 소리꾼들인 김소희, 한승호, 장월중선, 한애순, 성우향 등이 모두 박동실에게 배웠을 정도입니다. ‘열사가’는 일제에 항거했던 열사들인 안중근, 윤봉길, 이준, 유관순의 행적을 판소리로 만든 것입니다. 해방 이전에 만들어져서 암암리에 불렸다고 하는데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는 의미를 띤 '민족의 소리'였습니다.
484. 맥이 시작한 곳이라는 중국의 곤륜산은 없다. 우리나라의 풍수책들을 보면 중국 곤륜산에서 맥이 시작하여 만주 벌판을 지나 백두산에서 힘을 받아 백두대간을 타고 지리산까지 흐르면서 가지를 뻗어 각 산으로 흐른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 곤륜산을 두산대백과사전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쿤룬산[崑崙山(곤륜산)] : 하늘에 닿을 만큼 높고 보옥이 나는 명산으로 전해졌으나, 전국시대 이후 신선설이 유행함에 따라 신선경(神仙境)으로서의 성격이 두드러지게 되어, 산중에 불사의 물이 흐르고 선녀인 서왕모가 살고 있다는 신화들이 생겨났다. 중국의 쿤룬산맥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즉, 곤륜산은 전설 속에 나오는 산으로 실제는 없다고 합니다. 그리스의 올림포스산처럼 이상향을 꿈꾼 것입니다. 그런데도 한국의 풍수가들은 중국의 곤륜산을 마치 성지인 것처럼 떠받드는데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참고 : 명당의 원리(덕원, 정신세계사)
483. ‘담바귀타령’과 담뱃불 붙이는 하인 “귀야 귀야 담바귀야 동래나 울산의 담바귀야 / 은을 주러 나왔느냐 금이나 주러 나왔느냐 / 은도 없고 금도 없고 담바귀 씨를 가지고 왔네” 이는 경상도 민요의 하나인 ‘담바귀타령’으로 일본에서 담배가 전래되어 동래, 울산 지역부터 재배되기 시작했는데 금과 은에 비교될 정도로 담뱃값이 비쌌음을 보여줍니다. 또 담배를 피우는 도구로 담뱃대가 있었는데 담배를 담아 불태우는 담배통과 물고 빠는 물부리, 그리고 담배통과 물부리 사이를 연결하는 설대로 구성되며, 설대가 긴 것을 장죽, 없거나 짧은 것은 곰방대라 부릅니다. 장죽은 혼자서 담배통에 불을 붙이고 물부리를 빨 수 없어서 불을 붙이는 하인이 따로 있었습니다. 하인을 둘 수 없는 서민은 그래서 곰방대를 쓸 수밖에 없었구요. 예전엔 담뱃대의 길이로 신분의 차이를 드러냈습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중 ‘담뱃대의 길이는 신분에 비례한다(오종록)’, 한국역사연구회, 청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