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 황사가 아니라 흙비입니다. 매년 봄이 되면 연례행사처럼 황사가 옵니다. 황사는 중국과 몽골의 사막과 황토지대의 흙가루가 우리나라 하늘까지 날아와 떨어지는 것인데 ‘삼국사기’나 ‘증보문헌비고’에 보면 이 황사현상이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기록에는 보면 ‘황사’가 아니라 ‘흙가루’, ‘흙비’입니다. 조선 말기까지도 우리는 ‘흙비’라는 말을 썼는데 일제강점기 때 ‘누런 모래’라는 뜻의 ‘황사(黃砂)’로 바뀌었습니다. 사실 ‘누런 모래’보다는 ‘하늘에서 비처럼 떨어지는 흙’이라는 뜻의 ‘흙비’라는 말이 훨씬 더 우리의 감성에 맞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무 생각없이 따라 쓰는 것은 일본 정치인들이 우리를 얕잡아 보게 하는 빌미가 아닐까요? 인터넷에는 “일본문화잔재지도만들기(http://i60.org/baro/)”란 누리집이 생겼습니다. 그 곳을 찾아 반성하며, 일본문화의 쓰레기를 지워야 할 것입니다.
329. 대지팡이를 짚고, 짚신을 신고, 죽장망혜 "죽장망혜(竹杖芒鞋) 단표자(單瓢子)로 천리강산(千里江山) 들어가니 폭포(瀑布)도 장히 좋다마는 여산(廬山)이 여기로다…". 위 대목은 단가(短歌:판소리를 부르기 전에 목을 풀기 위하여 부르는 짧은 노래) 중 하나인 ‘죽장망혜(竹杖芒鞋)’ 사설의 일부입니다. ‘죽장망혜’는 주로 남도지방에서 널리 불리던 노래인데 만든 사람은 모르며, 중모리장단에 맞춰 부릅니다. 여기서 죽장(竹杖)은 ‘대지팡이’이며, 망혜는 '마혜(麻鞋)'의 잘못으로 미투리(삼이나 노 따위로 짚신처럼 삼은)을 말합니다. 대지팡이를 짚고, 짚신을 신고, 조롱박만을 찬 간소한 차림으로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버린 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산천을 구경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꿋꿋하고 평화로운 느낌을 줍니다. 단가는 이 밖에도 ‘만고강산’, ‘진국명산’, ‘고고천변’, ‘백수한’, ‘장부한’, ‘호남가’ 따위가 있습니다.
오늘은 '세종날', 겨레의 위대한 스승을 기리자 한글학회, 세종 임금 탄신 608돌 관련 행사 열어 ▲ 세종임금 동상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2005 김영조 오늘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 스승의 날이다. 이날 오늘의 나를 있게 해주신 선생님께 작은 사랑을 바친다. 비록 그 때문에 학부모들은 아이의 선생님에게 어떤 선물을 해야 할지 많은 고민을 하기도 한다.1964년 청소년 적십자단의 각도 대표들이 불우한 퇴직교사 또는 질병에 걸린 교사를 위로하자는 차원에서 세종대왕 탄신일인 5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정한 뒤로 매년 5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지내고 있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오늘은 스승의 날이기 이전에 세종날, 즉 세종 임금이 탄생한 지 608돌이 되는 날이라는 것이다. 세종 임금은 우리 겨레에게 커다란 선물을 준 조선시대 가장 큰 임금인데 1397년 5월 15일 조선 3대 임금인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세종 임금은 1418년 8월 10일(음력) 아버지 태종을 이어 조선 제 4대 임금에 올랐다. 세종은 천성이 어질고 부지런했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취미와 재능이 여러 방면에 통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한다. 정사를 펼침에 있어 백
판소리계의 윤심덕, 안향련을 아십니까? 불세출의 판소리 명창 안향련의 유고전집 나와
328. 음양이 없으면 세상이 없습니다. 태초에 음과 양의 두 기운이 갈라져 가볍고 맑은 기운은 위로 올라가 하늘이 되고, 무겁고 탁한 기운은 아래로 가라앉아 땅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자는 양이며 하늘이고, 여자는 음이며 땅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며 ‘남존여비사상’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땅이 없으면 하늘이 없는 것이고, 차가움이 없으면 따뜻함도 없으며, 어두움이 없으면 밝음도 없는 것입니다. 한국의 지성으로 불리는 이영희 교수는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했습니다. 좌, 우 한쪽 날개만으로 날지 못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세상에 남자만 있다면 얼마나 살벌하고 재미없는 삶이 될까요? 모든 것은 상대적이어서 양의 기운이 좋다고 음이 없어져서는 안 되며,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어야 살기 좋은 세상인 것입니다. 음양의 조화는 이 세상을 한층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 갈 것입니다.
327. 와송주(臥松酒)를 아십니까? 우리 겨레는 소나무 집에서 태어나 소나무와 함께 살다가 죽어서는 소나무 관에 들어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나무는 우리의 중요한 먹거리였습니다. 솔잎으로 송편을 해 먹었으며, 송홧가루로 다식(茶食:차를 마실 때 먹는 한과)을 만들어 먹고, 소나무 뿌리에 기생하는 복령(茯笭)은 약제로 썼으며, 송이버섯은 좋은 음식재료입니다. 또 솔잎주와 송화주(松花酒:송화를 줄기 채로 넣고 빚은 술), 송순주(松筍酒:소나무의 새순을 넣고 빚은 술)를 빚어 마셨습니다. 또 비스듬이 누운 소나무로 빚는 술, 와송주가 있습니다. 누운 소나무의 몸통을 말밥통 모양으로 뚫은 다음 그 속에 술을 빚어 넣고, 소나무 판자로 뚜껑을 만들어 덮은 다음 진흙으로 단단히 봉합니다. 그 위에 풀을 덮어 비가 들어가지 않게 하고, 발효된 뒤에 마시면 맑은 향기가 입을 가득히 채웁니다. (참고 : 한국민속대관, 고려대, 1982)
326. 만물이 점차 자라서 가득 차는 소만(小滿) 오늘은 24절기의 여덟 번째인 소만인데 만물이 점차 자라서 가득 찬다(滿)는 뜻입니다. 이때부터 여름기분이 나기 시작하는데 가을보리를 거두고, 이른 모내기를 하며, 밭농사의 김매기를 합니다. 옛사람들은 소만의 시기 중 초후(初候)에는 씀바귀가 뻗어 오르고, 중후(中候)에는 냉이가 누렇게 죽어가며, 말후(末候)에는 보리가 익는다고 했습니다. 또 이때 즐겨 먹는 냉잇국은 시절식으로 인기있지만 소만이 지나 꽃이 피면 먹지 못합니다. 또 초후를 전후로 죽순(竹筍)을 따다 고추장에 살짝 묻혀 먹는데 구수하고 담백하여 별미로 인기가 있습니다. 온 천지가 푸른 세상이지만 대나무만큼은 누렇게 변하는데 이는 새롭게 솟아나는 죽순에 자기의 영양분을 공급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미가 자신을 돌보지 않고 어린 자식을 정성을 다하여 키우는 것과 같은데 이를 가리켜 '죽추(竹秋:대나무 가을)라 합니다.
325. 각종 기념일 속에 없는 세종임금 탄신일 1973년 시행된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따라 정부가 제정한 기념일로 달력에 표시된 날은 33종입니다. 조세의 날(3. 3), 상공의 날(3월 셋째 수요일), 체신의 날(4. 28), 재향 군인의 날(5. 8), 전매의 날(7. 1), 철도의 날(9. 18), 경찰의 날(10. 21), 국제연합기념일(10. 24), 육림의 날(11월 첫째 토요일), 수출의 날(11. 30), 국민교육헌장 선포기념일(12. 5) 등 일반 국민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날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기념일 중에 우리의 역사에 길이 남을 세종임금을 기리는 날은 없습니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조선의 이순신장군 등 위대한 사람이 많지만 세종큰임금은 세계 최고의 글자를 만든 것 하나만으로도 그 어떤 사람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우뚝 선 분입니다. 한글날을 국경일에서 빼버린 것에서 더하여 세종임금 탄신일도 기리지 않는 정부나 그런 날이 있는지도 모르는 국민 모두가 반성해야 합니다.
324.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꾸려냈던 광주민중항쟁 어제는 광주민중항쟁 25돌이었습니다. 그날 아무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예비군 동원훈련에 끌려갔던 나는 5일 동안을 그저 밥 먹고 노는 날들이었습니다. 라디오에서는 광주에서 폭도들의 난동이 있다는 뉴스가 계속 나오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방의 현역군인들을 광주항쟁 진압을 위해 보내고, 그 빈자리를 예비군들로 메운 것이었습니다. 결국 본의 아니게 광주항쟁 진압에 협조한 꼴이 된 것입니다. 광주민중항쟁을 군사정권은 폭도들의 난동으로 몰았지만 나중에 알려진 사실은 그 기간 동안 광주는 평화 그 자체였다고 하지요. 도둑이나 강도도 없었으며, 오히려 시민 전체가 하나가 되어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꾸린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때 수많은 시민들이 죽고, 다쳤지만 우리 겨레의 더불어 정신이 현대에 구현된 아름다움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우리 역사에 길이 빛날 민중항쟁이 아닐까요?
323. 조선시대 여인들이 말을 탈 때 입었던 ‘말군’ ‘말군(襪裙)’은 조선시대 상류 계급 여인들이 입었던 폭 넓은 바지로 ‘오군(襖裙)’이라고도 합니다. 그 모양은 ‘악학궤범(樂學軌範)’에 나오는 악공복(樂工服)이 입는 말군 그림으로 보아 통이 넓은 바지로 뒤가 갈라지고, 어깨에 걸치는 끈이 달린 옷입니다. ‘세조실록’에는 양반집 부인이 말군 없이 말을 탔기 때문에 기생으로 오해받고 망신을 당하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양반층 부녀가 말을 탈 때는 반드시 말군을 입어야 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세종실록(世宗實錄) 권43(세종 11년)에 보면 “양반집 여인네를 따르는 여종은 말군을 입지 못하게 하자.”라는 사헌부의 계(啓:관청이나 벼슬아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를 보면 신분에 따라 입는 것을 제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말군은 양반집 여인들 외에 기생이나 연화대무(蓮花臺舞:나라의 잔치 때에 추던 춤의 하나)를 추는 어린 여자아이가 입기도 한 옷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