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 북한에선 처가를 ‘가시집’이라고 합니다. 북한에서는 처가를 ‘가시집’, 육교를 ‘구름다리’, 미숙아는 ‘달못찬 아이’, 천일염을 ‘볕소금’, 슬리퍼는 ‘끌신’이라고 하며, 다이어트는 ‘몸까기’, 쏘아보다는 ‘눈딱총을 놓다’라는 재미있는 말을 씁니다. 또 북한에는 ‘적은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나이는 아래지만 허물없이 지내는 사람을 다정하게 부르는 것입니다. 물론 새어머니를 ‘후어머니’, 팬티를 ‘빤쯔’라고 하는 등 북한에서 쓰는 말이 모두가 좋은 것은 아니지만 북한에서는 외래어나 한자말을 토속어로 바꿔 쓰려고 노력합니다. 외래어를 그대로 쓰자는 사람은 세계화시대에 언젠가는 외래어가 판치고 우리말은 흔적을 찾을 수 없는 날이 올 수도 있음을 모릅니다. 처음 들으면 어색하겠지만 우리의 토속어를 잘 쓴다면 훨씬 정감있고, 뜻이 잘 통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뜻도 모르면서 ‘척사대회(擲柶大會)’라고 잘난 채 하기보다는 ‘윷놀이잔치’라는 말이 더 좋습니다.
"아리랑"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면필자는 남,북한 선수가 손잡고 올림픽 개막식에 입장할 때 "아리랑"을 연주한 것은 올바른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2002년 월드컵이 한국에서 치러졌을 때 시종 대한 민국의 하늘에 울려 펴졌던"아리랑"!!! 이 " 아리랑" 이야말로 한민족의 얼을 가장 대표할 수 있는 민요이기 때문이다. 몇 해 전 필자는 KBS TV 위성 방송에서 이런 대목을 본 적이 있다. 체코 여인들이 체코 주재 한국 대사관 앞에 모여 있었다. 한국 기자 한 명이 나타나 그들과 대화하는 장면은 이러했다. 기자 문: " 어째서 여기 모여있지요?" 여인들 답: "한국 비자 받으려 왔어요." 기자 문: "한국에는 무엇을 하러 가세요?" 여인들 답: "돈 벌려 가려 해요." 기자 문: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알기나 하고 가려고 해요?" 여인들 답: "네..." 이에 한국 기자는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을 말해 달라고 했다. 이때 한 여인이 자신 만만 하게 다가서며 "아리랑"을 불렀고, 그 기자는 그 여인의 어깨를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장면을 볼 때 , 필자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한민족이라면 누구라도 이 장면에서 울컥하는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16소절의 짤
친구보다 정감 있는 우리말 - 동무 몇 년 전 한국 어느 신문의 칼럼에서 "동무"란 제목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고 문 익환 목사가 북한 김 일성 주석을 만날 때, 그를 어떻게 부를 것인지 고민하던 끝에 "동무"라고 불렀다는 내용 이였다. 그러면서 "동무"는 한자의 (同務)에서 왔을 것으로 보고,"같이 힘을 쓰는 사람"이라 해석해놓았다. 하지만 필자의 견해로는 "동무"는 한자의 "同務"에서 온 것이 아니라"同謀"에서 왔다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할 듯하다. 중세 중국에서는 서로 돕는 동료 일꾼을 "훠찌(伙計)"라고 했다. 유창돈 "劉昌惇"의 에 의하면, 이 단어를 한국의 언해본이나 및,에서는 "동모"로 번역했다고 한다. 그런데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와 대조해 본 결과,"동모"가 아니라"동무"로 되어 있다. 또는 "반 伴"자에 대한 해석이 "벋(벗-필자주)반"으로 되어 있고, 그 밑에 "통속적인 말로 화반伙伴, 동모同謀라고 한다"는 각주를 달았다.에서는 반伴자를 아예 "동모반" 이라고 풀이했다. '伴'자는'동반자'라는 말에 쓰이는 "伴"자이므로 그 뜻이 '동무'와 통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렇다면 '동모'의 어원은 무엇일까? 필자는 이
을유년 닭의 해, 설날을 맞아 큰잔치를 엽니다.지금은 모두에게 어려운 때입니다. 그래서 설빔을 장만할 여유가 없음을 감안하여 깜짝 놀랄 잔치를 엽니다. 많은 분들이 이번 기회에 설빔을 장만하여 환한 설날을 맞이하셨으면 좋겠습니다.1. 희망잔치2. 에누리 및 사은잔치3. 재고상품 원가이하 판매
208. 한의학은 우리의 독창적인 의술입니다. 중국 의서의 고전 [황제내경] 중 “이법방의론(異法方宜論:질병 치료법)”에서 명의 기백은 말합니다. 동쪽지방 사람들은 생선과 짠 음식을 좋아하여 그에 따른 병이 많이 생겨 그에 맞는 침술이 발달되었습니다. 이에 반해 서쪽지방 사람들은 질긴 고기와 우유, 치즈 따위 유제품을 먹는 특성에 따라 약물치료법, 또 북쪽지방 사람들은 성질이 찬 음식인 육류와 유제품을 먹는데 따른 뜸치료법이, 남쪽지방은 과일을 발효시킨 음식을 좋아하기 때문에 구침술이 발달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의학이 중국 것이거나 중국의 모방 정도가 아닌가 합니다. 물론 우리 한의학의 출발은 중국 것입니다만 지금 우리의 한의학과 중국의 중의학은 분명 다릅니다. 기백의 말처럼 각 지방의 특성에 맞는 치료법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고, 우리는 허준과 이제마 선생 등 여러 한의사들의 노력 끝에 독창적인 의학으로 발달한 것입니다.
207. 풍경(風磬)이 있는 풍경(風景)을 그리며 풍경은 절의 전각 처마 끝에 달린 조그만 종인데 가운데에 추를 달고, 밑에 물고기 모양의 쇳조각을 매단 쇠종을 말합니다. 북한말로는 바람종인 이 풍경은 사람이 두드려서 소리가 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힘 즉, 바람으로 소리가 나기 때문에 풍경이란 이름이 붙었습니다. 물고기를 단 까닭은 물속에 사는 물고기들이 바람에 휘날리는 풍경소리를 듣고 자신들의 업을 씻어 다시 좋은 곳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뜻으로 달았으며, 또 물고기가 늘 눈을 뜨고 사는 것처럼 수행자도 항상 부지런하게 도를 닦으라는 뜻이었다고도 합니다. “만등(卍燈)이 꺼진 산에 풍경이 웁니다. / 비어서 오히려 넘치는 무상의 별빛 / 아, 쇠도 혼자서 우는 아픔이 있나봅니다.” ‘풍경’이란 시의 일부분입니다. 가만히 혼자서 우는 풍경의 아픔을 생각해봅니다. 아스라이 먼 곳에서 들리는 풍경소리에 가슴 속 깊이 나를 가라앉힙니다.
206. 민중들의 고통이 클 때 나타났던 참요 “미나리는 사철이고, 장다리는 한철이라.” 이 노래는 장희빈이 권세를 잡고 횡포를 부리던 때에 불리던 참요(讖謠)입니다. 장희빈은 장다리처럼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고, 결국은 인현왕후가 승리할 것을 암시한 내용입니다. 참요에는 신라의 멸망과 고려의 건국을 예언했다는 ‘계림요’, 이성계의 혁명을 암시한 ‘목자요’, 단종의 복위운동을 암시했다는 ‘순흥요’, 연산군에 대한 항거를 나타낸 ‘사모요’ 따위가 있었습니다. 참요는 주로 아이들이 부르는 동요의 하나인데 하늘의 뜻을 대변하고, 노래에 예언의 능력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참요는 정치적인 뜻으로 퍼드린 것도 있고, 순수 동요를 일방적으로 해석한 것도 있다고 합니다. 또 참요는 정권의 대변동이 있을 때나 민중이 심하게 고통을 받을 때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경제적으로 고통을 받는 서민들이 많은 지금도 참요가 나타날 수도 있겠습니다.
205. 24절기의 마지막 대한(大寒) 오늘은 24절기의 마지막인 대한이며, 대한 때의 마지막 날은 절분(節分)이라 하여 계절적으로 한 해의 마지막날이라 생각합니다. 또 절분날 밤을 해넘이라 하여, 콩을 방이나 마루에 뿌려 악귀를 쫓고 새해를 맞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 날 세끼 중에 한 끼는 꼭 죽을 먹었는데 나무나 한두 짐씩 하는 것 말고는 대부분 일하지 않고 쉬는 때이므로 삼시 세 끼 밥 먹기가 죄스러워 그랬다고 전합니다. 대한 뒤 5일부터 입춘 전 3일까지 사이를 신구(新舊)간이라 하는데 제주도에서는 이사나 집수리 등 집안 손질은 언제나 신구(新舊)간에 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추운 엄동설한입니다. 주변엔 연탄불도 제대로 피우지 못하여 냉골인 방에서 혹한을 견뎌야 하는 어려운 이들이 있습니다. 나 한 사람의 등이 따뜻하면 남의 고통에 눈을 감는 이기심보다는 어려운 이들과 고통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우리 겨레문화의 정신입니다.
★ 생활한복 대님 묶는 법
204. 영조임금 때는 흰옷을 입지 못하게 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사람들의 사치가 심하여 이를 금하곤 했습니다. 빨강, 파랑, 자주, 짙은 빨강, 짙은 소방색(새빨강), 황단(黃丹), 지자(支子)의 일곱 색을 금했는데 황단, 지자는 정확히 무슨 색인지 모릅니다. 또 세종임금 때는 회색이 옥색에 가깝다는 이유로 승복에도 회색을 금했습니다. 회색도 보기에 따라서는 고급스러운 색이라 하겠습니다. 조선 후기에 사치가 극심하자 고관들의 길복(吉服:삼년상 뒤에 입는 옷)을 파랑색으로 통일하고, 여자옷과 머리장식을 새롭게 정하였으며, 중국에서 들어오는 화려한 무늬의 비단을 금하였습니다. 또 영조 14년(1738년)에는 흰옷이 비경제적이라 하여 못 입게 하고, 국산의 파랑색 무명옷을 입도록 했습니다. 그런 기록을 보면 서민들이 염색한 옷감을 살 수 없어서 흰옷을 입었다는 것보다는 우리 겨레가 흰옷을 참 좋아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참고:한국복식문화사전,김영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