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 200번째에 다가서는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2004년 갑신년 한해도 저물었습니다. 올 6월 4일 ‘넥타이를 매고, 건강을 잃고’란 제목으로 를 시작한지 벌써 185번째입니다. 어떤 때는 바쁜 일 때문에 허둥대기도 했지만 글을 기다리는 분들의 기대가 있었기에 게으름 필 수가 없었습니다. ‘푸른솔시장’과 민족문화 누리집 ‘솔아솔아푸르른솔아’ 그리고 다음의 ‘밥따로 물따로’, ‘한국의 재발견’ 카페에 같이 한 것입니다. 글들은 유익하면서 재미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여러 가지 자료를 더듬어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자라는 글인데도 많은 분들이 읽어주셨고, 댓글로, 전자편지로 격려를 주셨기에 오늘이 있었습니다. 지금에 만족하지 않고, 제가 할 수 있는 이 작은 노력을 은인들의 도움에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하며, 을유년 새해에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184. 세밑, 고통받는 이웃을 위한 ‘담치기’ 풍속 갑신년 한해가 벌써 저뭅니다. 올해는 정말 많은 서민들이 고통 속에서 지낸 한해였습니다. 그런 해를 마감하면서 저는 올바로, 또 더불어 잘 살았는지 반성을 해봅니다. 섣달 그믐날 아이들의 세시풍속 중 “담치기”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풍물을 치면(애기풍장) 어른들은 쌀이나 잡곡을 내주었습니다. 이를 자루에 모아 밤중에 노인들만 계신 집, 환자가 있거나, 쌀이 없어 떡도 못하는 집들을 찾아다니며, 담 너머로 던져주곤 합니다. 누가 던져 넣었는지 아무도 몰랐고, 알고도 모른 채했습니다. 이웃의 고통을 나눠가지려는, 그러면서 드러내지 않고 숨어서 하는 아이들의 따뜻한 마음이겠지요. 옛 아이들의 이런 세시풍속을 오늘에 되살리면 얼마나 좋을까요? 구세군 냄비에 천만 원짜리 수표를 넣으면서 한사코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했다는 말을 들으며 우리는 흐뭇해집니다.
183. 옛날엔 어두운 밤길을 어떻게 다녔을까요? 요즘 도심은 밤에 가로등, 보안등 따위가 켜있고, 손전등도 있어서 어두운 길을 잘 다닐 수가 있습니다. 또 먼 길은 자동차의 앞등을 켜고 다니기 때문에 별로 불편하지 않게 다닙니다. 그런데 가로등도 없고, 손전등, 자동차도 없던 옛날엔 어떻게 다녔을까요? 예전엔 촛불로 켜는 초롱을 들고 밤길을 다녔습니다. 초롱은 대오리(대나무를 가늘게 쪼갠 댓개비)나 쇠로 살을 만들고, 겉에 종이나 붉고 푸른 비단을 씌워 그 속에 촛불을 켭니다. 걸어놓거나 들고 다니는데 [동국세시기]에 보면 수박등, 연꽃등, 수복등, 태평등, 종등 따위로 종류가 많았습니다. 또 종로의 등 파는 집에는 오방색의 아름다운 등들을 팔았다고 합니다. 특히 포도청의 나졸들이 밤거리를 순찰할 때에 들고 다니던 조족등(照足燈:발을 비추는 등)이란 것도 있었는데 발만 비추면(?) 도둑은 어떻게 잡았는지 모릅니다. 물론 밤중 뒷간에 갈 때도 초롱을 들고 가서 옆에 두고 일을 보았습니다.
182. 겨울철의 별식, 무밥 무를 이용한 음식, ‘무밥’은 김장 뒤에 남은 무를 이용한 별식입니다. 솥에 물을 적게 부은 다음 무를 비교적 굵게 채 썰어서 쌀 위에 얹어놓고, 보통처럼 밥을 짓습니다. 밥이 다 되면 미리 준비해둔 양념간장을 끼얹어 비벼가면서 먹는데 양념장은 진간장에 파, 마늘, 깨, 참기름, 고춧가루를 넣어 만듭니다. 달래나 부추를 넣으면 더욱 좋겠지요. 이 별미음식은 곱돌솥에서 지어 솥 째 내어놓으면 더 좋습니다. 그 외에 무엿, 무떡, 무나물도 별미입니다. 무에는 당질과 무기물, 비타민C, 라이신 따위가 많이 들어있어서 좋습니다. 또 많이 들어있는 아밀라아제(amylase)는 당질의 소화를 돕습니다. 예전엔 ‘무우’가 표준말이었으며, 북한에선 지금도 ‘무우’가 문화어(북한의 표준말)입니다. 무슨 짓을 몰래 하다가 들켜서 몹시 무안해함을 말하는 ‘무 캐다 들킨 사람 같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181. 애매모호와 처갓댁은 중복된 말로 잘못입니다. 텔레비전에서 한 아나운서가 “애매모호”라고 합니다. ‘애매’는 일본식 한자 “曖昧(あいまい)”를 그대로 쓴 것이며, 모호는 우리식 한자말 ‘模糊’입니다. 두 말이 같은 뜻이기에 중복으로 잘못된 말입니다. 차라리 우리말 ‘어정쩡하다’, ‘꺼림직하다’, ‘흐릿하다’로 하면 좋을 것입니다. 또 한 신문에는 ‘처갓댁’이라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이 말은 ‘아내의 집’이란 뜻의 ‘처가’와 ‘집’이란 뜻의 ‘댁’이 붙은 것인데 역시 중복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역전앞’이란 말을 씁니다. ‘역전(驛前)’ 즉 ‘역 앞’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앞’이란 말이 두 번 쓰였습니다. 역시 잘못된 말이지요. 사람들은 대개 12년 이상 학교에서 국어를 공부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기본적인 말도 잘못 쓰는 것은 문제입니다. 그런 구별도 못한 채 말글생활을 한다면 문맹과 무엇이 다를까요? 말글생활도 스스로 품위를 지키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80. 조용히 보시하는 노스님의 마음 잡지 2005년 1월호에는 효림스님의 글이 나옵니다. “달빛이 희미한 그런 밤, 노스님은 진작부터 곳간 문 열리는 소리, 쌀 퍼담는 소리, 부스럭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슬며시 일어나 밖으로 나가보니 비쩍 마른 한 사내가 아마 허기진 탓일 것입니다. 쌀 한 부대를 가지고 비비적댈 뿐 지게 발을 땅에서 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발소리도 없이 가만히 뒤로 돌아간 스님은 쌀 지게를 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돌아보는 사내에게 빨리 가라는 손짓만 하였습니다.” 보통 사람이면 “도둑이야”하고 소리를 질렀을 것을 노스님은 그냥 지게를 밀어주고, 가라고 손짓만 하십니다. 그런 마음으로 살고, 보시할 사람이 그립습니다. 보시를 하면 그 은덕이 모두 내게 다시 돌아온다고 하는데 이 어려운 시절 우리는 배달겨레의 철학인 까치밥을 남기고, 고수레를 하는 따뜻한 마음이 새삼 그리운 때입니다.
179. 성탄절에 생각하는 예수신앙과 미륵신앙 오늘은 예수님이 구세주로 오신 성탄절인데 온 세계가 예수의 탄생을 기뻐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도 예수처럼 미륵이 오실 거라고 믿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미륵신앙은 미륵보살이 사는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것과, 말세인 세상을 구하러 미륵이 오시기를 바라는 것의 2가지입니다. 어쩌면 기독교 신앙과 비슷합니다. 신라와 백제에서 국가 통치 이념으로 나타난 미륵신앙은 후삼국시대 궁예가 흉흉한 민심을 타고 자신이 미륵이라 하여 한때 사람들의 호응을 얻습니다. 또 근세 우리나라에서 생긴 증산교 및 용화교 등도 미륵신앙이라고 합니다. 고려말 향나무를 갯벌에 묻으며 미륵이 오시기를 기다렸던 침향의식이나 드라마 장길산에서 나온 미륵신앙을 보면 서민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으며 살았는지를 짐작하게 됩니다. 이제 서민들에게 예수님이 오시고, 미륵님이 오셔서 모두에게 복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178. 겨울에 쓰는 방한모, 남바위 살을 에는 바람이 가슴을 파고듭니다. 지금은 차를 많이 타고 다니지만 예전엔 주로 걸어서 다녔기에 더 추웠을 것입니다. 그런 옛날 ‘남바위’는 추위를 막기 위하여 머리에 쓰는 쓰개였는데 ‘풍뎅이’, ‘난이(暖耳)’, ‘이엄(耳掩)’이라고도 했습니다. 부인용 남바위는 자수와 구슬 등으로 장식하였고, 재료로는 비단, 명주, 족제비 가죽, 쥐 가죽, 수달피 가죽 따위를 썼다고 합니다. 조선 초기부터 썼으며, 지배층 사람들이 쓰다가 점차 서민들도 썼습니다. 조바위, 아얌은 남바위가 변형된 것입니다. 또 요즘은 간편화된 전통혼례에 하얀색의 아얌을 족두리 대신으로 쓰기도 합니다. 요즘 서민들의 삶은 고통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끼니를 잘 때우지도 못하며, 전기, 가스가 끊겨 떨며 지내는 사람들도 있고, 아파도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때에 서민들에게 남바위 같은 따뜻한 그 무엇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177. 하층민의 놀림감이 된 양반, 양반선비마당 "헤헤헤, 난도 아는 육경 그것도 모르니껴. 팔만대장경, 중의 바라경, 봉사의 앤경, 약국의 길경, 처녀의 월경, 머슴의 세경 말이시더-" 이것은 중 ‘양반선비마당’에서 초랭이가 양반과 선비를 놀리는 대목입니다. 는 경북 안동시 하회마을에 이어 오는 민속가면극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중 양반선비마당은 양반과 선비가 서로 자기의 지체가 높고, 학문이 깊다고 다투다 백정이 소불알을 ‘양기에 좋다’고 하자 서로 차지하기 위해 싸우다 양반들이 하층계급 사람들에게 놀림감이 되는 마당입니다. 또 그를 통해 신분과 학식을 내세워 군림하는 당시 지배계층들을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서민들의 억눌린 감정과 불만을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혹시 그런 불만이 있는 분들은 우리의 전통 탈놀이들을 보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