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산 남쪽 기슭에는 높은 축대가 있어, 시간을 맡은 인형 하나가 붉은 비단옷 차림으로 산을 등지고 섰으며, 인형 무사 셋은 모두 갑옷 차림인데 하나는 종과 방망이를 잡고서 서쪽을 향해서 동쪽에 섰고, 하나는 북과 부채를 잡고 동쪽을 향해 서쪽에서 약간 북쪽으로 가까운 곳에 섰고, 하나는 징과 채쭉을 잡고 동쪽을 향해서 서쪽에서 약간 남쪽으로 가까운 곳에 서 있어서, 매양 시간이 되면 시간을 맡은 인형이 종 치는 인형을 돌아보고, 종 치는 인형도 인형을 돌아보면서 종을 치게 되며, 매경(每更)마다 북과 부채를 잡은 인형이 북을 치고, 매점마다 징과 채를 잡은 인형은 징을 치는데, 서로 돌아보는 것은 종 치는 인형과 같으며, 경ㆍ점마다 북 치고 징 치는 수효는 모두 보통 시행하는 법과 같다.” 이는 《세종실록》 세종 20년(1438) 1월 7일 치 기록으로 이날 완성한 흠경각(欽敬閣) 옥루(玉漏)에 대한 설명입니다. 흠경각은 조선시대에 자동 물시계를 설치해서 운영한 경복궁 내부의 전각인데 《세종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흠경각은 장영실(蔣英實)이 세운 것이나 그 규모와 제도의 묘함은 모두 임금의 결단에서 나온 것이라도 되어 있습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홍천 괘석리 사사자 삼층석탑 - 이 달 균 사자도 절간에 오면 할 일이 있나보다 소신공양 좋다지만 몸 공양도 거룩하다 짊어진 말씀이 서 말 닷 되 하늘이 다 노랗다 두촌면 괘석리를 몸 하나로 옮겨와 읍사무소에 세웠으니 청사가 곧 절이다 부처님 경전 펼쳤으니 미륵세상은 곧 온다 이 석탑은 원래 두촌면 괘석리에 있었다 한다. 그곳을 먼저 찾아보니 주변은 경작지로 변해 있고, 기와 조각들이 흩어져 있는 것 외에 별다른 흔적이 없다. 석탑이 선 곳은 홍천읍사무소 앞마당이다. 다른 시선으로 보면 이 석탑은 가장 중생과 가까운 곳에 있다. 굳이 을씨년스럽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석탑 선 곳이 종일 경적소리 들리는 곳인데 이 또한 범종소리로 고쳐 들으면 되지 않을까. 비록 석탑의 각 부에 다소간 파손이 있고 부분적으로 마멸 흔적이 있으나 4좌의 석사자 모습이 그런대로 형태를 갖춘 것만 해도 다행한 일이다. 네 마리 사자는 투박한 연꽃을 새긴 기단 위에 뒷다리는 구부리고 앞다리는 세운 채 다소곳이 앉았는데, 위엄보다는 소박하고 질박한 아름다움이 있다. 고려 초기 탑으로 추정한다.(시인 이 달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스물셋째 소한(小寒)입니다. 소한 무렵은 정초한파(正初寒波)라 불리는 강추위가 몰려오는 때지요. 이름으로만 봐서는 작은 추위라는 뜻이지만 실제 보름 뒤에 오는 대한보다 더 추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대한이 소한 집에 가서 얼어 죽는다.”, “소한 추위는 꾸어다가도 한다.”, “춥지 않은 소한 없고, 포근하지 않은 대한 없다.”, “소한의 얼음이 대한에 녹는다.” 같은 속담이 있을 정도입니다. 농가에서는 소한부터 날이 풀리는 입춘 전까지 약 한 달 동안 혹한(酷寒)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해둡니다. 눈이 많이 내리는 지방에서는 문밖 나들이가 어려우므로 땔감과 먹을거리를 집안에 충분히 비치해 두어야 했지요. 이때는 음의 기운이 왕성한 계절로 여름철 뜨거운 땡볕에 양기로 영근 쌀을 먹어, 모자란 양기를 보충합니다. 그런데 이때 우리 겨레는 쌀을 단단하게 굳혀 가래떡으로 만들고 이 가래떡으로 떡국을 해 먹습니다. 바로 양기를 더욱 응축시켜 먹는 슬기로움이지요. 또 겨울철은 단백질을 섭취하기 어려운 계절입니다. 따라서 이때는 콩을 이용해 부족한 단백질을 보충하는데 콩이 땀을 내주는 성질이 있어 찬 바람을 쐬고 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만리창파에 한 몸 맡겨 원수의 배 속에 앉았으니 뉘라 친할고. 기구한 세상 분분한 물정 촉도(蜀道, 중국 사천성 촉 지방으로 통하는 험난한 길)보다 험하고 태나라보다 더욱 무섭구나. 종적 감추어 바다에 뜬 나그네 그 아니 와신상담하던 사람 아니던가. 평생 뜻한바 갈길 정하였으니 고향을 향하는 길 다시 묻지 않으리.” 이는 독립운동가 김지섭 의사가 쓴 시입니다. 96년 전인 1924년 1월 5일은 김지섭 의사(1884.7.21. ~ 1928.2.20.)가 일본 도쿄 한복판 일왕이 사는 황거 앞 이중교(二重橋-니쥬바시, 일명 안경다리)에서 황거를 향해 수류탄 3개를 던진 날이지요. 당시 수류탄의 불발로 거사는 실패했지만 황거를 폭파하려는 조선 청년의 의거에 일제는 깜짝 놀랐고 바로 코앞의 경시청 경찰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습니다. 김 의사는 현장에서 붙잡혀 재판을 받았는데 결국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요. 그러나 “조선 사람은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최후의 한 사람, 최후의 순간까지 항쟁할 것이다. 사형이 아니면 나를 무죄로 석방하라.”라며 변호사의 상고를 말릴 정도로 당당했습니다. 그 뒤 복역 중 김지섭 의사는 1928년 2월 20일 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2011년 제정된 이래, 어느덧 연말마다 우리나라 다큐멘터리사진계에 가장 큰 화제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한 <온빛상>. 지난 11월 23일, 어느 해보다 출품작들의 평균 수준이 높아 마지막 5인을 뽑기까지의 경쟁이 몹시 치열했다는 소문 끝에 2019년 온빛수상자들이 발표되었다. 5명의 수상자는 김동우, 박준수, 신병문, 정성태, 조진섭으로, ‘최우수상’은 신병문의 <갯벌>이, 후지필름일렉트로닉이미징코리아에서 후원하는 ‘뉴플랫폼상’은 김동우의 <뭉우리돌을 찾아서>가 받았다. 신병문의 <갯벌>은 ‘하늘에서 본 우리 땅의 새로운 발견’이라는 주제로 우리 국토의 여러 면면을 상공에서 기록해 온 작가가 수년간 찍은 갯벌의 모습이다. 신병문은 우리나라 사진가로서는 드물게 항공촬영 방식을 고수하여, 해당 분야에서 독보적인 자리매김을 해나가고 있는 사진가다. “이 땅의 아름다움과 지리적 특성,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남다른 시각으로 보여주고 싶은 소명과 사명감을 가지고 작업하고 있다. ”는 것이 수상자의 말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갯벌의 모습은 우리가 육지에 서서 육안으로 바라보는 풍경과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488년 정월 대보름에 소지왕이 천천정(天泉亭)으로 행차하였다가 쥐가 사람소리로 까마귀를 따라가라 하여 무사에게 뒤쫓게 하였다. 무사가 까마귀를 쫓아 남쪽 피촌(避村)에 이르자 까마귀는 사라지고 연못에서 한 노인이 나와 봉투를 올렸다. 그 겉봉에는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라고 씌어 있었다. 일관(日官)이 두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요, 한 사람은 임금을 뜻한다고 하며 임금에게 봉투를 열어볼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봉투를 열자, 그 안에는 '거문고갑[琴匣]을 쏘라'는 글이 씌어 있었다. 왕이 활로 거문고갑을 쏘니 그 안에서 궁주(宮主)와 승려가 정을 통하다 나왔다.” 이는 《삼국유사》의 ‘사금갑(射琴匣)’ 설화로 이처럼 옛사람들은 쥐가 예지력을 가진 동물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2020년 올해는 경자년(庚子年), 쥐의 해입니다. 쥐는 십이지에서 첫 자리를 차지하는 동물로 방위의 신이자 시간의 신이지요. 쥐는 예로부터 풍요ㆍ다산ㆍ근면ㆍ지혜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래서 쥐띠해에 태어난 사람은 재물복과 영특함, 부지런함을 타고난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의인화해 관직을 붙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이 바로 섣달 그믐날 저녁이니, 자연히 감개가 무량합니다. 저는 바야흐로 추위를 참느라 신음을 토하면서 혼자 앉아 매우 무료하게 보내고 있었는데, 홀연히 인편을 통해 형이 보낸 편지를 받게 되니, 두 눈이 갑자기 확 뜨이면서 너무나 반가웠습니다.(가운데 줄임) 보내 주신 시고(詩稿)를 읽으면서 품평을 하려면 인편이 돌아가는 것이 다소 지체될 듯하기에, 우선 이를 보류해 두었습니다. 저의 기량을 다하여 악필(惡筆)로 끼적거린 뒤에, 송구영신하는 정초(正初)가 되었을 때, 신년에 만나 악수하는 기쁨과 맞먹는 즐거움을 드리고자 하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는 《매천집(梅泉集)》 에 나오는 매천 황현(梅泉 黃玹 1855~1910)의 글입니다. 매천이 말한 섣달그믐은 음력이었을 테지만 양력 섣달그믐날인 오늘에도 매천의 이 글이 더욱 뜻깊게 생각됩니다. 《매천집》은 《매천야록(梅泉野錄)》과 함께 황현이 남긴 글로 《매천야록》은 1864년부터 1910년까지 47년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한 역사서라면 《매천집》은 시문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매천의 그 유명한 절명시(絶命詩) 4수도 여기에 실려있지요.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함양 승안사터 삼층석탑 - 이 달 균 명산 있는 곳에 명찰이 있었고 명찰 있는 곳에 손 모은 탑 있었다 품을 것 다 품은 산이 지리산 아니던가 고려 적 한 석공은 부처님 부름으로 몸돌엔 사천상을, 머리 쪽엔 부용꽃을 미려한 부조 새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바쁜 길손이여 시절이 분주해도 이곳 지나거든 눈길 한 번 주고 가소 승안사 잊혀진 이름, 석탑 하나 의연하다 승안사터는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에 있다. 자세히 눈길 주면 섬세한 석공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 두 개의 기단이 3층 탑신을 받치고 있는데 맨 아래 기단부엔 연꽃 조각을 새겨 둘렀고, 두 번째 기단부에는 부처, 보살, 비천상을 새겼으며 탑신 1층 몸돌 4면엔 남방ㆍ북방ㆍ서방ㆍ동방의 사천왕상을 돋을새김(부조)해 놓았다. 사천왕상은 절 일주문에서 흔히 본 과장되고 험상궂은 모양이 아니라 미소 띤 동자상처럼 친근한 모습을 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몸체 굴곡 또한 부드럽고 풍성하게 돋을새김(양각)하여 표정이 살아 있다. 현재 석탑은 원래 있던 자리에서 두 번 옮겨 세웠다고 하는데 이웃한 곳에 고려 시대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석탑이 그러하거늘 석조여래좌상인들 우여곡절이 없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