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유교 경전의 하나인 《주례(周禮)》를 보면 떡 가운데 인절미를 가장 오래전부터 먹어왔다고 하며, ‘인절미는 찰지면서 쫀득하여 떡의 으뜸으로 여긴다.’라고 나옵니다. 인절미는 “인절병(引切餠)”이라는 또 다른 이름도 있는데 차진떡이라 '잡아당겨 끊는다'라는 뜻에서 붙여졌다고 하지요. 그 종류로는 대추인절미, 깨인절미, 쑥인절미, 차조인절미, 동부인절미, 감인절미, 석이인절미 따위가 있습니다. 인절미로 가장 유명한 지방을 꼽으라면 당연히 황해도 연백인데 계산할 때에 숫자가 맞으면 “연안백천인절미”라고 소리친다고 하지요. 인절미의 이름에 관한 속설을 보면 조선 인조임금이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 공산성으로 피란 갔을 때 지었다고 합니다. 임씨라는 농부가 찰떡을 해 임금께 바쳤는데 그 떡 맛이 좋고 처음 먹어 보는 것이어서 임금이 신하들에게 “절미로구나, 이 떡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었는데,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지요. 그래서 “임 서방이 절미한 떡”이라 하여 “임절미”라 한 것이 “인절미”로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인절미는 혼례 때 상에 올리거나 사돈댁에 이바지로 보내는 떡입니다. 찰기가 강한 찹쌀떡이기에 신랑신부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아이고 나 못 살것다! 이얘 방자야 너와 나와 우리 결의형제 하자. 야, 방자 형님아, 사람 좀 살려라!” “도련님, 대관절 어쩌란 말씀이오?” “여보게, 방자 형님, 편지나 한 장 전하여 주게.” 존귀하신 도련님이 형님이라고까지 허여노니, 방자놈 조가 살짝 낫든 것이었다. “도련님 처분이 정 그러시면, 어디 편지나 한 장 써줘 보시오. 일 되고 안 되기는 도련님 연분이옵고, 말 듣고 안 듣기는 춘향의 마음이옵고, 편지 전하고 안 전하기는 소인놈 생각이오니 편지나 한 장 써줘 보시오.” 판소리 춘향가 가운데 ‘이도령 편지’ 대목의 아니리(판소리에서 소리와 소리 사이에 가락을 붙이지 않고 이야기하듯 줄거리를 설명하는 것) 대목이다. 대전시무형문화재 제22호 판소리 춘향가 보유자 고향임 명창의 이 대목에서 객석의 청중들은 자지러진다. 어제 12월 10일 낮 1시 30분부터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열린 “2019년도 고향임 명창의 춘향가 완창” 공연에서 있었던 일이다. 소리꾼 한 사람이 한바탕 전체를 소리하는 ‘완창판소리’. 판소리는 매우 긴 줄거리와 독특한 기교 때문에 짧은 기간에 익힐 수가 없는 고도의 예술장르인 것은 물론 한 마당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한일 무역 분쟁으로 중국만 살판났다”, “MB정부 기간 동안 가계는 곪고 기업만 살판”, “불난 집에 도적이 살판난다.” 같은 기사 제목이 보입니다. 여기서 ‘살판’이란 말은 무엇을 말할까요? 살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재물이 많이 생기거나 좋은 일이 거듭되어 살림이 좋아지는 판국” 또는 “기를 펴고 살아나갈 수 있는 판”이라고 풀이합니다. 다시 이 말의 유래를 백과사전에서 살펴보면 “광대가 몸을 날려 넘는 땅재주”를 말하고 ‘지예(地藝)’또는‘장기(場技)’라고도 하지요. 이것은 유랑 연예집단이던 남사당패와 솟대쟁이패들이 하던 놀이종목의 한 가지입니다. 남사당패 12가지의 땅재주 가운데 제일 마지막 재주로 땅재주의 기본을 이루지요. 이 놀이의 재주는 앞곤두ㆍ뒷곤두ㆍ번개곤두ㆍ외팔곤두ㆍ앉은뱅이팔걸음ㆍ앉은뱅이모말되기ㆍ숭어뜀ㆍ살판 따위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놀이는 큰 위험이 따르기 때문에 이를 벌이는 연예인들이‘잘하면 살판이지만 못하면 죽을판’이라고 한 데서 따온 것으로 그들 스스로 한탄하며 부르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살판은 서양의 “아크로바틱(acrobatic)” 또는 비보이들이 추는 브레이크댄스(Break dance, B-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얼마 전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다가 답답한 생각이 든 적이 있습니다. 그건 출연자들이 “너무 예뻐요.”처럼 “너무”라는 말을 마구잡이로 쓰고 있었고, 더 기가 막힌 것은 말글살이의 표본이 되어야 할 아나운서도 “너무 앙증맞죠?”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라는 말을 말광(사전)에서 찾아보면 “너무 : 【어찌씨(부사)】 정도나 한계에 지나치게.”라고 되어 있지요. 예문으로는 “할 일이 너무 많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장소가 너무 멀다.”라고 나옵니다. 그렇다면 ‘예쁘다, 앙증맞다’ 따위 긍정적인 말 앞에 어찌씨 “너무”를 쓰면 그 말뜻은 예쁘고 앙증맞아서 좋지 않다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습니다. “너 오랜만에 보니까 너무 예뻐졌다.”라고 하면 결국 “예뻐져서 안 좋다.”라는 뜻이 되어 비아냥거리는 말로 들릴 수 있지요. 물론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라.”라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어쨌든 학교에서 국어를 12년 이상 배운 사람들로서 “너무”라는 말을 함부로 쓸 일은 아닙니다.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기 직전 이경숙 당시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이 “미국에서 오렌지라고 말하면 아무도 못 알아듣는다, ‘어륀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정읍 천곡사터 칠층석탑 - 이 달 균 언제부턴가 여인은 선 채로 탑이 되었다 가녀린 어깨와 앙상한 허리선 한 편의 간결한 시(詩)처럼 묵상에 들었다 정읍시 망제동엔 빼빼 마르고 키 큰 여인을 닮은 탑이 서 있다. 바로 7.5m에 이르는 천곡사터 칠층석탑이다. 여인을 연상시킨다고 하나 부드러움과 섬세함, 탐미적 자태와는 다른, 기원에 오로지한 야윈 모습에 나그네도 덩달아 무념에 든다. 처연한 그림자 아래서 까닭 모를 갈증에 시달린다. 하루가 저무는 시간에도 오래 묵상에 든 탑은 군살 빼고 미사여구도 빼고 그저 부처님 향해 하늘로 솟아 있다. 허리를 지탱하는 몇 개의 길쭉하고 간결하게 짜 맞춘 장대석으로 인해 그런 느낌이 더 하다. 앙상한 외형에 비해 옥개석은 두껍고 둔중하여 그리 조화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런 고졸한 모습이 더 고려탑답다고나 할까. 껑충한 탑을 가운데 두고 초록 수풀은 하늘에 닿는다. (시인 이달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2008년 11월 한 60대 재미교포가 문화재청에 “내가 고종이 쓰던 국새를 소장하고 있다. 이를 구입하겠느냐?”라는 문의를 해왔습니다. 당시 정계옥 국립고궁박물관장은 “기존 문헌에 제작 기록이 없어 고종이 내밀하게 썼던 국새로 파악된다.”라며 사들였습니다. 이 국새는 고종황제가 친서에 썼던 현존하는 유일한 대한제국 시대의 국새며,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소장자료에 유리원판 사진으로만 전해지던 분실된 바로 그 국새였다고 합니다. 황제어새는 1905년부터 1908년까지의 외교문서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며,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보물 제1618-1호 황제어새는 1903년 이후 고종황제가 러시아, 독일, 이탈리아 황제 등에게 보낸 14통의 친서에 실제로 날인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1903년 11월 이탈리아 군주에게 전쟁이 일어날 때 대한제국은 중립을 지킬 것이며 이러한 입장을 지지해주도록 요청하는 친서와 1904~1905년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4통의 친서 그리고 1909년 헐버트 박사에게 비밀 자금 인출을 명령하는 친서에도 ‘황제어새’를 찍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국새는 상서원(尙瑞院)에서 보관과 관리하게 되는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대전문화재단(대표이사 박만우)은 오는 12월 10일 서울 서초구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대전시무형문화재 제22호 판소리 고향임 명창이 동초제 춘향가 8시간 완창공연을 연다고 밝혔다. 완창이란 판소리 한바탕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부르는 것으로, 이날 고향임 명창은 동초제 춘향가 8시간 완창무대를 선보여 한국 판소리계 최고령 최장 시간의 역사를 다시 쓰게 될 것으로 보인다. 고향임 명창은 동초제 판소리의 계승자로 특히 ‘춘향가’에 특장을 가졌는데, 이 동초제 춘향가는 판소리 가운데 가장 긴 8~9시간 분량이다. 초대 국립창극단 단장을 역임했던 동초 김연수(1907~1974) 선생이 정정렬, 송만갑, 유성준 등에게 소리를 배워 자기만의 독자적인 바디를 이룩한 소리제다. 동초제 춘향가는 풍부한 사설과 너름새, 통성을 중심으로 쓰는 소릿길을 가지고 있으며, 현대 판소리 중 연극적인 특징이 잘 살아있는 판소리라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동초제는 사설이 분명하여 청중에게 춘향가의 본맛을 잘 전달해줄 것으로 기대한다. 고향임 명창은 이미 지난 2009년 대전무형문화재전수회관에서 9시간 가까운 춘향가를 완창한 신화를 가지고 있다. 만 52살이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난 8월 14일 문화재청은 광화문 현판을 새로 고쳐 달면서 예전 그대로 “光化門”이란 한자를 고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흰 바탕에 검정 글씨로 된 것을 원래의 색상대로 검정 바탕에 금박 글씨로 바꾼다고 했다. 광화문 현판은 2010년 목재에 틈이 생기는 ‘갈램’ 현상이 생겨 바꾸기로 하면서 이렇게 결정한 것이다. 문화재청이 이렇게 결정한 배경에는 문화재의 복원은 원형에 따라야 한다는 원칙을 내세우고 있다. 이에 한글단체들은 크게 반발한다. 지금 다시 만들려고 하는 현판은 광화문을 처음 지었을 때 달았던 원래 모습의 현판이 아닌 고종 때 새로 지으면서 다시 훈련대장이 써서 붙인 글씨를 올리는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복원 아니라는 것이다. 더구나 서울 중심에서 한국을 상징하는 광화문 현판에 우리 글자가 아닌 중국 글자를 올리는 것은 민족 주체성에 크게 어긋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글학회 부설 한말글문화협회(대표 이대로)는 문화재청장에게 공개토론을 하자고 제안했지만 참석하지 않는다는 답변을 받았다며, 이에 문화재청장의 참석 여부에 상관없이 오는 12월 12일 저녁 4시부터 한글학회 ‘얼말글교육관’에서 “광화문현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내일은 24절기 가운데 스물한째 절기 “대설(大雪)” 입니다. 대설은 눈이 가장 많이 내린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절기의 기준 지점인 중국 화북지방(華北地方)의 계절적 특징을 반영한 것으로 우리나라는 이때 눈이 그리 많이 오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대설이 있는 이 무렵 음력 11월은 농부들이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새해를 맞이할 준비하는 농한기(農閑期)이기도 합니다. “올해는 봄부터 겨울까지 비가 부족하였는데, 지금은 또 대설(大雪)이 이미 지났는데도 눈이 내리지 아니하여 샘의 물줄기가 통하지 못합니다. 신이 일찍이 농사꾼에게 듣건대 ‘눈이 오면 토질의 맥이 윤택하여지고, 또 눈이 보리를 덮은 뒤에라야 보리농사가 풍년들게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옛적에는 눈이 오기를 빈 일이 있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거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송(宋)나라 때에도 눈을 빌었고, 또한 ‘납향(臘享, 동지로부터 세 번째의 양날) 안에 세 번 눈이 와야 한다.’라는 말이 있으니, 지금 눈을 빌도록 함이 어떠하리까?” 위는 《중종실록》 7년(1512) 10월 30일 기록으로 봄부터 비가 부족하고 대설이 지났는데도 눈이 내리지 않는다며 눈이 내리기를 비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생각건대, 신이 이곳으로 들어온 뒤에 한 숟가락의 쌀과 한 모금의 물도 모두 적의 손에서 나온 것이면, 설사 적이 신을 죽이지 않더라도 차마 구복(口腹, 먹고살기 위하여 음식을 섭취하는 입과 배)으로써 스스로 누가 되어서는 아니 되겠기에 마침내 음식을 물리쳐 옛사람이 스스로 죽어서 선왕에 보답한 의를 따를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신의 나이 74살이니, 죽어도 무엇이 애석하겠습니까?” 이는 면암 최익현이 대마도 유배 당시 임병찬에게 쓰게 한 유소(儒疏, 유생들이 연명하여 올리던 상소)에 나오는 말입니다. 의병연구소장 이태룡 박사에 따르면 당시 대마도 경비대장이 실내에서는 갓을 쓸 수 없다며 강제로 갓을 벗기려 하자 김홍집내각이 내렸던 단발령(斷髮令)에도 굴복하지 않았는데 왜놈 대장의 말대로 벗을 수는 없다며 왜놈들의 온갖 곤욕을 이겨내며 면암과 임병찬 등은 단식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틀 뒤 경비대장이 실내에서 갓 쓰는 것을 허락하였는데 이에 이들은 바로 단식을 중단하였습니다. 그 뒤 면암은 1906년 12월 4일, 대마도에서 음식을 먹으면 토하는 질병으로 인해 자리에 눕게 됩니다. 이에 가족들에게 알려 조선에서 한의사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