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971년 당시 대통령 박정희는 금관이 나올 것이란 말에 신라 무덤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무덤인 98호분(황남대총)을 발굴 조사하라고 지시합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이렇게 큰 무덤을 발굴한 경험이 없었던 고고학자들은 98호분과 약 130미터 떨어진 지점에 있는 155호분을 시험적으로 먼저 발굴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시험대상의 발굴 무덤에서 찬란한 신라금관은 물론 금제의 호화로운 허리띠와 천마도 등 무려 11,526점에 달하는 엄청난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금관은 출토된 다음날 청와대로 옮겼을 정도로 박정희 대통령이 흥분했다고 합니다. 유물이 발굴되면 보존처리를 먼저 해야 함에도 대통령이란 직책을 이용해 가져오라고 한 것이라 관심만 있지 지식은 없는 행위였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당시 발굴단을 비롯하여 학자들의 관심은 금관보다 말다래에 그려진 “천마도(天馬圖, 뒤에 국보 제207호로 지정)”에 있었습니다. 천마도는, 하늘로 화려하게 날아오르는 백마처럼 보이는 말 그림입니다. 말다래는 말의 발굽에서 튀는 흙을 막기 위해 안장 밑으로 늘어뜨리는 판이지요. 신라의 예술혼이 즈믄해(천년)의 긴 세월 동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찬 서리 /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 조선의 마음이여” 김남주 시인은 <옛 마을을 지나며>라는 시에서 이즈음의 정경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바로 추운 겨울이 다가왔다는 손짓이지요. 오늘은 24절기의 열아홉째 ‘입동(立冬)’, 무서리 내리고 마당가의 감나무 끝엔 까치밥 몇 개만 남아 호올로 외로운 때입니다. 이 날부터 '겨울(冬)에 들어선다(立)'라는 뜻에서 입동이라 부르는데 이때쯤이면 가을걷이도 끝나 바쁜 일손을 털고 한숨 돌리는 시기이며, 겨울 채비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입동 앞뒤로 가장 큰일은 역시 김장이지요. 겨울준비로 이보다 큰일은 없는데 이 때를 놓치면 김치의 상큼한 맛이 줄어듭니다. 큰집 김장은 몇 백 포기씩 담는 것이 예사여서 친척이나 이웃이 함께했습니다. 우물가나 냇가에서 부녀자들이 무, 배추 씻는 풍경이 장관을 이루기도 하였지요. 이것도 우리 겨레가 자랑하는 더불어 살기의 예일 것입니다. 김장과 함께 메주를 쑤는 것도 큰일 가운데 하나지요. 제주도에서는 입동날씨점을 보는데 입동에 날씨가 따뜻하지 않으면 그해 바람이 독하다고 합니다. 또 이때 온 나라는 음력 1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삼성리움미술관에는 보물 제1393호 <추성부도(秋聲賦圖)>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추성부(秋聲賦)”란 중국 송나라 때의 문인 구양수(歐陽修)가 지은 글로, 조선 후기의 화가 김홍도가 이를 그림으로 그린 것입니다. 그림 왼쪽에는 “추성부” 전체의 글이 김홍도의 글씨로 쓰여 있지요. 글의 끝부분에 ‘乙丑年冬至後三日 丹邱寫(을축년동지후삼일 단구사)’라 쓰여 있어 이 그림이 1805년 곧 단원이 죽기 한해 전에 그린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추성부도〉는 가을 소리를 그린 그림입니다. 그림에는 달창을 사이로 두고 밖에 서 있는 동자가 팔을 펼쳐 안에 앉아있는 남자에게 뭔가를 얘기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아마도 이 남자가 책을 읽는데 밖에서 소리가 들렸던가 봅니다. 처음에는 빗소리가 나다가 바람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폭풍우가 쏟아지는 듯 하다가 쇠붙이들이 한꺼번에 울리는 소리가 나자 동자를 불러 나가보라고 했나봅니다. 돌아온 동자는 “별과 달이 밝고 하늘에는 은하수가 걸려 있어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소리들은 나무숲에서 나고 있어요.”라고 합니다. 그렇게 밖에서 들리는 소리는 그저 가을의 소리일 뿐이지요. 집 주변 나무에는 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 겨레의 전통예술 가운데는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이며, 2013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오른 판소리가 있습니다. 소리꾼이 고수 장단에 맞추어 창ㆍ아니리ㆍ발림을 섞어가며 이야기를 엮어가는 극적 음악이지요. 본래 열두 마당이었으나 지금은 <춘향가>ㆍ<심청가>ㆍ<수궁가>ㆍ<적벽가>ㆍ<흥보가> 다섯 마당만 전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판소리가 우리의 대표적 전통예술로 자리 잡은 데에는 신재효(申在孝, 1812~1884)라는 인물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신재효는 우선 판소리 열두마당 가운데 <춘향가>, <심청가>, <토별가(수궁가)>, <박타령(흥부가)>, <적벽가>, <변강쇠가> 등 모두 여섯마당의 판소리 사설을 정리하면서 자기 나름으로 개작하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판소리 이론을 정립하고 비평 활동도 했는데 특히 인물, 사설, 득음, 너름새를 판소리의 4대 법례로 제시하고 또 역대 명창들의 특색을 비유의 방식으로 평가했지요. 또 신재효는 집안에 ‘노래청’을 만든 다음 수많은 명창들과 교류하였고 김세종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내 나이 18~19살 때 미중(美仲, 박지원) 선생이 문장이 뛰어나 명성이 자자하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백탑 북쪽에 있는 집을 찾아 갔다. 선생은 내가 왔다는 말에 옷도 채 걸치지 않고 반갑게 맞아주시며, 오랜 벗처럼 내 손을 잡으셨다. 지은 글을 모두 꺼내더니 읽어보라고 하시고, 손수 쌀을 씻어 밥을 하셨다. 흰 주발에 가득 담아 옥소반에 내오고, 술잔을 들어 나를 위해 건배하셨다.” 이렇게 약관(弱冠, 남자 나이 20살을 일컬음)도 안 된 나이의 박제가와 당시 32살 이었던 연암 박지원의 첫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연암은 어린 박제가의 학문을 높이 산 것입니다. 이렇게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은 그들은 서로 짧은 편지를 주고받습니다. 연암은 “(앞줄임) 내 급히 절하네. 많으면 많을수록 좋소. 또 호리병까지 보내니 가득 채워 보냄이 어떠한가?”라고 박제가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돈 좀 꿔달라는 얘기를 이렇게 빙빙 돌려서 얘기한 것입니다. 돈 꿔달라고 하면서 술병까지 보내는 장면은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그러자 박제가는 “열흘 장맛비에 밥 싸들고 찾아가는 벗이 되지 못해 부끄럽습니다. 200닢의 공방(孔方, 엽전)은 편지 들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 - 이 달 균 부석사 무량수전은 고려를 설법하고 소백산 안개는 석탑을 감싼다 열반한 큰 스님 얼굴 보였다 사라진다 부석사는 고려를 대표하는 목조 절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아 창건한 절이라 기록되어 있다. 무량수전 서쪽에는 부석(浮石, 일명 뜬바위)이 있는데 이 바위는 의상대사를 흠모하던 당나라 선묘(善妙)낭자가 변한 것이라는 전설이 있다. 원융국사는 1041년(정종 7)에 부석사로 들어와 화엄종통(華嚴宗統)을 이어받았고 입적할 때까지 부석사에 머물렀다고 한다.(시인 이달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가만히 들여다보니 돌에도 나이테가 있다 귀대고 들어보니 심장의 울림도 있다 선 채로 예불소리에 가지런히 손을 모은다 그 어깨 빌려 앉은 귀뚜라미 한 마리 절간에 왔다고 스님 독경 소리 따라 나직이 반야바라밀 읊조리다 목이 쉰다 이달균 시인의 제8시집 《열도의 등뼈》에 나오는 ‘석등과 귀뚜라미’라는 시다. 그렇게 시인은 돌의 나이테도 볼 수 있고, 돌의 심장 소리도 듣는다. 심지어 귀뚜라미조차도 스님 독경 소리 따라 나직이 반야바라밀 읊조리다 목이 쉰단다. 이게 이달균 시인이 도달한 경지다. 지난 2009년 사설시조집 《말뚝이 가라사대》를 펴내 주목을 받았던 이달균 시인(62)은 최근 도서출판 작가를 통해서 《열도의 등뼈》를 펴냈고, 이 시집으로 ‘2019 이호우ㆍ이영도 시조문학상’ 본상 수상자로 뽑혔다. 게다가 이 시집은 ‘2019세종문학나눔 우수도서’에도 뽑혔다. 그러나 시인은 쓸쓸한 자각도 읊조린다. 한 수의 시를 썼다 세상이 놀랄 것이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군 나의 나라에 백성은 나뿐이군(‘시인 2’ 전문) 어쩌면 나의 나라에 백성이 자신뿐이라는 것은 많은 시인들이 하는 독백일 수도 있다. 그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41년 전(1878년) 11월 3일은 의병대장 신돌석 선생이 태어난 날이지요. 신돌석 선생은 대한제국 말기의 평민출신 항일 의병장으로, 을미사변과 을사늑약 이후 경상도와 강원도 일대에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준 활약을 하였습니다. 선생은 19살의 나이로 동지들을 규합하여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타고난 용기와 담력으로 일본군과 대적할 때마다 큰 전공을 세웠고, 그에 따라 영해의병진의 중군장이 되었지요. 1906년 3월 13일 선생은 다시 의병을 일으켰는데 선생의 명성을 듣고 많은 청장년들이 몰려와 의병부대의 규모는 3,000여 명으로 커졌고 사기는 충천하였습니다. 선생은 의병부대를 이끌고 먼저 영해부근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을 격파한 뒤, 그 해 4월에는 울진 장흥관에 정박 중이던 일본 배 9척을 격침시켰습니다. 이후 선생의 의병부대는 동해안 일대와 경북 내륙지방, 강원도 내륙지방 등에서 일본군수비대와 여러 차례 격전을 벌여 크게 승리하였지요. 이에 따라 일본군은 선생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선생은 1907년 11월 이인영, 허위, 이강년 등 양반 유림이 중심이 되어 13도창의군을 결성할
[우리문화신문=글 김영조, 사진 최우성 기자] “아리랑은 한의 노래입니다. 그러면서 흥이 있고 우리 겨레에게 힘을 줍니다. 150년 전 경복궁 중건 때 울려 퍼졌던 우리의 아리랑은 이제 다시 경복궁에 울려 퍼집니다.” 어제 11월 1일 경복궁 흥화문 광장의 한국문화재재단(이사장 진옥섭)의 “아리랑고(告)” 행사에서 사회자 오정해 씨가 한 말이다. 공연 시작 전 오정해 씨의 아리랑 이야기는 한동안 계속된다. “1865~1872년 7년 동안 경복궁 중건 공사장에 아라리가 전파되어 부역자들과 대원군에 의해 동원된 서울선소리산타령패나 안성바우덕이패 같은 음악가들에 의해 형성된 아리랑이 오늘의 전국적 아리랑판도를 있게 한 역사적 사실인데 이를 오늘에 다시 경복궁에서 재현하는 것입니다.” 낮 2시 광화문, 전국에서 모인 40여개 전승자 단체 250여 명의 아리랑 전승자들의 아리랑행렬은 취타대를 앞세우고 채여와 함께 경복궁에 입성했다. 그리고는 채여에서 고유품들을 꺼내 고유단에 올린다. 고유품은 1865년 경복궁 중건 공사에 협조할 것을 권한 관찰사 <감결>, 호머 B.헐버트가 아리랑을 서양식 음계로 채보한 조선 시대 최초의 영문잡지 ‘Korean Vocal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어제 10월의 마지막날 저녁 7시 30분 한국문화의 집(KOUS)에서는 파격적으로 서도소리와 거문고가 만나 호흡하는 “서도소리와 거문고 서로에게 묻다” 공연이 열렸다. 서도소리는 장구나 피리 반주에 맞춰 공연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에서 거문고와 협연하는 것은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이날의 공연은 청중들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집중하도록 하는 매력을 품어 냈다. 그렇게 조합이 이루어진 것은 두 사람의 젊은 예인이 학창시절부터의 죽마고우인 까닭도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선뜻 모험하기 어려운 공연이 아니던가? 이번 공연의 배경에는 1930년대의 유성기와 SP음반이 있었다. 국악의 대중화와 보급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거문고 산조의 창시자 백낙준과 당시 서도소리 명창 이영산홍이 있었다. 그들의 음악을 오늘의 공연장에 류지선과 이신애는 불러낸 것이다. 관심을 집중시킨 건 두 번째 공연 ‘관산융마’였다. 지난 9월 4일 역시 한국문화의집에서 류지선의 스승 유지숙 명창은 복원 서도시창 ‘관산융마’를 최경만 명인의 피리 반주에 맞춰 공연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제자의 소리는 청출어람의 희망이 될 수 있을지 또 서도소리와 피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