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난 7월 23일 문화재청은 2007년 부여 왕흥사 목탑 터에서 발견되어 공개된 이후 2012년 보물 제1767호로 지정되었던 “부여 왕흥사터 출토 사리기(舍利器)”를 발견한 지 12년 만에 국보 제327호로 승격했다고 밝혔습니다. ‘사리기(舍利器)’란 부처의 사리를 모셔놓은 그릇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국보가 된 부여 왕흥사터 출토 사리기는 바깥부터 청동제 사리합-은제 사리호-금제 사리병 3겹으로 포개진 채 발견되었는데, 가장 바깥 사리기인 청동제 사리합에는 6줄 29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글의 내용으로 577년(정유년丁酉年) 2월 15일 창왕이 죽은 아들을 위해 왕흥사를 세우고 목탑에 사리기를 넣은 것으로 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백제 사리기로 확인되었지요. 이 사리기는 표면에 새겨진 글씨로 제작연대(정유년丁酉年, 577년)를 명확히 알 수 있음은 물론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리기로서 역사성과 희소성이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아울러 예술적인 면에서도 그 모양과 제작기법의 완성도가 높아 ‘검이불루화이불치(儉異不陋華而不侈)’ 곧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36년 전인 1883년(고종 20) 오늘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 <한성순보(漢城旬報)>가 창간된 날입니다. 한성순보는 서울 저동(지금의 을지로2가)의 통리아문(統理衙門) 박문국(博文局)에서 월 3회 발행한 순보(열흘 간격으로 발행)였지요. 1882년 박영효(朴泳孝) 일행이 수신사(조선 말 고종 때 일본에 보내던 사신)의 자격으로 일본에 가 머무르면서 국민대중의 계몽을 위한 신문 발행의 필요성을 깨닫고 신문제작을 위해 기자와 인쇄공 등 몇 명의 일본인을 데리고 돌아온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고종은 1883년 8월 17일 통리아문에 박문국을 설치하여 신문을 발행하도록 허락하게 됩니다. 이때 김인식(金寅植)이 신문 발행 실무책임자로 임명되었으며, 근대적인 신문기자의 전신인 주사(主事)와 사사(司事)를 임명했습니다. 이 신문은 ‘순보서(旬報序)’에서 “우리 조정에서 관청을 만들어 외국신문을 널리 번역하고 아울러 국내의 사건도 실어서 나라 안에 배포할 것”이라고 내세우고, “시세를 살펴 흐르지도 말고 빠지지도 말며 좋고 나쁜 것을 취사선택하여 도리에 맞게 구해서 바른 것(正)을 잃지 않는다면, 박문국을 개설하고 신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민속박물관(관장 윤성용)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사장 직무대리 김홍동)은 나라밖 박물관에 소장된 우리 문화재를 국내로 들여와 보존처리를 마치고 관람객들에게 최초로 공개하는 전시를 오는 10월 30일부터 내년 1월 27일까지 국립민속박물관〈새로운 자료와 보존처리〉 마당에서 연다. 이번에 전시되는 유물은 1909년 도미니쿠스 엔스호프(Dominicus Enshof, 1868∼1939) 신부에 의해 수집된 것으로, 오틸리엔수도원의 총아빠스(수도원장) 노르베르트 베버(Norbert Weber, 1870∼1956)가 1925년 한국 체류 당시 연출ㆍ제작한 무성기록영화 〈한국의 결혼식 Eine koreanische Hochzeitsfeier〉에 등장하는 신랑이 입었던 단령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2016년 실태조사를 통하여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선교박물관에 무성기록영화에 등장하는 신랑ㆍ신부의 혼례복이 소장된 것을 파악하였다. 그 중 신랑의 단령은 장기간 전시된 데다 박물관의 수장고 시설이 열악한 탓에 직물 손상이 매우 심해 보존처리가 시급한 상태였다. 이에 국립민속박물관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2018년 업무협약을 맺고, 국립민속박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0월 28일부터 29일 이틀 동안 문경 SRT리조트 대강의실에서는 한국문화재재단과 한겨레아리랑연합회가 ‘아리랑 전승자 워크숍’을 열었다. 오는 11월 1일 낮 2시 경복궁에서 열릴 ‘아리랑고(告)’를 준비하기 위한 아리랑 전승자들의 준비모임이었다. ‘아리랑고(告)’ 행사는 경복궁 중건공사1865~1872) 7년 동안 산악민요인 ‘아라리’가 전파되면서 새로운 통속민요 아리랑이 형성되어 오늘의 전국적인 판도를 이루었으며, ‘아리랑’이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에 오르고, 국가무형문화재 제129호 지정된 역사적 사실을 기리는 잔치다. 이날 열린 워크숍은 46개 전국 아리랑 전승 단체에서 150여 명이 모여 1박2일 동안 행사 취지 공유와 준비 사항을 점검하는 기회를 가진 것이다. 행사는 세 부분으로 이뤄졌다. 행사 취지 공유를 위한 특강, 행사 성공을 기원하는 고유문 서명, 공연 프로그램 논의 및 연습으로 이뤄졌다. 관심을 모은 것은 행사 취지를 공유하는 특강이었다.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의 “경복궁 중건과 아리랑 전파, 확산”, 김영운 국악방송사장의 “아리랑, 음악적 분포상과 그 계보”, 한국문화재재단 진옥섭 이사장의 “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전체 길이 8.5m에 이르는 보물 제2029호 ‘이인문 필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가 있습니다. 강산무진도는 18세기 후반~19세기 초 궁중화원으로 이름을 떨친 이인문(李寅文, 1745~1821)이 그린 긴 두루마리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끝없이 이어지는 대자연의 풍광을 묘사한 산수화지요. 하지만, 산수 그대로가 아닌 웅장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세상을 묘사한 관념적인 산수를 그린 것으로, 넓은 들판에서 시작하다가 우뚝 솟아오른 절벽이 보이는 앞부분과 험준한 산세가 중첩되어 광활하게 그려진 중간부, 그리고 다시 잔잔한 들판으로 연결되는 구성을 보여줍니다. 무엇보다 이 그림의 매력은 준법(皴法) 곧 동양화에서, 산악ㆍ암석 따위의 입체감을 표현하기 위하여 쓰는 모든 기법을 쓴데 있습니다. 곧 산이나 바위를 그릴 때 도끼로 팬 나무의 표면처럼 나타내는 부벽준(斧劈皴), 쌀알 모양의 점을 여러 개 찍어서 그리는 미점준(米點皴)등 다양한 동양화의 준법이 총동원된 그림이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변화무쌍하고 화려한 준법의 구사를 통한 산세의 묘사, 그리고 아주 작고 세밀하게 그려진 인물들의 꼼꼼한 표현이 어우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소주를 마신다 / 슬픔을 타서 소주를 마신다 / 사랑을 되새기며 소주를 마신다 / 배신을 안주삼아 소주를 마신다 / 소주를 마신다 / 인생을 풀어 놓고 / 고통을 참아가며 / 저주와 능멸을 버리기 위하여 / 소주를 마신다 / 소주를 마신다 / 가슴을 열고 환희와 행복을 / 찾기 위하여 소주를 마신다.” <소주 / 성기조> 우리가 흔히 소주(燒酒)라고 하는 것은 노주(露酒)ㆍ화주(火酒)ㆍ한주(汗酒)ㆍ백주(白酒)ㆍ기주(氣酒)라고도 하는데 증류주와 희석주로 크게 나눕니다. 이 가운데 증류주는 소줏고리라는 증류기로 증류한 술이며, 특이한 향을 강하게 풍기는데 조금씩 빚는 술로 예로부터 널리 마셔왔습니다. 일반 양조주는 알코올 도수가 낮아서 오래 두면 대개 식초가 되거나 부패하게 되는데, 이러한 결점을 없애려고 만든 것이 증류식 소주입니다. 현재 전통주의 맥을 이어오는 안동소주ㆍ개성소주ㆍ진도홍주ㆍ제주민속주 등이 그것이지요. 페르시아에서 발달한 증류법이 원(元) 나라와 만주를 거쳐 고려로 들어와 조선시대까지 이어서 발전해온 것입니다. 하지만, 희석식은 고구마나 타피오카 등의 원료를 발효시켜 정제한 주정(에틸알코올)에 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안동 법흥사터 7층석탑 - 이 달 균 더 높이 오르다보면 하늘에 가까워질까 하늘의 소리 들으면 기원은 이뤄질까 오가는 기적소리가 천년의 고요를 깬다 발목 땅에 묻고 그 세월 버텼으니 뿌리는 지층 뚫고 멀리 뻗어 내렸으리 안동 땅 휘돌아가는 낙강 나루 어디쯤 늠름히 높이 오른 7층 탑신에 비해 공간배치는 협소하고 불안하다. 선 채로 탑 구경하려니 어깨가 좁아 보인다. 사진 찍기도 영 마땅치 않다.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왜인들이 독립의 기를 끊고자 탑 옆으로 철로를 깔았다고 한다. 그래서 더 그러한지 갑갑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이 또한 운명임을 어쩌랴. 날개가 없으니 뿌리라도 뻗을밖에. 천년을 한곳에 서 있다 보면 분명 뿌리는 먼 곳까지 뻗어 있을 것이다. 낙동강 어느 한적한 나루에까지.(시인 이달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궁중에서 왕자가 태어나면 ‘권초의 예(捲草之禮)’라는 것이 있다. 곧 태어난 날 다북쑥으로 꼰 새끼를 문짝 위에 걸고, 자식이 많고 재화가 없는 대신에게 명하여 3일 동안 소격전(昭格殿, 조선시대에 도교 의식을 위하여 설치한 관서)에서 재를 올리고 초제(醮祭, 별에 지내는 제사)를 베풀게 하는데, 상의원(尙衣院)에서는 5색 채단을 각각 한 필씩 바쳤고, 남자면 복건(頭)ㆍ도포ㆍ홀(笏)ㆍ오화(烏靴)ㆍ금대(金帶)요, 여자면 비녀ㆍ배자(背子 ; 덧옷)ㆍ혜구(신의 하나) 등의 물건을 노군(老君, 물러난 임금) 앞에 진열하여 장래의 복을 빌었다.” 위 글은 조선 전기 학자 성현이 쓴 《용재총화》에 나오는 것으로 여기에 보면 왕자가 태어났을 때 바치는 예물로 덧옷의 하나인 ‘배자’가 등장합니다. 따라서 ‘배자’는 이미 조선 전기부터 입었던 옷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견주어 ‘마고자’는 대원군이 청나라에서 들여 온 만주족 옷인 “마괘”를 변형한 것이고 ‘조끼’는 양복이 들어올 때 함께 들어온 것으로 서양 조끼를 변형하여 입은 것입니다. ‘배자’와 ‘마고자’ 그리고 ‘조끼’는 모두 한복 저고리 위에 입는 덧옷이지만 다른 점은 마고자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白日靑天霹靂聲 푸른하늘 대낮에 벽력소리 진동하니 大州諸子魂膽驚 6대주(大州)의 많은 사람들 가슴이 뛰놀았다 英雄一怒奸雄斃 영웅 한번 성내니 간웅(奸雄)이 거꾸러졌네 獨立三呼祖國生 독립만세 세 번 부르니 우리조국 살았다. 위는 신규식 선생이 안중근(1879~ 1910) 의사의 거사를 보고 지은 시다. 오늘은 110년 전 중국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동양평화를 깬 일본제국주의의 원흉 이등박문을 처단한 날이다. 1909년 10월 26일 아침 9시 이등박문이 탄 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잠시 뒤 그가 열차에서 내려 러시아의 재정대신 꼬꼬흐체프와 함께 러시아 군인들의 경례를 받으며 각국 영사들이 있는 곳을 향하여 천천히 걸어가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안 의사는 권총을 빼들고 이등박문을 향하여 총을 쏘았다. 탕탕탕탕, 모두 4발을 쏘았는데 4발 모두 명중했다. 이어 안 의사는 다시 이등박문의 뒤를 따르는 일본인들을 향하여 총을 쏘아 일본 총영사 천상준언(川上俊彦), 비서관 삼태이랑(森泰二郞), 만주철도 이사 전중청태랑(田中淸太郞) 등을 차례로 거꾸러뜨렸다. 일 헌병이 그를 체포하려고 대들자 하늘을 향하여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신해일에 관청에서나 여염집에서 소나무 차양 만드는 것을 금지하였다. 매년 더운 여름에 궁궐도감이 왕의 침전에 소나무로 차양을 만들면 그들에게 은병(銀甁, 화폐) 두 개를 내려주는 전례가 있었다. 그런데 이때 왕이 ‘관청과 여염집의 소나무 차양을 금지하는데 나만 해서야 되겠는가?’ 하면서 띠를 엮어서 차양을 만들도록 바꾸니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도감 관리들이 은병 두 개를 잃었구나.’라고 했다. 이는 《고려사》5 충렬왕 3년(1277) 기록에 나오는 얘기로 고려시대 이미 처마 끝에 소나무로 가림막을 하는 소나무 볕가리개(차양, 遮陽) 풍습이 있었던 것입니다. 생솔가지를 꺾어 엮어서 매달아 더위를 막는 것이지요. 조선 중기의 유생 오희문(吳希文)이 쓴 《쇄미록(瑣尾錄)》에도 “소나무 차양을 만들려 해도 긴 나무기 없어서, 소즐이 종과 말 세 필을 끌고 유선각의 호산에 가서 소나무를 베어왔다.”라는 구절이 있어 조선시대에도 그 풍습이 계속되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옥의 처마는 비를 가리는 데에 썼을 뿐 아니라 실내조명을 조절하는 역할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처마를 길게 하면 빛이 적게 들어왔고 짧게 하면 비를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