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새 집으로 이사 온 밤. 비 오고 바람 불고 천둥 하던 밤. 뒷산에 뒷산에 도깨비가 나와, 우리 집 집웅에 돌팔매 질 하던 밤. 덧문을 닫고 이불을 쓰고, 엄마하고 나하고 마조 앉어, 덜덜 떨다가, 잘랴고 잘랴고 마악 들어누면, 또, 탕 탕 떼구루루-퉁! 위는 잡지 《동광》 제39호(1932)년 11월 01일)에 실린 윤석중의 동화시 “도깨비 열두형제”입니다. 열대야 때문에 잠을 못 이루는 한여름입니다. 이때쯤이면 어릴 적 긴긴 여름밤에 모깃불 놓고, 옥수수를 쪄먹으며 옛날이야기, 도깨비 이야기 따위를 듣던 일들이 생각이 납니다. 도깨비 이야기에서 나오는 도깨비 모습을 보면 '키가 팔대장 같은 넘', '커다란 엄두리 총각', '다리 밑에서 패랭이 쓴 놈', '장승만한 놈'이라고 표현합니다. 예전 우리에게 전승되던 도깨비 이야기를 보면 도깨비의 모습도 우리와 친근하지만 성격은 더 그렇습니다. 도깨비가 좋아하는 것 가운데는 씨름이 있지요. 장에 나갔다가 술에 거나하게 취해서 돌아오는 사이 도깨비와 씨름을 했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어렸을 적 많이 듣던 이야기입니다. 대개는 밤새 씨름을 하다가 새벽이 되어서 왼발로 걸어 도깨비를 쓰러뜨려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창녕 술정리 동삼층석탑 - 이 달 균 아침엔 서탑(西塔)과 놀고, 저녁엔 원효(元曉)와 논다 낙동강 물안개는 화왕산을 오르고 화왕산 진눈개비는 옥개석에 내린다 경주가 멀다면 창녕에 가면 된다 진흥왕 척경비와 석빙고도 있으니 서라벌 작은 집 구경 쏠쏠하지 않은가 창녕 술정리엔 동삼층석탑(국보 제34호)과 서삼층석탑(보물 제520호)이 있다. 동탑은 국보인데 서탑은 보물이라 조금 안타깝다. 서탑은 동탑에 비해 조금 늦게 세워졌고, 조형미도 다소 모자란 탓이기에 그렇지 않나 싶다. 동탑은 읍내 중심에 서 있는데, 경주 왕경에 있는 석탑과 비견될 만큼 늠름하고 세련미가 있다. 탑은 화왕산에서 내려오는 개울과 마을 사이에 있으니 사진을 찍으면 담장과 전신주, 굴뚝 등도 보인다. 이런 어지러운 배경을 담지 않으려면 안개 내려오는 새벽이나 산그늘 발목에 닿는 어스름 무렵이어야 한다. 아무리 재주 있는 작가라 해도 한 번 찾아 와 사진다운 사진을 얻기는 쉽지 않다는 얘기다. 이왕 탑 구경 왔으면 동ㆍ서탑 둘을 함께 보는 것이 더 좋으리라. 근처엔 진흥왕 척경비와 석빙고도 있으니 작은 경주라 불릴 만하다.(시인 이달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탁자 위엔 비취빛 하늘에 69 마리의 학이 오르내리는 청자 매병 한 점이 놓여 있었습니다. 이 매병의 주인은 살테면 사고 말테면 말라는 배짱으로 “2만 원!”하고 불렀지요. 그때의 돈 값어치로 보면 기와집 20채(한채 1,000원), 쌀 1,250가마(쌀 한 가마니 16원)를 살 수 있는 어마어마한 돈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인 청년은 선뜻 이에 응했지요. 고려청자 으뜸 명품으로 꼽히는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68호)이 간송 전형필 선생에게 넘어오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지요. 우리 문화재 가운데 그 어떤 것도 넘보지 못할 값어치의 유물이 있다면 현재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입니다. 안동의 소장자가 천원을 불렀다는 얘기를 듣고 책값 1만원에 거간꾼의 수고비로 1천원을 더 얹어 입수한 뒤 선생은 조선총독부가 알까봐 극도의 비밀에 부쳤습니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다른 것은 다 두고 피난을 가면서도 이 《훈민정음 해례본》만은 낮에는 품고 다니고 밤에는 베개 삼아 베고 자며 한 순간도 몸에서 떼어내지 않는 정성으로 지켜냈습니다. 그 바람에 이 책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오를 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한글박물관(관장 김낙중)은 구결학회(회장 권인한)와 공동으로 8월 13일(화) 낮 1시부터 전남대학교 인문대 1호관 김남주 기념홀에서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유가사지론》 자료의 연구와 전시 방안>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연다. 이번 학술대회는 국립한글박물관 소장자료 《유가사지론》 권66과 권20의 학제적 연구 성과를 공유하고 그 활용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유가사지론》 권66은 우리나라 첫 대장경인 초조대장경에 포함된 책으로, 고려 현종2년(1011)에서 선종4년(1087) 사이에 완성되어 고려 시대의 목판 인쇄 기술의 발전 양상을 보여주는 자료다. 특히 뾰족한 필기구로 우리말 토를 기입한 점토 석독구결이 있어 한글 창제 이전인 고려 시대에 선조들이 외국어, 곧 중국어인 한문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하여 들인 노력을 볼 수 있다. 재조대장경의 일부인 《유가사지론》 권20에서도 고려시대의 석독구결을 살필 수 있다. 여기에는 한자의 부분으로 만든 글자로 된 자토(字吐) 석독구결이 있다. 《유가사지론》은 대승불교 유가(瑜伽, yoga) 일파의 기본 수행 논서로, 불교유심론의 관점에서 윤회와 불도 수양 및 열반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어린 시절 시골에서 살던 우리는 전등이 없는 방에서 등잔에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우리는 그 등잔 밑에서 공부를 했고, 어머니는 침침한 등잔 아래서 구멍 난 양말을 꿰매시기도 했었습니다. 그 등잔을 쓰려면 저녁에는 석유를 부어줘야 했고, 심지를 올려주기도 했구요. 그러다보면 새카맣게 된 손을 머리에 쓰윽 문지르거나 바지에 쓱쓱 문대기던 아이도 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등잔 밑에 오래 앉아있으면 으레 콧구멍은 새까매지기도 했지요. 물론 당시도 전기를 놓고 흑백텔레비전까지 있었던 부유한 집도 있었지만 보통 힘겹게 살던 사람들 형편으론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전기를 놓으려면 전봇대를 세워야 하는데 그 전봇대 값이 큰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치를 보면서 밤마다 텔레비전이 있는 집으로 구경하러 다닐 수밖에 없었고, 혹시나 그 집에서 텔레비전을 못 보게 할까봐 노심초사하기도 했지요. 그 등잔은 나무, 토기, 사기, 쇠를 쓴 것들이 있었지만 근현대로 오면서는 대부분 사기로 된 것을 썼습니다. 한지 또는 솜으로 심지를 만들어 꽂은 뚜껑이 위에 있었고, 아래쪽엔 손잡이가 달린 기름 넣은 잔이 한 쌍이었지요. 그러나 등잔을 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무대 막에는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한 사람, 한 사람 새겨지고 있다. 그리고 이윤옥 시인은 무대에 올라 처절한 음성으로 김알렉산드라의 이름을 부른다. 여성독립운동가 김알렉산드라에게 바치는 헌시를 낭송하는 것이다. 그리곤 가수 문진오 씨가 나와 이 시로 작곡한 노래를 비장하게 부른다. 올해는 3.1독립운동 100돌,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돌이 되는 해다. 이윤옥 시인은 이제 그동안 부르던 이름들이 아닌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지만 불러주지 않았던 이름들을 불러주는 새로운 100년이 되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바로 김알렉산드라 같은 애국지사들을 말이다. 이어서 춤꾼 박경랑 명인은 무대에 나와 막에 바쳐지는 저 세상에 간 동생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리곤 그가 신었을 법한 흰고무신을 가슴에 안고 나와 곱게 놔두고 엇중모리신칼대신무와 살풀이춤을 춘다. 그렇게 그렇게 동생을 가슴으로 껴안는다. 이어서 남해안별신굿보존회원인 한선주, 정승훈 씨가 용선춤을 춘다. “용선”이란 전설 속의 용을 배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용선춤”은 죽은 넋을 천상으로 인도하며, 이승에 있는 온갖 액을 거두는 것은 물론, 이승에 있는 이들에게 명과 복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2019광주FINA세계수영선수권대회의 개막을 사흘 앞둔 9일 광주 광산구 KTX광주송정역에서 스위스ㆍ프랑스 선수단을 맞이하는 환영 행사가 펼쳐지고 있다. 풍물패가 선수단을 환영하는 의미를 담아 사물놀이 공연을 펼치고 있다.” 지난 7월8일 한 언론사가 올린 뉴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서서 공연을 하는 것을 두고 “사물놀이 공연을 펼친다.”라고 쓴 것은 잘못된 보도입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요? 국립국악원이 제공한 국악정보에 보면 <사물놀이>란 “사물(四物) 곧, 꽹과리ㆍ장구ㆍ북ㆍ징의 네 가지 악기 놀이[연주]라는 의미이다. 사물놀이는 야외에서 이루어지는 대규모 구성의 풍물놀이를 1978년 무대예술로 각색한 것이다.”라고 풀이해 놓았습니다. 사물놀이의 시작은 1979년 종로구 원서동의 공간사랑에서 김덕수(장구)ㆍ이종대(북)ㆍ최태현(징)ㆍ최종실(꽹과리)이 서양문화처럼 풍물 악기를 무대 위에 올려 실내에서 앉은반으로 연주를 할 수 있도록 연주한 데서 비롯되었지요. 우리 겨레는 마을마다 철마다 풍물굿(풍물굿, 농악)을 즐겨왔습니다. 풍물굿은 위 사물에 나발, 태평소, 소고이란 악기를 더해 악기 연주와 몸동작 그리고 행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한글박물관(관장 김낙중)은 개관 5돌과 한글 자판 표준안 제정 50돌을 맞이하여 2019년 7월 25일(목)부터 상설전시실 주제전 「한글 타자기 전성시대」를 연다. 이번 전시는 국립한글박물관이 두 번째로 마련하는 상설전시실 주제전으로, 한글의 글쓰기 도구로 타자기가 널리 활용된 1970~80년대를 소개한다. 전시실에서는 1970~80년대 한글 타자기 및 관련 자료와 함께 작가 한강(韓江, 1970~ )에게 영향을 준 작가 한승원(韓勝源, 1939~ , 한강의 아버지)의 타자기와 타자기로 작성한 소설 「누이와 늑대」 원고를 처음 공개한다. 이와 더불어 상설전시실의 「한글의 기계화」 마당을 새롭게 개편하여 관람객들에게 한글 타자기의 역사를 상세히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한글, 손 글씨 시대에서 기계 글씨 시대로 오늘날 흔히 쓰는 컴퓨터 한글 표준 자판의 원형은 1969년 과학기술처에서 정한 「한글 기계화 표준 자판안」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한글 전용 법률안」(1948)을 제정한지 20여 년이 지났으나, 공문서 등에서 여전히 한자와 한글이 혼용되었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타자기를 개발ㆍ보급하여 한글 전용을 가속화하고자 하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세계 최고의 여행기'라는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쓴 비범한 선각자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 18살 때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습니다. 우울증이란 말도 없었던 조선시대 그는 음식을 잘 먹지 못했던 것은 물론 불면증 때문에 잠들지 못하는 날도 많았는데 그 까닭을 알 수 없어 참으로 힘들어 했지요. 그때 어떤 사람이 ‘민 노인’을 소개해주었습니다. 박지원은 민 노인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우울증에 대해 호소를 했지요. 그랬더니 민 노인은 “음식을 먹기 싫다니 살림이 더 나아지겠네요. 또 잠을 못자는 것도 남들보다 두 배로 삶을 더 살 수 있으니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라고 했고, 이후 민 노인과 함께 지내면서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내용은 박지원이 쓴 전기(傳記) ‘민옹전(閔翁傳)’에 들어있는 내용입니다. ‘민옹전(閔翁傳)’은 박지원의 문집 《연암별집(燕巖別集)》에 나오는 것으로 박지원이 민 노인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쓴 글이었다고 하지요. 박지원은 책에서 민 노인이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었다고 말하는데 그 덕분에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는 비법도 알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의 열두째 “대서(大暑)”입니다. 대서라는 말은 ‘큰더위’를 뜻하고 있는데 한해 가운데 가장 더운 때로 속담에서는 "염소뿔이 녹는다"라고 했습니다. 이 무렵 더위를 이기는 ‘이열치열’ 먹거리로 전설의 동물인 용과 봉황 대신 잉어(또는 자라)와 오골계로 끓인 “용봉탕”, 검정깨로 만든 깻국 탕인 “임자수탕” 그리고 보신탕, 삼계탕, 추어탕 등을 예로부터 즐겨 먹었습니다. 요즈음 우리는 ‘폭염주의보’와 ‘폭염경보’를 알리는 기상청의 재난문자를 받고는 합니다. 여기서 하루 가장 높은 기온이 33도 이상인 때가 이틀 이상 이어지면 ‘폭염주의보’를, 35도 이상인 때가 이틀 이상 이어지면 ‘폭염경보’를 보낸다고 하지요. 그런데 기상청은 한자어 폭염(暴炎), 폭서(暴暑)를 쓰고 있지만 더위를 뜻하는 우리말은 무더위, 된더위, 가마솥더위, 찜통더위, 강더위, 불볕더위, 불더위처럼 참으로 많습니다. 여기서 이 말들을 두 종류로 나눠볼 수 있는데 먼저 장마철에 습도가 매우 높아, 찌는 듯 견디기 어려운 더위는 무더위, 찜통더위, 가마솥더위입니다. 이 가운데 물이 펄펄 끓는 가마솥이 상상되는 가마솥더위는 견딜 수 없을 정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