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북한의 강원도 통천군 통천읍 총석리에는 총석정(叢石亭)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바다 위에 빽빽이 솟아 있는 돌기둥[총석-叢石] 위에 세워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여기 돌기둥들은 현무암이 오랜 세월 비바람과 파도에 부딪혀 그 면들이 갈려져 떨어지면서 6각형ㆍ8각형 등 여러 가지 모양을 이루어 장관입니다. 총석정은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인 까닭으로 이를 그림으로 그린 화원이 많습니다. 특히 정선은 여러 점의 작품이 남아 있고, 김홍도, 이인문, 이재관, 허필, 김하종 등 많은 화원이 즐겨 그렸습니다. 똑같이 총석정을 보고 그린 그림이지만 가장 많이 그린 정선의 작품을 보면 전혀 색을 쓰지 않은 채 오로지 수묵만으로 물결치는 파도를 그렸으며 김홍도는 파도소리에 새소리까지 들릴 듯 섬세하고 정감 있게 그렸지요. 그런가 하면 초상화를 잘 그린 이재관은 얌전하고 꼼꼼한 모습으로 총석정을 그립니다. 하지만 이인문은 김홍도만큼은 알려지지 않은 동시대 화가였지만 주눅 들지 않은 자신만의 색채를 표현해 수채화처럼 아름답게 총석정을 그렸다는 평을 받습니다. 이처럼 이름난 화원이든 알져지지 않은 화원이든 그들 나름대로 특징을 살려 총석정을 그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光化門) 현판이 또 바뀐다고 하는데 광복 이후로만 네 번째 현판을 바꿔다는 것입니다. 문화재청은 지난 1월 30일 "광화문 현판의 원래 색상이 검은색 바탕에 금박(金箔) 글자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내년 상반기까지 현재 흰색 바탕에 검은색 글씨로 된 현판을 떼고 새 현판을 달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달려있는 현판은 2010년 복원한 것으로 현판에 금이 가 말이 많았던 것으로 이번엔 고증 자체가 잘못됐다는 얘기여서 국민의 꾸지람을 듣는 것은 당연한 것이란 생각입니다. 사실 2010년 복원할 때 한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한국을 상징하는 경복궁 광화문에 한자로 된 현판이 가당치도 않다고 하면서 한글로 된 현판을 달자는 주장을 끊임없이 했습니다. 하지만 이때 문화재청은 문화재 복원은 원형대로 해야 한다고 하면서 고종 때 훈련대장의 글씨가 원형이라며, 한자 현판을 고집해 달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글씨는 광화문 창건 때의 글씨도 아니어서 원형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어설프다는 지적을 받지요. 더구나 색깔이 잘못 된 것이라면 더더욱 원형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실제 문화재청이 원형을 주장하는 것도 앞뒤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음력 3월 3일 삼짇날이다. 고려시대에는 9대 ‘속절(俗節)’이라 하여 명절의 하나로 지냈으며, 강남갔던 제비오는날, 삼질(삼짇날의준말), 삼샛날, 여자의날(女子), 삼중일(三重日), 삼진일(三辰日), 상사일(上巳日), 상제(上除), 원사일(元巳日), 중삼일(重三日), 답청절(踏靑節, 들에 나가 풀을 밟는 풍습의 날), 계음일(禊飮日, 액막이로 모여 술을 마시는 날) 같은 이름으로도 불렸다. 양의 수 3이 겹치는 삼짇날은 파릇파릇한 풀이 돋고 꽃들이 피어 봄기운이 완연하기에 이날은 봄에 걸맞는 모든 놀이와 풍속이 집중되어 있다. 삼짇날은 9월 9일에 강남으로 갔던 제비가 옛집을 찾아와서 추녀 밑에 집을 짓고 새끼를 치며, 꽃밭에는 나비도 날아든다. 이날 마을 사람들이 산으로 놀러 가는데, 이를 ‘화류놀이’, ‘화전놀이’, ‘꽃놀이’ 또는 ‘꽃다림’이라고 하며, 대개 비슷한 연배끼리 무리를 지어 가서 화전을 비롯한 음식들을 먹고 하루를 즐긴다. 또 이날 절에 가서 부처님께 공양을 드리기도 한다. 삼짇날의 세시풍속, 각시놀음과 제비집손보기 해마다 3월이 되면 여자아이들은 각시 모양의 인형을 만들어 요ㆍ이불ㆍ베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강원 삼척시 신기면 환선로에 가면 국가민속문화재 제223호 “삼척대이리굴피집”이 있습니다. 가까운 곳에는 또 다른 국가민속문화재 제221호 “삼척 대이리 너와집”도 있습니다. ‘굴피’란 흔히는 참나무 껍질을 말하는데, 이 참나무 껍질로 지붕을 이은 집을 ‘굴피집’이라 하지요. 굴피집은 원래 ‘너와집’ 곧 소나무 널쭉을 써서 지붕을 이은 집이었는데 1930년 무렵 너와 채취가 어려워지자 주변에 참나무가 많은 산간 지역이라 재료의 채취가 쉽다는 점에 착안해 너와 대신 굴피로 지붕을 이은 것입니다. 이러한 형식의 집들은 개마고원을 중심으로 함경도, 평안도, 강원도 등의 산골짜기와 울릉도 등에서 볼 수 있는데 주로 눈이 많이 내리고, 여름과 겨울의 온도차가 심한 지방에 있는 집 형태지요. 굴피집은 밭 ‘전(田)’자 형식의 겹집으로 되어 있는데, 한 채의 집안에 마루, 안방과 사랑방 등은 물론 정지(부엌)와 심지어 마구(외양간)까지 함께 있는 모양의 집입니다. 이는 칼을 에이는 듯한 추위를 견디기 위하여 여러 방들을 서로 붙여 건물이 바깥에 드러나는 것을 가능한 줄이고 되도록 안에서 발생한 온기를 최대한 가두어 두기 위한 것과 더불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까마득한 날에 / 하늘이 처음 열리고 /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 다시 천고의 뒤에 /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우리는 중학생 무렵일까? 이육사 시인의 이 시를 외운 적이 있었습니다. 이 시는 일제강점기 아래서의 절망적 현실과 고난을 극복하고, 새로운 광명의 세계를 염원하는 의지와 시정신을 바탕으로 시적 기교의 극치를 보인 작품이라고 평가됩니다. 오늘은 본명이 이원록인 일제강점기 민족주의 저항시인이었으며, 독립운동가였던 이육사 선생이 태어나신 날입니다. 선생은 무려 17번에 걸쳐 옥살이를 하면서도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의열단 투쟁 대열에 앞장섰으며, 건강이 매우 나빠지자 대신 민족시인으로서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물론 ‘청포도’, ‘해조사’, 강 건너 노래‘, 소공원’ 등의 주옥같은 많은 작품을 남겼고, 1942년엔 우리가 즐겨 애송하는 명시 ‘광야’를 사실상의 유고작품으로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이육사 선생은 1944년 1월 16일 북경감옥에서 순국했는데 이때 주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는 4월 12일 낮 2시부터 저녁 6시까지 역사문제연구소 강당 5층 관지헌(서울시 동대문구 왕산로19라길 13)에서 역사문제연구소·역사학연구소·한국역사연구회 공동 주최의 “국가 정통론의 동원과 ‘역사전쟁’의 함정”이란 제목의 학술대회가 열린다. 역사학계는 건국절 논쟁에서 퇴행적인 반공주의와 맞서는 한편 민주적 시민교육을 위한 최소한의 제도와 절차를 지키기 위해 국정교과서 반대 투쟁에 열심히 나섰다. 그러나 지난 10여 년 동안의 ‘역사전쟁’ 과정에서 진영 논리에 따른 이분법적인 역사 인식이 횡행하고, 때로는 역사가 정치적 싸움의 수단이 되었으며, 과도한 민족주의가 대중적으로 확산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진보적 역사학계가 이분법적 논리와 과잉정치화를 방관하고 민족주의 담론 뒤에 숨어 버리지는 않았는지 반성하게 되었다. 이에 역사 3단체가 뜻을 모아 정통론적 역사 인식의 문제를 중심으로 ‘역사전쟁’을 성찰하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학술대회는 제1부 주제발표로 성신여대 홍석률 교수의 “‘역사전쟁’을 성찰하며”, 전남대 임종명 교수의 “근대 정통론과 기원·계보의 정치”, 교원대 이용기 교수의 “임정법통론의 신성화와 ‘대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4․3유족회원 김수연(인천시 계양구)씨는 지난해 제주4․3평화재단 행방불명인 표석을 보고 표석 설치로 넋은 돌아왔지만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상당수 행방불명된 혼과 유족들의 한(恨)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 지인들과 함께 4달 가까이 동백꽃보람(배지) 403개를 만들어 제주도청에 기증했다는 기별이 들려왔습니다. 오늘은 71년 전 제주4.3항쟁이 시작된 날로, 이후 제주도의 무고한 양민 3만여 명이 무참하게 학살당한 것입니다. 당시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남한 단독선거, 단독정권 수립 반대를 목표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엄청난 희생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 때 죽은 3만이란 숫자는 제주도민의 1/9 정도가 되기도 하지만, 이 희생자 가운데 33%가 노약자와 여성이며, 무차별적인 학살이 일어났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둘째 아들도, 며느리도, 큰아들도 모두 내 눈앞에서 잡혀갔어. 모두 걱정 말라면서 떠나갔는데 아무도 안 돌아와. 아직도 가슴이 가득해오면 목에서 피가 쏟아져 나와. 너무 억울해서 나는 몇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2019년은 3.1만세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돌을 맞는 해입니다. 이때를 맞아 온 나라에서는 이를 기리는 다양한 행사가 열리고 있는데 특히 지난 3월 1일 광화문에서 열린 3·1만세운동 100돌 기념식에서는 윤봉길 의사의 종손인 배우 윤주빈씨가 심훈 선생의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린 글월’을 낭독해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선생은 “상록수”로 유명한 소설가며, 독립운동가지요. “어머니! 풀 한 포기 없는 감옥 마당에 뙤약볕이 내리쪼이고 주황빛의 벽돌담은 화로 속처럼 달아오르고 방에는 똥통이 끓습니다. 밤이면 빈대, 벼룩이 다투어가며 진물을 살살 뜯습니다. 그래서 한 달 동안이나 쪼그리고 앉은 채 날밤을 새웠습니다. 그렇게 생지옥 속에 있으면서도 괴로워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누구의 눈초리에나 뉘우침과 슬픈 빛이 보이지 않고, 도리어 그 눈들은 샛별과 같이 빛나고 있습니다.” 이 편지는 심훈 선생이 경성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1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8달 동안 투옥된 당시 쓴 글입니다. 글월의 내용을 보면 독립운동가들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얼마나 혹독한 상태에서 고통을 받았는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나라의 밥짓기는 천하에 이름난 것이다. 밥짓는 것이란 별다른 것이 아니라 쌀을 정히 씻어 뜨물을 말끔히 따라버리고 솥에 넣고 새 물을 붓되, 물이 쌀 위로 한 손바닥 두께쯤 오르게 붓고 불을 때는데, 무르게 하려면 익을 때쯤 한번 불을 물렸다가 1, 2경(頃) 뒤에 다시 때며, 단단하게 하려면 불을 꺼내지 않고 시종 뭉근한 불로 땐다.” 이는 1800년대 초 문신 서유구가 쓴 《옹희잡지》에 나오는 말입니다. 우리 겨레는 예부터 밥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래서 밥의 종류도 무척이나 많았지요. 먼저 밥의 이름을 보면 임금이 먹는 수라, 어른에게 올리는 진지, 하인이 먹는 입시, 제사상에 올리는 젯메(메) 등이 있습니다. 물론 벼를 깎은 정도에 따라서도 나눌 수 있는데 현미밥부터, 조금 더 깎은 7분도밥과 가장 많은 사람이 해먹는 백미밥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진밥과 된밥 그리고 고두밥이 있습니다. 또한 밥에 섞는 부재료에 따라서도 나누어집니다. 먼저 정월대보름에 찹쌀, 검은콩, 팥, 찰수수, 차조로 해먹는 오곡밥, 계절에 따라 나는 푸성귀(채소)나 견과류를 섞어서 짓는 밥이 있으며, 콩나물밥, 완두콩밥, 무밥, 감자밥, 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한글박물관(관장 박영국)은 개관 5주년을 맞이하여 한글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되새기고 국립한글박물관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국립한글박물관 홍보 문구 공모전’을 2019년 2.27.(수) ~ 3.20.(수)까지 추진하였다. 이번 공모전은 인터넷을 활용한 대국민 공모로 추진하였으나 재외 국민, 외국인도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모두 1,144건이 접수된 이번 공모전은 1차 내부 심사를 거친 뒤 공정성과 전문성을 담보하기 위해 홍보 전문가들로 외부 심사위원단을 구성하여 최종 심사를 진행한 결과 최우수상 1건, 우수상 3건, 참여상 50건을 뽑았다. 최우수상에는 이O원 님의 ‘우리의 한글, 세상의 큰 글’이 선정되었는데, 독창적이고 명료하면서도 미래지향적이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우수상으로 선정된 홍O진 님의 ‘한글을 품다. 국립한글박물관’, 이O임 님의 ‘문자를 넘어, 문화를 담다. 국립한글박물관’, 정O은 님의 ‘한글을 만나다. 한글에 반하다.’ 등 총 3건은 국립한글박물관이 추구하는 이미지와 지향점을 잘 표현해 낸 동시에 감성적인 글귀로 국민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을 것으로 평가받았다. 참여상은 아이디어와 진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