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90년 전(1929) 오늘은 편강렬(片康烈) 선생이 신의주 감옥에서 받은 고문 탓에 순국한 날입니다. 선생은 1907년 열여섯의 나이로 ‘토왜복수(討倭復讎, 왜놈을 쳐서 복수를 함)’를 외치며 일어난 이강년 의병진의 소집장 겸 선봉장으로 참전하여 경상ㆍ충청도 일대에서 큰 공적을 세운 분입니다. 선생은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서 활동을 벌이다 일제가 날조한 ‘데라우치 총독암살미수사건(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2년여 동안 옥고를 치렀고 3․1독립만세 이후 황해도 안악에서 “독립군의 국내 진입시 원조를 목표”로 군사주비단(軍事籌備團)을 조직하여 안악군 대표를 맡아 활동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혀서 징역 1년 2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그 뒤 1923년 선생은 허베이성(河北省) 산해관(山海關)에서 ‘의성단(義成團)’을 조직하고, 단장에 추대되었는데 의성단은 주로 장춘에 이르는 철도 양측 2백여 리 지역에서 우리 겨레의 독립의식을 드높이고, 250여명의 단원을 무장시켜 장차 국내에 진입할 수 있는 거점 마련에 주력했지요. 1924년 선생은 단원들과 함께 장춘성 안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여 7시간에 걸친 교전 끝에 적 60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을유년 8월 15일에 일본이 망하고, 소련과 미국이 나라를 남북으로 분단한다. 공산주의와 외래 종교가 민족과 나라를 망치고 공산 민주의 핵전쟁이 세계를 파멸한다. 백두산에 단군의 광명대도가 하늘 높이 떠올라 공산 민주의 핵전쟁을 막고 천국의 이화세계를 이루리라.” 이는 이 땅의 독립운동에 하나의 거름이 된 대종교 창시자 홍암(弘巖) 나철(羅喆) 선생이 한 예언입니다. 110년(1909년) 전 오늘(1월 15일)은 나철 선생이 서울 재동(齋洞) 취운정(翠雲亭)에서 제천(祭天)의식을 갖춘 다음 “국조(國祖)를 받들어 민족정기를 세우고 민족독립을 지키기 위한 나라의 정신으로 삼아야 한다.”라면서 뒷날 대종교가 된 단군교를 공식 종교로 공표한 날입니다. 이후 선생은 새로운 투쟁의 전환을 위해 단군교를 창시한 뒤 이어 대종교(大倧敎)로 이름을 바꾸고 서일(徐一), 여준(呂準), 조성환, 신규식 등 많은 민족지사들을 모았지요. 그러자 일제는 대종교에 갖가지 탄압을 가해왔으며, 집회를 금하는 것은 물론 자금 출처를 조사하기도 했고, 회원의 동정을 엄중히 감시했습니다. 이런 마당에 선생은 결단을 내리고 단군의 유적이 있는 구월산으로 들어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난 7일 문화재청은 <낙화장(烙畵匠)>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김영조(金榮祚, 남, 1953년생, 충청북도 보은군) 선생을 보유자로 인정했다고 밝혔습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136호 <낙화장(烙畵匠)>은 종이, 나무, 가죽 등의 바탕소재를 인두로 지져서 산수화, 화조화 등의 그림을 그리는 기술과 그 기능을 가진 장인을 말합니다. 우리나라 낙화에 대한 기원은 조선후기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1863)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나오는 ‘낙화변증설(烙畵辨證設)’에서 찾을 수 있지요. 한국의 낙화기법은 본래 전통회화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기본 화법은 전통 수묵화 화법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산수화에서 산이나 바위를 그릴 때 도끼 자국이 난 듯, 강하게 붓을 찍어 바위의 날카로운 질감 등을 표현하는 ‘부벽준(斧劈皴)’, 크기와 짙음과 옅음이 다른 빗방울 같은 점들을 무수히 찍어서 바위나 산 등을 표현하는 ‘우점준(雨點皴)’ 등과 같은 기법을 붓 대신 인두로 표현하며, 수묵화에 나타나는 먹의 짙고 옅음도 인두로 지져서 나타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요. 이번에 ‘낙화장’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물과 물고기의 관계처럼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사이를 우리는 <수어지교(水魚之交)>라 한다. 이처럼 서울 돈화문국악당과 예술가가 동행하며 만들어가는 프로그램 <수어지교(水魚之交)>는 지난 2016년 시작하여 올해로 세 번째를 맞이한다. 그 네 번째 공연 류지선의 <북녘 정겨운 소리>가 어제(1월 11일) 저녁 7시 30분 돈화문국악당에서 열렸다. ‘북녘 정겨운 소리’란 그야말로 북녘지방에서 불렸던 소리 곧 서도소리를 말한다. 류지선은 이 서도소리의 멋을 극대화시키고 서도소리의 아름다움을 청중들의 가슴 속에 선사하기 위해 공연을 꾸몄다.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장효선 씨의 사회로 시작된 공연은 빈자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성황을 이룬 가운데 무대에 오른 류지선은 먼저 시도시창(詩唱) ‘관산융마’를 선보였다. 일제강점기 이름을 떨쳤던 장학선 명창이 25살 때 조선일보사가 해마다 열던 전국명창대회에 평양대표로 출전하여 장원을 할 때 불렀다는 그 ‘관산융마’다. 특이하게도 반주는 이신애의 거문고가 맡았다. 거문고는 모든 악기의 으뜸이란 뜻으로 ‘백악지장(百樂之丈)’이라 하여 조선시대 때는 선비들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한글박물관(관장 박영국)은 2019년 1월 7일(월)부터 1월 20일(일)까지 2주 동안 별관에서 성인 대상 <한글 상표 공방>의 2018년 하반기 교육 결과물 전시 ‘언, 뜻’을 연다. <한글 상표 공방>은 우리말의 어감을 살린 한글 상표 이름을 만들고 이를 개성 있게 디자인해보는 8회 과정의 연속 교육이다. 2018년 <한글 상표 공방> 교육은 한글 상표 이름을 만들고 디자인하는 두 가지 과정으로 구성되었다. 상표 이름 전문가인 브랜드메이저 이예현 대표와 이승훈 상무, 인터브랜드 민은정 전무의 상표 개발 전략과 사례 강의, 실습 지도를 통해 한글 상표 이름을 만들고, 글꼴 디자이너 산돌커뮤니케이션 권경석 이사와 최성우 프로듀서의 지도를 통해 이를 개성 있는 디자인으로 표현하는 교육이 진행되었다. 이번 결과물 전시에서는 ‘문화 예술 공간, 이발소, 실버세대를 위한 임대주택, 도심 속 옥상 캠핑장, 기념품점’을 주제로 34개의 한글 상표를 선보인다. 한편 올해 상반기 성인 수강생 모집은 3월 중 안내될 예정이며, 4~6월 토요일에 8회 연속 과정으로 운영된다. 교육을 수료한 수강생에게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제주도 서귀포시에 가면 보유자 없이 사단법인 국가무형문화재 제주민요보존회를 보유단체로 인정한 국가무형문화재 제95호 “제주민요”가 있습니다. 제주도는 흔히 바람과 돌과 여자가 많다고 하여 삼다도라고도 하지만, 이곳에는 여러 가지 민요도 많이 전해지고 있어 민요의 보물창고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제주민요 가운데 농사짓기 소리로는 <사대소리>, <밭밟는소리>가 있고, 고기잡이소리로는 <노젓는소리>, <멸치후리는소리> 따위가 있지요. 또 일하면서 부르는 소리로는 <고래소리>, <가래질소리>, <방앗돌굴리는소리>가 있으며, 의식요에는 <행상소리>, <달구소리>, <꽃염불>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부녀요와 동요로는 <시집살이노래>, <애기흥그는소리>, <원님노래>가 있고, 잡요로는 <오돌또기>, <이야홍타령>, <서우젯소리> 따위가 있지요. 이들 제주민요들 가운데서도 두드러지는 <맷돌노래>는 제주 여인들의 삶 전반을 마치 백과사전처럼 자세히 담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明時自許調元手(명시자허조원수) 밝은 때라 스스로 정승감이라 자부했었는데 晩歲還爲賣炭翁(만세환위매탄옹) 늘그막에 도리어 숯을 파는 노인이 되었네 進退有時知有命(진퇴유시지유명) 나가고 물러감에는 때와 운명이 있음 알겠고 是非無適定無窮(시비무적정무궁) 시비는 적정한 때가 없이 일어나누나 膏肓未備三年艾(고황미비삼년애) 고질병에 삼 년 묵은 쑥 갖추지 못하고 飄泊難營十畝宮(표박난영십무궁) 뜬 생활에 열이랑 집 마련하기 어렵네 惟是老來能事在(유시로래능사재) 오직 늙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 百杯傾盡百憂空(백배경진백우공) 백 잔의 술을 기울여 온갖 근심 없애는 것이네 이는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한시 <서산만성(西山漫成)>입니다. 선조(宣祖)의 뜻을 거스르자, 동인(東人)들의 탄핵을 받아 강계(江界, 북한 자강도에 있음)로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을 때 심경을 노래한 것이지요. 위리안치는 귀양지에서 바깥사람들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죄인을 그 안에 가두어 두는 것입니다. 송강은 어진 임금이 통치하는 때여서 스스로 정승감이라 자부했는데, 여러 번의 유배를 당하고 늙어서는 숯을 파는 노인 신세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중앙박물관에는 그림과 붓글씨에 뛰어난 선비 출신의 화가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1861~1919)의 그림 〈백악춘효(白岳春曉) - 빼앗긴 궁궐의 봄, 등록문화재 485호〉가 있습니다. 세로로 길게 그린 이 그림은 당당하게 보이는 백악산이 솟아 있고, 그 아래 어스름하게 펼쳐진 안개 아래 우거진 수풀 속으로 경복궁의 전각들이 나타납니다. 전각 앞에는 광화문이 보이고, 광화문 앞으로 육조거리가 있으며 가장 아래쪽에는 해태상들이 경복궁을 수호하듯 당당하게 서 있습니다. 이 그림을 그린 1915년은 일제가 물산공진회(物産共進會)를 경복궁에서 연다는 명목으로 많은 전각들을 헐어낸 때인데 그림에서는 아직 총독부 건물은 보이지 않고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많은 전각들이 그려져 있어 경복궁의 웅장한 위용이 살아있지요. 국운이 다한 이때 경복궁의 전모를 위풍당당하게 표현한 이 그림은 나라를 지키려는 자존심을 담아낸 역작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경복궁은 백악산과 북한산의 기운찬 형세를 배경으로 세운 궁궐입니다. 안중식은 화면의 아래부터 가운데까지는 서양의 투시도법을 쓰고 있지만, 풍수사상의 상서로움을 가진 궁으로서의 면모를 그리기 위해 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87년 전(1932년) 오늘은 이봉창 의사가 일왕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던 날입니다. 이봉창 의사는 거사 전인 1931년 12월 13일 한인애국단 단원으로 가입했는데 이때 “나는 참된 적성(赤誠, 참된 정성)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선서문을 썼습니다. 그런 다음 이봉창 의사는 수류탄 두 개를 손에 들고 환하게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이때 김구 선생이 안타까운 표정을 짓자 이봉창 의사는 오히려 환한 낯으로 “저는 영원한 쾌락을 영위하러 가는 것이니 슬퍼하지 마십시오.”라고 위로했다고 하지요. 운명의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는 관병식을 마친 히로히토 일왕의 행렬이 도쿄 황거(일왕이 사는 곳) 앞 사쿠라다몬(櫻田門) 앞에 나타나자 수류탄 한 발을 집어던졌지만 수류탄은 일왕의 마차가 아니라 궁내대신의 마차를 맞추고 말았지요. 갑작스럽게 일왕 저격 사건이 일어나자 당황한 경찰들은 마구잡이로 용의자를 잡아들이며 자신의 앞에 있는 일본인을 범인으로 의심하여 마구 때리자 담대한 표정으로 앞에 나아가 자신이 범인임을 밝히면서 반항하지 않을 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예나 지금이나 한 가지에 미쳐서 사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빌게이츠는 컴퓨터에 미쳐 인생을 걸었습니다. 파브르는 곤충에, 라이트 형제는 비행기에, 포드는 자동차에, 워렌 버핏은 투자에 미쳐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미쳐 사는 사람에게 “~벽(癖)” 자를 붙여 땅투기에 미쳤다면 지벽(地癖)이고, 술 마시고 눈밭에 얼어 죽었다는 화원 최북은 주벽(酒癖)이며, 시(詩) 짓기에 빠진 고려 후기의 문인 이규보는 시벽(詩癖)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돈 밝히는 전벽(錢癖), 틈나는 대로 손을 씻는 결벽(潔癖), 고소고발을 남발하는 상소꾼 소벽(疏癖)도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책읽기에 빠진 책벌레는 서음(書淫) 또는 전벽(傳癖)이라 했다는데 세종도 서음전벽임이 분명합니다. 세종은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하면서도 글 읽기를 그치지 아니하여 병이 점점 심해졌습니다. 그러자 태종이 내시에게 갑자기 명하여 그 처소에 가서 책을 모두 거두어 오게 하였지요. 하지만 세종은 병풍 사이에 구양수(歐陽脩)와 소동파(蘇東坡)가 쓴 편지글을 모은 책 《구소수간(歐蘇手簡)》을 감쳐두고 이를 천백번이나 읽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화가인 김득신(金得臣·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