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부산광역시 기장군에 가면 국가무형문화재 제82-1호 “동해안별신굿(東海岸別神굿)”이 전승돼 옵니다. 동해안 별신굿은 남부 동해안의 어촌 마을에서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고 마을의 평화와 안녕, 풍요와 다산, 배를 타는 선원들의 안전을 빌기 위해 무당들을 청해 와서 벌이는 큰 굿입니다. 풍어제, 풍어굿, 골매기당제라고도 하는 동해안 별신굿은 1년 또는 2~3년마다 열지요. 이 별신굿은 내륙지방의 동제(洞祭)와는 달리 집안 대대로 굿을 해 온 세습무당이 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별신굿의 대상신은 골매기 서낭신으로서 마을을 수호하는 기능을 가지지요. 굿은 부정굿ㆍ골맥이청좌굿ㆍ당맞이굿ㆍ화해굿ㆍ각댁성주굿ㆍ천왕굿ㆍ심청굿ㆍ손님굿ㆍ황제굿ㆍ부인곤반굿ㆍ용왕굿ㆍ꽃노래굿ㆍ대거리굿 등의 순서로 진행됩니다. 굿을 하는 때는 마을마다 다르나 대체로 3∼5월 사이나 9∼10월 사이에 주로 지내며 굿청의 장식이 화려한데 견주어 무당들이 입는 의상은 비교적 소박하지요. 또 동해안 별신굿에서 추는 춤은 다양하고 익살스런 대화와 몸짓으로 등 오락성이 강합니다. 별신굿을 하는 마을은 잔치 분위기로 들떠 있고, 굿청은 마을 사람들이 흥겹게 노는 놀이판의 성격을 띠지요.
[우리문화신문=문경 김영조 기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문경아 새재에 물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가네 홍두깨 방망이는 팔자가 좋아 큰애기 손질로 놀아나네 문경새재 고갯길에 애절한 문경새재아리랑이 울려 퍼진다. “문경새재아리랑제” 행사의 하나인 ‘고유제’ 열려 10일 아침 10시 문경새재 제2관문 문경새재아리랑비 앞에서는 문경시(시장 고윤환) 주최 문경문화원(원장 현안근) 주관 제11회 디아스포라아리랑 “문경새재아리랑제” 행사의 하나인 ‘고유제가 열렸다. 영하 15도의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먼저 문경문화원 전통예술단의 길놀이를 시작으로 문경새재아리랑 전승자 송옥자 선생 외 6인이 문경새재 아리랑을 부름으로써 고유제는 시작됐다. 이어서 초헌관 현한근 문경문화원장, 아헌관 채만희 문경예총회장, 종헌관 이만유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장이 나서서 천지신명과 문경새재를 넘어가신 모든 고혼(孤魂)과 ‘디아스포라아리랑, 제11회 문경새재아리랑제’ 신위 앞에 강신례 등 고유제를 지냈다. “천지신명이시여! 문경새재아리랑제를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이 제전이 뜻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노래인 아리랑으로 흩어진 민족이 하나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남 사천시 곤양면에 가면 보물 제614호 “사천 흥사리 매향비(埋香碑)”가 있습니다. 이 비의 크기는 몸체 높이 1.6m, 너비 1.3m입니다. 비는 거의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써서 비문을 새겨 놓았는데, 표면의 굴곡이 심하지요. 글자 크기가 같지 않고 가로ㆍ세로도 잘 맞지 않으며, 글자 수 또한 각 행마다 같지 않습니다. 다만 글자체에 예스럽고 아담한 멋이 있어 당시 지방의 글씨체를 엿볼 수 있지요. 고려말, 조선초에 향나무를 바닷가 개펄에 묻어두는 매향의식(埋香儀式)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때 자주 출몰하던 왜구의 침탈에 고통받던 백성이나 스님이 침향을 정성으로 준비하여 자신들을 구원해줄 미륵이 오시기를 비는 뜻이었지요. 묻은 향나무가 수백 년이 지나면 침향이 되고, 침향이 된 뒤에는 ‘서해 바다에서 용이 솟아오르듯이’ 스스로 물위로 떠오른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매향의식을 한 뒤엔 그곳에 매향비(埋香碑)를 세웠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매향비는 5종이 있지요. 맨 먼저 1309년(충선왕 1)에 세운 것으로 지금 비석은 없어지고 비문의 탁본만 남은 ‘고성삼일포매향비(高城三日浦埋香碑)’와 1335년(충숙왕 복위 4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는 12월 15일 저녁 6시 서울 혜화동 JCC 아트센터에서는 윤은화 외 20인의 ‘한국양금앙상블’ 제1회 정기연주회가 열린다. 양금은 국악기 가운데 유일하게 유럽에서 들어온 악기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담헌 홍대용이 이 양금으로 우리 음악을 처음 연주한 것으로 기록돼 있는데 그 뒤 19세기 후반부터 대중의 사랑을 받아 영산회상 등 연주에 널리 쓰이게 된 듯하다. 이러한 사실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양금악보 30여종이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양금이 우리나라에 처음 전래됐을 때는 서양금, 서금, 또는 구라철사금으로도 불렸는데 구라철사금이란 구라파, 곧 유럽에서 들어온 철사금이란 뜻이다. 이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양금은 우리의 현악기들과는 달리 명주실을 사용하지 않고 철사를 사용했는데 그 때문에 음색이 두드러진 차이를 보인다. 그렇게 대중의 사랑을 받던 양금이 어느 시점인가부터 잊힌 악기가 되어 연주하는 이를 보기 어렵게 되었다. 그런 양금을 다시 대중들에게 사랑 받기 위해 연주자 윤은화를 중심으로 ‘한국양금앙상블’은 태어났다. 우리나라 전통음악 속의 양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난 12월 6일엔 꽁꽁 닫혀있던 경복궁 서문 곧 영추문(迎秋門)이 활짝 열렸습니다. 영추문은 조선시대 문무백관이나 중인들이 궁궐에 출입하기 위해 드나들던 문입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불에 탄 것을 고종 때인 1862년 중건했지요. 이후 일제강점기인 1926년 전차 노선이 주변에 생긴 뒤 주변 석축이 무너지면서 같이 철거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으나, 1975년 현재 자리에 다시 지어졌습니다. 우리문화신문은 그동안 이 영추문 개방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보여 왔습니다. 김슬옹 세종나신곳성역화국민위원회 사무총장은 지난해 8월 20일 영추문 폐쇄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칼럼 “경복궁 영추문은 왜 꽁꽁 닫아놓았나”를 올린 적이 있었고, 또 지난 5월 8일에 기자가 쓴 “한재준의 <붉은 한글>, 세상에 대한 외침” 기사에서 서울여대 한재준 교수와의 대담을 통해 이를 지적한 바 있었지요. 그뿐만 아니라 우리 신문은 지난해 8월 문화재청장 앞으로 “영추문 개방에 관한 건”이라는 제목으로 공문을 보내 영추문 개방을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영추문이 활짝 열리고,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집현전 터와 백성에게 시간을 돌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앞집 처녀가 시집을 가는데 뒷집의 총각은 목매러 간다 앞집 처녀가 시집을 가는데 뒷집 총각이 목매러 간다 사람 죽는건 아깝지 않으나 새끼 서발이 또 난봉나누나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이 난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이나고 이십리 못가서 불한당 만나고 삼십리 못가서 되돌아오누나“ 무대에서 서도소리 “사설난봉가”의 해학적 사설이 맛깔스럽게 들린다. 점잖게 소리를 듣던 청중들이 드디어 어깨를 들썩이며 흥을 어쩌지 못한다. 여기저기서 추임새가 절로 나온다. 어제 저녁 4시 서울 종로구 부암동 무계원 안채에선 해설이 있는 국악 “풍류산방4” 그 세 번째 공연이 열렸고, 국가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전수조교 유지숙 명창과 그 제자들이 서도소리로 청중들을 휘어잡았다. 이날 공연은 사설난봉가, 병신난봉가, 긴난봉가 등 난봉가류 말고도 유지숙 명창의 제자인 박지현, 김초아의 ‘초한가’와 류지선, 김무빈의 ‘영변가, 그리고 유지숙 명창이 직접 부른 ’제전‘ 등 좌창이 청중들을 흔들어 놓았다. 유지숙 명창이야 워낙 소리 잘하는 명창으로 익히 알려져 있지만 제자들의 소리만으로도 청중들의 마음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랜 동안 배달겨레가 전승하고 나라밖 이산(디아스포라)과 분단에서도 함께 향유해 온 아리랑. 이 아리랑은 201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오르고, 2014년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129호로 지정되어 우리 겨레는 물론 전 인류의 가치 있는 문화유산이 되었다. 이 아리랑은 온 나라에 보존회가 47개가 있으며, 법인만 11개 있었다. 그런데 어제 12월 5일 서울 인사동 태화빌딩에서는 또 하나의 아리랑보존회 고고성이 울렸다. 바로 사단법인 왕십리아리랑보존회(이사장 이해솔)가 그것이다. 출범식에서 사단법인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해솔 이사장은 “오랫동안 ‘효(孝)’공연을 하면서 내 생활터전인 왕십리에서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활동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던 차 아리랑이 국가무형문화재 129로 지정되는 것을 보고 아리랑을 주제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회원들과 논의 한 결과 음반을 내고 법인을 설립해 본격적으로 아리랑 전승활동을 하자는데 마음을 모았습니다.”라고 보존회 결성 계기를 얘기했다. 이어서 “활동은 우선 음반 ‘왕십리아리랑’을 내는 것입니다. 12곡을 모두 왕십리 역사, 전통문화, 왕십리 자랑을 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스물한째 대설(大雪)입니다. 소설(小雪)에 이어 오는 대설(大雪)은 눈이 가장 많이 내린다는 뜻이지만 원래 역법(曆法)이 만들어진 것이 중국 화북지방(華北地方)의 계절적 특징을 반영했기 때문에 우리나라와 꼭 맞지는 않습니다. 24절기 가운데 대설이 있는 음력 11월은 동지와 함께 한겨울을 알리는 절기로 농부들에게 있어서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새해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농한기(農閑期)이기도 하지요. 십일월은 중동이라 대설 동지 절기로다 바람 불고 서리 치고 눈 오고 얼음 언다 (중간 줄임) 부녀야 네 할 일이 메주 쑬 일 남았구나 익게 삶고 매우 찧어 띄워서 재워 두소 이는 <농가월령가> 십일월령에 있는 노래입니다. 이때는 겨울이 깊어가는 즈음이며, 농사일이 한가한 시기이지만 이 노래처럼 가장 중요한 메주 쑤기를 해야만 합니다. 우리 겨레의 먹거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왔던 된장을 만드는 메주. 예전에 서양인들은 메주에 발암물질인 아플라톡신이 있다고 비웃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메주로 만든 된장을 훌륭한 항암식품으로 평가합니다. 씻는 과정에서 아플라톡신은 남아있을 수 없고, 나중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북 문경시 문경읍에 있는 문경옛길박물관에는 국가민속문화재 제254호 “문경 평산 신 씨 무덤 출토복식”이 있습니다. 문경 평산 신 씨 무덤은 조선 전기 여성이 홀로 묻힌 무덤으로 2004년 무덤을 이장하는 과정에서 키 150㎝ 정도의 미라와 함께 많은 옷들이 출토되었습니다. 출토유물은 저고리, 치마, 바지, 단령(團領-조선시대 관리들의 관복), 장옷 같은 옷들을 비롯하여 염습구(주검을 씻긴 다음, 옷을 입히고 묶는 일을 하는 도구)와 치관류(관을 짜는 데 쓰는 것)등 74점에 이르며, 보수ㆍ보존 처리과정을 거쳐 현재 문경새재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출토복식은 의생활의 시대상이 반영되는 귀중한 자료지만,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기에 원래 옷 빛깔을 잃어버리고 갈색 빛으로 변해 출토되는 문제가 있는데 이 평산 신 씨 무덤 출토 유물도 갈색으로 변한 상태지요. 옷들은 홑옷과 겹옷은 물론 솜 또는 누비옷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또 목판깃, 직선배래의 형태이고, 길이는 길고 품이 넉넉하여 16세기 여자복식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평산 신 씨 무덤에서 출토된 옷 가운데 특이한 점은 전체적으로 직금단(織金緞-비단 바탕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湖上精廬絶俗緣(호상정려절속연) 호숫가 깨끗한 집 속세와 끊어진 곳이니 胎仙栖託爲癯仙(태선서탁위구선) 학이 깃들어 여윈 신선이 되었구나 不須翦翮如鸚鵡(불수전핵여앵무) 앵무처럼 깃털을 꺾을 필요 없으니 來伴吟梅去入天(내반음매거입천) 장차 함께 매화를 읊으며 하늘로 들어가세 이 시는 저장성 항저우(杭州) 서호(西湖)에서 학을 기르며 매화를 사랑한 임포를 노래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西湖伴鶴(서호반학)”이란 제목의 한시입니다. 임포는 이곳에서 벼슬도 하지 않고 아내도 두지 않았으며, 오직 매화를 심고 학을 기르는 것만 즐겼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매처학자(梅妻鶴子)’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퇴계는 함께 노래하며 하늘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정조(正祖)는 그의 시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 <일득록(日得錄)>에서 16세기 성리학의 대가인 퇴계(退溪)와 율곡(栗谷)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하고 있습니다. “퇴계는 율곡의 선배다. 그의 사단칠정(四端七情)은 율곡이 강력히 반론을 제기해 마지않았으나 퇴계는 끝내 불평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여기에서 퇴계의 온순하며 인정이 두터운 인품과 율곡의 명석하고 예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