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주 분황사에 가면 높이 9.3m의 국보 제30호 “분황사 모전석탑(芬皇寺 模塼石塔)”이 있습니다. 이 모전석탑은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멀리서 보면 마치 벽돌로 쌓은 전탑(塼塔)으로 보이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돌 하나하나를 벽돌 모양으로 깎아서 만든 탑이어서 모전석탑 곧 "전탑을 모방한 석탑"이란 이름이 붙었지요.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지금은 3층만 남아있습니다. 탑은 널찍한 1단의 기단(基壇)이 있고 그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입니다. 탑신 4면에는 두 짝의 돌문을 달아 여닫게 한 작은 불상을 모신 감실(龕室)이 만들어져 있고, 그 좌우에 인왕상(仁王像, 절이나 불전의 문 또는 불상 등을 지키는 불교의 수호신)을 두었습니다. 이 모전석탑은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세운 것으로 짐작되며,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인왕상 조각은 당시 7세기 신라 조각양식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이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수리 당시 탑 안에서 사리함과 구슬 등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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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왜 화가들은 우리 소재를 우리 식으로 그리려는 생각은 않고 혹은 외면하면서 서양풍으로만 그리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나더러 똑같은 소재만 그린다고 평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의 생활이 그런데 왜 그걸 모두 외면하려는 걸까?” 이는 독학으로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한 한국의 대표적인 화가라고 평가되는 박수근 화백이 한 말입니다. 그의 말처럼 박수근 작품의 소재는 평범한 우리의 이웃, 가난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절구질하는 여인, 빨래터, 기름장수, 소금장수, 앉아있는 아낙과 항아리, 실을 뽑는 여인, 시장 여인들 같은 그림을 그린 것입니다. “그이는 물건을 사실 때면 큰 상점에서보다는 노상이나 손수레나 광주리장사에게서 사셨다. 광주리 장사하는 여인들을 늘 불쌍히 여기셨고, 전후에 고생을 겪는 이웃들을 늘 애처롭게 여겨 그분의 그림 소재가 모두 노상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박수근의 아내 김복순의 말에서도 왜 그가 이런 작품들을 그렸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 그에게는 죽은 뒤 더 유명해져 국민에게 가장 사랑받는 화가,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린 화가라는 수식어가 붙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국민화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금으로부터 25여 년 전인 1993년 12월 12일 저녁 날이 어두워 질 무렵, 충남 부여 능산리절터(사적 제434호)에서는 발굴단이 논바닥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물체를 발견합니다. 이에 발굴단은 어둠을 불로 밝히며 차가운 논바닥 진흙탕에 엎드려 일회용 종이컵으로 조심조심 물을 퍼냅니다. 이윽고 진흙탕 속에서는 무령왕릉 발굴 이래 백제 고고학이 거둔 가장 큰 성과로 손꼽히는 <백제금동대향로>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됩니다. 1천 4백여 년이나 어둠 속에 묻혀 있던 대향로는 온전한 모습으로 발굴되었는데 아마도 진흙 속에 묻혀 공기가 차단된 덕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백제금동대향로>는 신선(神仙)이 사는 도교의 이상세계를 표현하였습니다. 맨 위의 봉황과 몸체 그리고 용 받침대까지 모두 네 부분으로 구성됐으며, 신선계, 인간계, 저승계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뚜껑 꼭대기에는 봉황이 목과 부리로 여의주를 품고 날개를 편 채 힘 있게 서 있으며, 몸체는 활짝 피어난 연꽃을 닮았고, 받침대는 그 연꽃 밑 부분을 입으로 문 채 하늘로 치솟듯 떠받는 한 마리의 용이 되었습니다. 봉황 앞가슴과 악사(樂士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짚신은 볏짚으로 삼은 신발이며, 초혜(草鞋)라고도 합니다. 또 짚신과 같은 모양이지만 삼[麻]이나 노끈으로 만든 것을 ‘미투리’라 하며 이는 짚신보다 훨씬 정교하지요. 그밖에 왕골이나 부들로 만든 짚신도 있었습니다. 중국 최초로 역대 제도와 문물을 기록한 《통전(通典)》 변방문(邊防門) 동이(東夷) 마한조(馬韓條)에 ‘초리(草履)’가 나오고, 중국 진나라 역사서 《진서(晋書)》 사이전(四夷傳) 마한조에 ‘초교(草蹻)’가 나옵니다. 또 송나라 마단림(馬端臨)이 쓴 《문헌통고(文獻通考)》 에서 “마한은 초리(草履)를 신는다.”라고 했는데 초리, 초교 모두 짚신을 일컫는 것으로 이를 보아 짚신은 이미 삼한시대부터 신었던 것입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은 그의 책 《성호사설》에서 “왕골신과 짚신은 가난한 사람이 늘 신는 것인데 옛사람은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선비들은 삼으로 삼은 미투리조차 부끄럽게 여기고 있으니, 하물며 짚신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라고 개탄합니다. 이익의 개탄처럼 조선 후기로 오면서 짚신 신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풍조가 생겼지만 그 이전엔 정승을 했던 선비들도 짚신을 예사로 신었을 정도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복암이 일찍이 선중 씨 집에 칠실파려안을 설치하고, 거기에 비친 거꾸로 된 그림자를 취하여 화상을 그리게 했다. 공은 뜰에 놓은 의자에 해를 마주하고 앉았다. 털끝 하나만 움직여도 초상을 그릴 길이 없는데, 흙으로 만든 사람처럼 굳은 채 오래도록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는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문집인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조선에는 이렇게 사진이란 것이 처음 등장했지만 사실은 사진이 아니라 바늘구멍상자의 유리에 비친 화상에 종이를 대고 그린 그림이지요. 이것은 사진기의 전신인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 : 바늘구멍상자)로 복암 이기양 등 실학자들이 ‘칠실파려안(漆室玻瓈眼)’이라 이름 붙이고 연구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칠실(漆室)은 ‘매우 캄캄한 방’, 파려(玻瓈)는 ‘유리’, 안(眼)은 ‘보다’를 뜻하는 것으로 '캄캄한 방에서 유리렌즈를 통해서 본다'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나라에 바늘구멍상자가 아닌 실제 사진을 찍은 것은 연행사였던 이의익 일행이 1863년 북경의 러시아인이 운영하던 사진관에서 찍은 것이라고 합니다. 또 조선에 사진관이 처음 등장한 것은 1883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한글박물관(관장 박영국)은 광복 73주년을 기려 8월 1일부터 8월 15일까지 한글의 소중함을 되새길 수 있는 광복절 기념 특별해설을 진행한다. 특별해설에서는 일제강점기 한글을 지켜내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더불어 관련 유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예정이다. 특히 조선어 말살 정책에 맞서 한글을 보존하고자 했던 주시경 선생과 조선어 학회의 노력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또 국채보상운동의 중심역할을 했던 ‘대한매일신보’, 일제강점기 한글 전파의 1등 공신이었던 ‘딱지본 소설’, 한글이라는 이름을 널리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한 학술지 《한글》, 광복 이후 대한민국 최초의 국정국어교과서 《바둑이와 철수》 등의 유물에 대한 해설을 진행한다. 해설은 매일 낮 1시와 3시에 운영되며 국립한글박물관 2층 상설전시실 앞에서 온가족이 함께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 해설이 끝난 후에는 박물관 유물과 관련한 작은 기념품도 제공한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말은 사람과 사람의 뜻을 통하는 것이라. 한 말을 쓰는 사람끼리는 그 뜻을 통하여 살기를 서로 도와주므로 그 사람들이 절로 한 덩이가 지고, 그 덩이가 점점 늘어 큰 덩이를 이루나니 사람의 제일 큰 덩어리는 겨레라. 그러하므로 말은 겨레를 이루는 것인데 말이 오르면 겨레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겨레도 내리 나니라. 이러하므로 겨레마다 그 말을 힘쓰지 아니할 수 없는 바니라. 글은 말을 담는 그릇이니, 이지러짐이 없고 자리를 반듯하게 잡아 굳게 선 뒤에야 그 말을 잘 지키나니라. 글은 또한 말을 닦는 기계니, 기계를 먼저 닦은 뒤에야 말이 닦아지나니라.” 이는 평생 배달말을 올곧게 사랑하고 실천하고 가르치신 한힌샘 주시경 선생의 말로써 오늘은 그 주시경 선생이 1914년 세상을 뜨신 지 온네해(104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선생은 국어학자로서 우리말의 정리와 보급에 크게 힘썼지요. 그의 연구는 말글생활을 바로잡고 교육할 목적으로 행해진 것으로서 그 필요성은 이미 1897년 《독립신문》에 발표한 논설 〈국문론〉에서부터 강조되어온 것입니다. 암울한 시대에 국권을 회복하고 민족의 독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민족적 자각은 국민의 계몽을 통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마을에 가면 “국가민속문화재 제68호 제주 성읍마을 객주집”이 있습니다. 이 집은 지금의 성읍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옛 정의(旌義: 지금의 성읍) 고을의 객사(客舍)와 이웃하여 있던 객주집으로 18세기말에 지었다고 합니다. 넓은 터에 안채(안거리), 바깥채(밖거리), 창고, 대문간(이문간), 안채와 바깥채 사이에 있는 모커리가 ㅁ자형으로 자리잡고 있지요. 건물들은 모두 바람에 지붕이 날리지 않도록 새끼줄로 그물처럼 덮어 놓았습니다. 집의 가장 안쪽에 있는 안채는 제주도의 전형적인 3칸 형식입니다. 그 구성을 보면 가운데 칸에 대청, 대청 왼쪽에 부엌(정지)과 작은방(작은구들)을 두었고, 오른쪽에 안방(큰구들)과 곡물을 보관해 두던 고팡을 두었고, 안방과 대청 앞으로는 반칸 툇마루를 두었습니다. 문을 들어서 오른쪽 곁에 있는 바깥채는 안채와 비슷한데 농기구와 마소에 물을 먹이던 돌구유, 객주집일 때 쓰던 돈궤를 보관하고 있어 농가와 객주로서 특징을 함께 보이고 있지요. 창고가 있는 자리에는 가축을 이용해 곡식을 찧던 말방애가 있었지만 지금은 헐어서 볼 수가 없는데 집 안에 이와 같은 기구를 설치했던 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윤두서(尹斗緖, 1688~1715)가 그린 <노승도(老僧圖)>는 신선이나 불교의 고승, 나한 따위 인물을 그린 그림 곧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 가운데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이 노승도를 보면 두꺼운 장삼(長衫)을 걸친 노승이 오른손에 긴 지팡이를 짚고, 왼손에는 염주를 쥐고 맨발로 비탈길을 걸어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지요. 또 노승의 얼굴이나 손과 발은 섬세한 필치로 그린 데 견주어 옷 주름과 지팡이는 짙은 먹으로 거칠게 붓질한 선종화풍(禪宗畫風)입니다. 그림을 그려온 우리의 옛 종이는 종이를 뜨면 표면이 거칠고 보풀이 많았기에 다듬잇돌 위에 젖은 종이를 여러 장 겹쳐놓고 두드리는 표면 처리를 한 번 더 하였습니다. 또 표면에 기름, 아교, 전분 또는 금(金), 은(銀), 돌비늘[雲母], 조개껍데기 따위를 발라 표면을 처리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매우 매끄럽고 광택이 있으며 옅은 은회색을 띠고 있는 이 노승도의 바탕 종이는 그동안 은가루[銀粉]를 바른 은종이[銀紙]로 알려져 왔습니다. 그런데 이 노승도를 어떤 처리를 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표면의 성분을 분석하고 확대하여 관찰하였더니 종이표면에서 광택이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