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제주도 서귀포에 가면 명승 제43호 “정방폭포(正房瀑布)”가 있습니다. 이 정방폭포는 한라산 남쪽 비탈로부터 시작하여 흘러내리는 폭포로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폭포수가 바다로 떨어집니다. 주상절리(柱狀節理, 바위에 기둥모양의 틈새가 연이어 생긴 것)가 잘 발달한 바닷가 낭떠러지에 수직으로 떨어지는 20여m의 물줄기가 제주 남쪽 바다의 푸르른 바닷가 절경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지요. 정방폭포는 “정방관폭(正房觀瀑)”이라 하여 영주 십경으로, “정방하폭(正房夏瀑)”이라 하여 영주 십이경으로 알려져 있어 예로부터 수많은 탐방객이 이곳을 찾았습니다. 조선 숙종 때 이형상 제주목사가 제주 관내를 순시하며 제주도에서 거행되는 행사장면을 남긴 화첩인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보물 제652-6호)>에 폭포 둘레에서 배를 띄워 풍류를 즐기는 “정방탐승(正方探勝)”이란 그림이 남아 있지요. 또한 진시황의 사자 서불이 불로초를 구하러 제주에 왔다가 이곳을 지나면서 ‘서불과차(徐市過此)’라는 글자를 암벽에 새겼다는 전설이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서 서귀포라는 땅이름이 생겼다고 전하며 이곳에서 북을 두드리며 놀면 교룡(蛟龍, 뱀과 비슷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백인제가옥의 주인인 백인제(白麟濟, 1898~?) 선생은 일찍이 경성의전을 나와 1928년 일본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돌아와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수 등을 거쳐 서울 백병원을 설립한 의사입니다. 처음에 백인제 선생은 백인제 외과의원을 개업하여 의술을 베풀었으나 6·25 한국전쟁 중에 납북되는 바람에 아들처럼 키운 조카 백낙환 선생이 선생의 의업을 이어 백병원과 인제대학교를 세우게 된 것이지요. 그 백인제 선생 가족이 살던 집백인제가옥은 북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널찍한 터(2,460㎡) 위에 사랑채를 중심으로 안채와 넓은 정원이 자리하고 있으며 가장 높은 곳에는 아담한 별당채가 들어서 있습니다. 이 집을 서울시가 사들여 보수공사와 건축 당시의 생활상을 복원, 연출해 북촌 최초로 2015년 11월 18일부터 시민에게 공개하고 있는 한옥입니다.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22호) 이 집은 1907년 경성박람회 때 서울에 처음 소개된 압록강 흑송(黑松)을 사용하여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무렵 전형적인 상류주택과 구별되는 특징을 보이고 있습니다. 안채와 사랑채를 별동으로 구분한 기존 전통한옥과는 달리 두 공간이 복도로 연결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김해박물관(관장 임학종)은 7월 17일(화)부터 10월 14일(일)까지 가야누리 3층 전시실에서 특별전 ‘김해(金海)’를 연다. 국립김해박물관 개관 20주년(1998.7.29.개관)을 기념하여 마련한 이번 특별전은, 박물관의 터전인 김해의 역사와 김해사람의 역사적 여정을 정리하기 위해 준비하였다. 김해는 ‘가야의 왕도’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선사부터 근ㆍ현대까지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도시이다. 전시는 방대한 김해 역사의 이해를 돕고자 김해사(金海史)라는 큰 틀 속에, 쇠(金)ㆍ강과 바다(海)ㆍ역사(史)라는 세 가지 주제로 구성하였다. 1,000여점의 전시품 중에는 국가지정문화재 4점(국보 1점, 보물 3점), 시ㆍ도 지정문화재 5건 13점 등 지정문화재 17점이 전시된다. Ⅰ실 “김해사의 시작”에서는 쇠[金]의 나라였던 김해를 이해하기 위해 선사시대부터 가야, 통일신라에 이르는 다양한 전시품을 소개한다. 세부 주제로는 선사시대의 김해, 도구로 본 김해사람, 가락국의 시작, 가야와 김해, 가야무사의 방, 신라 400년의 김해 등이다. 주요 전시품으로는 김해 덕산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국보 제275호 도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고 운암(雲庵) 곽영민(郭永敏) 선생은 일본, 미국 ,중국 등에서 수십 차례의 전시회를열었으며, 대한민국 동양미술대전 심사위원장을 역임한 서예계의 원로 작가였다. 그뿐만 아니라 2000년 이화문화출판사를 통해서 《갑골문집(甲骨文集)》을 펴낸 바 있는 갑골문(甲骨文)의 대가다. '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남 진주시 국립진주박물관에 가면 조선시대의 명필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년~1605년)가 쓴 글씨가 소장되어 있습니다. 바로 보물 제1078-1호 “한호 필적 - 한석봉증유여장서첩 (韓濩 筆蹟 - 韓石峯贈柳汝章書帖)”이 그것입니다. 이 서첩은 선조 29년(1596)에 한호가 친구 몇 사람과 베푼 잔치에서 써서 기증한 것입니다. 3편으로 수록된 이 서첩에는 왕발의「등왕각서(騰王閣序)」, 한무제의 「추풍사(秋風辭)」, 이백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등 3편으로 모두가 즉흥으로 쓰인 작품들이지요. 한호는 짧은 인생을 즐겁게 살아가는 방편을 제시해 준 시구만을 뽑아 이 서첩에 담았습니다. 서첩 첫 장에는 작은 글씨로 주인 풍산 유씨라는 소장자의 글씨가 한쪽에 쓰여 있어 서첩은 유씨 가문에 의해 보관되어 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서첩 끝에는 당시 평소 어울려 지내던 친구들로 잔치에 참석한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시첩을 통해 한석봉과 그의 친한 이들과의 우정과 아울러 당시 임진왜란 직후 혼란한 시기에 사대부 사이에 팽배했던 인생에 대한 무상함을 절실히 느끼게 하여, 당시 시대상을 실감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요즘은 은행에 가도 도장 대신에 서명 곧 사인(sign)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 조선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수결(手決)이 있었는데 수결은 주로 관직에 있는 사람들이 증명이나 확인을 위하여 문서의 자기 이름이나 직함 밑에 도장 대신 붓으로 글자를 흘려 쓰는 일이나 그 글자를 이르던 것입니다. 그런데 수결은 주로 ‘일심(一心)’ 두 글자를 담고 있습니다. 곧, 수결의 특징은 ‘一’자를 길게 긋고 그 위아래에 점이나 동그라미 따위 기호를 더하여 자신의 수결로 정하는 것으로, ‘일심’ 2자(字)를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이는 결제를 하는데 있어서 오직 한마음으로 하늘에 맹세하고 조금의 사심도 갖지 않는다는 뜻을 드러냅니다. 수결에 관해 전해오는 재미난 이야기는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과 관계된 것이 있습니다. 이항복의 수결은 다만 ‘一’자만 쓰여 있을 뿐 그 위아래에 아무런 점도 없었지요. 그런데 이항복의 수결이라고 하는 문서가 나왔고, 이 문서가 이항복의 것이냐를 두고 시끄러웠습니다. 하지만 이항복의 수결에는 ‘一’자 왼쪽과 오른쪽 끝에 바늘구멍이 뚫려 있음이 확인되어 문서의 진위는 곧 가려졌다고 합니다. 문서를 위조한 사람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그 어떤 대가의 제 아무리 뛰어난 찬사로도, 그림으로도, 사진으로도 결코 당신의 본질을 표현해내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행여 부정이라도 탈까봐, 흠집이라도 생길까봐, 당신의 그 해맑은 민낯조차도 가까이 들여다볼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물든 나의 시선만으로도 충분히 오염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위는 <산너머의 야생화 산책> 블로그에 올라있는 “당신이 그 해오라비난초군요?”라는 글 일부입니다. 해오라비난초는 7월 중순부터 8월말까지 그 모습을 보여주는 우리나라 중부와 남부 습지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해오라기 새를 닮아서 붙은 이름이지요. 얼마나 귀하고 사랑스러우면 행여 부정이라도 탈까봐 그 해맑은 민낯조차도 들여다볼 수가 없다고 말할까요? 그도 그럴 것이 해오라비난초는 꽃말이 “꿈에서라도 만나고 싶다”라고 할 만큼 예쁘고 신비스러운 꽃으로 멸종위기 야생식물 2급으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쁜 꽃을 소유하고 싶다는 그릇된 욕심에 마구 캐가 자생지가 사라지기 일쑤라 합니다. 더구나 이 꽃은 꽃이 필 무렵 번식용 뿌리에 내년에 자람을 이어갈 알뿌리가 커가는데 이때 번식용 뿌리가 다치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명은 글귀나 외며 사리에 어둡고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선비로서 병법에는 문외한인데 이렇게 무대에 올라 망령되이 대장으로 추대되니 이미 흐트러진 군사의 마음을 수습하고 여러 동지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을까 두렵다. 그러나 오직 마땅히 피를 뿌리고 진군한다면 조금이나마 임금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을 것 같기에 이달 11일 군사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우리 도내의 모든 사람들은 아비는 그 자식을 깨우치고 형은 그 동생을 도와 의병을 규합하여 함께 일어나자.” 이는 《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1592년) 7월 9일(음력 6월 1일) 기록에 나온 것으로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이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키며 한 말입니다. 고경명은 나이 많은 문신이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우두머리로 추대하자 사양하지 않았습니다. 《선조수정실록》 기록에 따르면 격문을 여러 고을에 전하였는데 글이 격렬하고 절실하였으므로 이를 본 사람들이 외우며 널리 전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선비와 백성이 많이 따라 의병 6천여 명을 순식간에 모았습니다. 고경명은 관군과 함께 금산성에 들어간 왜적을 공격하였으나 왜적이 관군의 허약함을 알고 공격하자 싸울 것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광주광역시 남구 대촌동 칠석마을 일대에서는 “광주칠석고싸움놀이”가 전승되는데 정월 대보름 앞뒤에 행해지는 격렬한 남성집단놀이지요. 고싸움놀이는 일제강점기 때인 1940년 무렵 맥이 끊겼다가 1969년 복원하여 대구에서 열린 제10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 으뜸상인 대통령상을 받았습니다. 이후 1970년에 국가무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지요. 고줄은 줄머리에 둥근 고를 만들어 세우고 단단하게 하기 위해서 대목을 속에 넣어 팔뚝만한 동아줄로 칭칭 감아 고줄이 빳빳하도록 하고, 둥글게 구부려 묶어서 고몸체를 만들지요. 고몸체도 단단해야 하므로 큰 통나무를 속에 넣고 동아줄로 감아 곧은 줄을 만듭니다. 고머리나 고몸체 줄은 사람이 걸터앉아도 두 다리가 땅에 닿지 않을 정도로 큽니다. 놀이꾼은 줄패장, 고를 메는 몰꾼, 고의 몸과 꼬리를 잡는 꼬리줄잡이, 풍물패 따위로 이루어지는데 우두머리인 줄패장은 고 위에 앉아 싸움을 이끌고, 부장들은 깃발을 휘두르지요. 양쪽의 고가 서로 접근하면 고를 높이 들었다 내렸다 하며 싸움이 시작되며, 상대방의 고를 덮쳐 땅에 닿게 하면 이깁니다. 고싸움은 줄다리기와 마찬가지로 풍요를 기원하는 농경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난해 말 서울 한강에 30번째 다리인 구리암사대교가 개통됐습니다. 지금 공사 중인 월드컵대교가 2020년 완공되면 한강을 가운데 두고 서울의 남북이 무려 31개의 다리로 하나가 됩니다. 그런데 이 많은 다리 중 가장 먼저 놓은 것은 사람이나 자동차가 다니는 인도교가 아니라 기차 전용 한강철교입니다. 한강 북쪽 용산역과, 한강 남쪽 노량진역을 잇는 길이 1,110m의 이 한강철교는 1900년 오늘(7월 5일)에 처음 개통되었으니, 올해로 그 나이가 118살이 되었습니다. 한강철교는 서울과 인천을 잇는 경인선 철도를 개통하기 위해서 놓은 다리입니다. 경인선을 개통하기 위해선 노량진에서 한강을 건너 남대문역(현 서울역)까지 갈 수 있는 다리가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처음 경인선 철도를 놓기 시작한 건 미국의 제임스 모스였는데 막대한 돈이 들어가 이 사업을 감당하지 못하자 사업권을 반납하고 맙니다. 이후 일본자본에 의해 경인선과 한강철교가 완공되었습니다. 원래 한강철교는 철도교 옆으로 사람이 다닐 수 있는 보도도 함께 놓기로 계획되었는데, 건설비가 많이 든다는 이유 때문에 철도 전용 다리로 완공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