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어제는 사월 초파일 “부처님오신날”로 온 나라는 연등축제와 법요 봉축식 등이 활짝 펼쳐졌습니다. 정부는 올해부터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을 개정해 공휴일인 ‘석가탄신일(음력 4월8일)’의 이름을 바꿔 ‘부처님오신날’로 부릅니다. 한자말이 아닌 우리말로 친근하게 이름을 바꾼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오신날’이 되면 온 나라 어디서건 화려한 연등회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유래는 무엇일까요? 신라 때의 팔관회(八關會)에서 유래한 연등놀이(관등놀이)는 악한 기운을 물리치고 풍요를 비손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것이 고려 후기에 ‘부처님오신날’의 행사로 굳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연등’하면 연꽃으로 불을 밝히는 것으로만 생각하는데 실제론 다양한 모양의 등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연등회가 연꽃 ‘연(蓮)’ 자를 쓰는 것이 아닌 불탈 ‘연(燃)’ 자를 쓰는 데서 알 수 있습니다. ‘불을 밝히는 등’이란 뜻을 가지고 있어 꼭 연꽃 만으로 등을 만드는 것이 아니지요. 불교에서 ‘부처님오신날’에 불을 밝히는 까닭은 불을 켜는 것이 곧 깨달음을 얻어 세상을 밝히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로는 ‘난타’라는 여인의 일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전주역사박물관에 가면 국가민속문화재 제115호 “이형 부인 동래정씨 의복 (李泂 夫人 東萊鄭氏 衣服)”이 있습니다. 이 옷의 주인 동래정씨는 전주이씨 고림군(高林君)의 손자인 증(贈) 좌찬성(左贊成) 이형의 부인으로 정경부인이었으며, 조선 선조 때 죽었습니다. 1941년 경기도 시흥시 금불암 옆의 동래정씨(?∼1583) 무덤을 이장할 때 관속의 옷함에서 발견된 것들입니다. 유물은 명주솜누비장옷 1점, 명주솜누비치마 2점, 무명솜누비치마 1점, 바지 1점이지요. 이 가운데 명주솜누비장옷은 솜을 두어 2㎝ 간격으로 누빈 넉넉한 크기로 문화재로 지정했을 때 ‘명주납의직령포’로 불렀는데 장옷으로 고쳤습니다. 유물의 길이는 120㎝, 화장은 103㎝, 품은 70㎝입니다. 깃은 좌우 섶 안쪽으로 들여 달린 목판깃으로 깃 너비는 13㎝이고 4㎝ 좁은 너비의 동정이 달려있지요. 장옷은 조선시대 여자의 대표적인 포(袍)로서, 여자 아이부터 성인 여성들까지 널리 입은 의례복인 동시에 외출복입니다. 사철 입었으므로 모시 홑장옷에서부터 솜누비장옷, 솜장옷에 다량한 종류가 있습니다. 신윤복(申潤福: 1758∼?)의 풍속화에서 여성들이 외출할 때 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전화> - 극장에 온 손님의게 전화가 올 때, 그것을 전달하는 사람이 소래를 버럭 질러서 그 사람의 일홈을 부를 때 당자는 (더구나 여자) 퍽 불쾌할 것이다. 여긔에는 완전치는 못하나마 조선 극장에서 하는 방식이 조흘 것이다 스쿠린 엽 기둥을 뜰코서 유리등을 끼여놋코 그 유리에 불을 사람의 일홈을 써 놋코 전등으로 신호하는 방식이다.” 일제강점기 잡지 《별건곤》 제5호(1927년 03월 01일)에 나오는 “극장만담(劇場漫談)”이란 제목의 글입니다. 1920년대에는 일반인이 전화기를 쓸 수가 없어서 관영전화를 써야 했는데 극장에 설치해놓고 관객에게 전화가 오면 바꿔주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영화 상영 중이니 관객의 이름을 크게 불렀을 것이고, 그 탓에 이름을 불린 사람은 불쾌했겠지요. 그런데 조선극장에서는 그렇게 큰 소리로 관객을 부르지 않고 영상막(스크린) 옆의 기둥 유리에 불을 넣고 이름을 볼 수 있게 했던 모양입니다. 조선에 처음 들어온 전화기는 1882년 청나라에 전기 기술을 배우러 갔던 유학생 ‘상운’이 가져 온 것이라 하지요. 이로부터 14년이 흐른 뒤인 1896년에야 덕수궁 안에 전화기가 설치됐습니다. 처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한글박물관(관장 박영국)은 오는 15일 세종 탄신 621주년을 기려 3천 6백종 한글 글꼴의 정보를 제공하는 누리집 ‘한글꼴 큰사전’을 국민에게 공개할 예정이다. 2016년부터 2년에 걸쳐 문체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KOCCA)이 국립한글박물관의 수요 제기에 따라 문화기술연구개발지원사업의 하나로 추진,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가 과제를 수행하였다. ‘한글꼴’은 한글 폰트(Font, 이하 글꼴)를 가리키며, 사전처럼 글꼴 정보를 제공한다는 의미로 작년에 진행한 블로그와 누리소통망(SNS) 이름 공모전에서 뽑았다. 현재 국내 한글 글꼴은 6천여 종이 유통되고 있지만 통합 사이트의 부재로 일반인이 찾고 싶은 글꼴이 있거나 해당 글꼴의 정보를 확인하려면 글꼴 업체별 누리집을 방문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하지만 ‘한글꼴 큰사전’은 일반인이 길거리 간판이나 광고, 신문, 잡지 등에서 찍은 글꼴의 사진이나 스캔 영상을 올려 글자를 추출하면, 그것과 형태가 가장 유사한 글꼴을 찾아준다. 이는 전통적인 영상 분석기술과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딥러닝(사물이나 데이터를 모으거나 분류하는 데 사용하는 기술) 기술을 접목한 것으로, 정면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지난해 5ㆍ18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시민들과 함께 부른 백기완 원작시, 황석영 개사, 김종률 작곡의 “님을 위한 행진곡”입니다. 오늘은 5ㆍ18민주항쟁 제38돌, 다시 한 번 “님을 위한 행진곡”을 조용히 읊조려 봅니다. 또 아버지 영정을 들고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는 다섯 살 아이의 서글픈 사진 한 장을 쓰다듬어 봅니다. 5ㆍ18민주항쟁은 폭도들의 반란 또는 북한군의 침투가 있었다는 등 왜곡된 정보 속에 오랫동안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진실은 서서히 밝혀지기 시작합니다. 5ㆍ18민주항쟁 37돌 기념식을 계기로 이젠 5ㆍ18민주항쟁은 ‘불온한 국가권력에 맞선 시민들의 항쟁’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무고한 시민이 총과 칼에 죽어갔음이 분명해졌지요. 아직 발포명령자가 공식적으로 밝혀지지 못했지만 5ㆍ18민주항쟁은 한국 민주화를 이끈 소중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 전통음악에는 민속 음악에 속하는 기악 독주곡 형태의 하나로 “산조(散調)”라는 것이 있습니다. “산조”는 장단의 틀 말고는 정해진 것이 없으며, 서민들의 슬픔과 기쁨 등의 생활 감정을 담았는데 19세기 말 김창조에 의해 가야금산조가 맨 먼저 생겼습니다. 이어 생긴 것들엔 거문고산조, 대금산조, 해금산조, 그리고 아쟁산조가 있지요. 그 가운데 ‘백악지장(白樂之丈)’ 곧 모든 음악의 우두머리라고 일컬어지는 거문고의 산조는 1896년(고종 33)에 당시 20살이었던 백낙준(白樂俊)이 처음으로 연주했습니다. 백낙준 명인이 틀을 잡은 거문고산조는 백악지장인 거문고로 천한 음악을 연주한다는 반발과 함께 초기에는 빛을 보지 못하다가 개화의 물결을 타고 점차 음악적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하였지요. 이후 거문고 산조는 신쾌동(申快童, 본명 신복동, 1910-1977) 명인에 의한 신쾌동류 거문고산조, 한갑득(韓甲得, 1919-1987) 명인에 의한 한갑득류 거문고산조 두 유파로 발전해왔습니다. 신명이 분출하는 듯하다는 신쾌동류 거문고산조는 현재 국가무형문화재 제16호 거문고산조 보유자 김영재 명인에 의해 이어지고 있지요 또 구수하면서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강원도 철원군 화개산에는 신라 경문왕 5년(865) 도선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오래된 절 ‘도피안사’가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도선대사가 철조비로자나불을 만들어 철원의 안양사(安養寺)에 모시려고 했으나 운반 도중에 불상이 없어져서 찾아보니 도피안사 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하지요. 그래서 이곳에 절을 세우고 불상을 모셨다고 합니다. 이 불상이 바로 국보 제63호 <철조비로자나불좌상>입니다. 신라말에서 고려초에는 철 곧 쇠로 만든 불상이 크게 유행했는데, 이 작품은 그 대표적인 예로, 불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臺座)까지도 쇠로 만든 보기 드문 작품이지요.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갸름한 얼굴은 인자하고 온화하게 보이는데 몸에는 굴곡의 표현이 없고, 양 어깨를 감싼 옷에는 평행한 옷주름이 형식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몸에 견주어 가냘픈 손은 가슴 앞에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양으로 비로자나불의 일반적인 손 모습입니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는 이때에 가장 유행한 모양으로, 상대와 하대에는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중대는 8각을 이루고 있습니다. 참고로 ‘비로자나불’은 햇빛처럼 불교의 진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세종 장헌영문예무인성 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의 이름이 도(祹)요, 자는 원정(元正)이니, 태종 공정 대왕(太宗恭定大王)의 셋째 아들이요, 어머니는 원경 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다. 태조(太祖) 6년 정축 4월 임진에 한양(漢陽) 준수방(俊秀坊) 잠저(潛邸) 에서 탄생하였으니...” 《세종실록》 총서에 나오는 세종임금의 태어난 내력입니다. 이로써 세종이 태어난 곳은 준수방이며, 어렸을 적 이름이 “도(祹)”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준수방(俊秀坊)이라 함은 조선 초기부터 있던 한성부 북부 12방 중의 하나로서, 현재의 종로구 통인동, 옥인동 일대로 경복궁 서쪽문인 영추문길 맞은편 의통방 뒤를 흐르는 개천 건너편인데, 청운동을 흘러내리는 한줄기 맑은 물과 옥인동으로 내려오는 인왕산 골짜기의 깨끗한 물줄기가 합쳐지는 곳입니다. 어떤 이는 세종대왕이 경복궁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태어날 당시 아버지(이방원)가 왕자 신분이었기에 궁궐이 아닌 사가(私家) 준수방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장남이 아닌 세종이 임금에 오를 수 있었던 까닭은 《세종실록》 즉위년(1418년) 9월 4일 기록에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그저 꽃인데 바라보기만 하면 볼 때마다 ‘연령(延齡)’ 곧 수명을 연장한다는 다시 말하면 젊어진다는 꽃이 있습니다. 높은 산 깊은 골이 아니면 만나볼 수 없는 꽃 ‘연령초(延齡草)’가 바로 그것입니다. 늘씬한 키에 얼굴이 하얀 귀공자가 풍성한 초록색 망토를 걸친 듯한 풍모라고들 합니다. 실제 연령초를 보고 젊어지는 경험을 해본 적이 없는 제게는 오히려 ‘왕삿갓나물’이나 큰꽃삿갓풀’ 같은 토박이말 이름이 정겹습니다. 연령초는 백합과 연령초속의 여러해살이풀인데 5~6월 여름이 시작되면서 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연령초는 러시아 동쪽 아무르, 우수리, 사할린, 캄차카와, 중국 동북부, 한국, 일본 등 주로 동북아시아에 자랍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강원, 경기, 충북, 경북, 지리산 이북의 높은 산 숲 속 계곡 근처 습한 곳에 드물게 자라지요. 산림청에서는 희귀 및 멸종위기 식물로 선정하여 관리하고 있습니다. 한 학자가 자신의 책에 우리말 표기법과 달리 ‘연영초’라고 잘못 기록하여 ‘연영초’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지요. 뿌리줄기를 말려서 연영초근이라하여 위장약이나 거담제로 쓴다고 하지요. 꽃이 우아하고 탐스럽지만 잎은 독성이 있어서 생으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지난해 한 은행은 채용비리 의혹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습니다. 그런데 부정채용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겠다며 10년 동안 보지 않던 필기시험을 부활했다고 하지요. 하지만 이마저도 관리감독 부실로 부정행위가 잇따랐다는 언론보도입니다. 이런 부정시험이 조선시대 벼슬아치를 뽑던 과거시험에는 더 심했다고 《성종실록》과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峰類說)》,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 한양의 풍물을 노래한 ‘한양가’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먼저 과거장에 들어갈 때 예상답안지와 참고서적 등이 들어 있는 책가방 곧 “책행담(冊行擔)”을 가지고 들어갑니다. 이는 커닝의 고전적인 방법이지요. 따라서 과거장이 마치 책가게 같았다고 합니다. 또 과거장에 들어가는 사람 중 실제 답안지를 내는 사람은 턱없이 적었는데 예를 들면 정조 24년에 치른 과거는 10만 명 정도가 들어가 답안지는 3만 명만 냈다고 합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요?\ 응시생인 양반집 자제들은 과거장에 여러 명의 조수를 데리고 들어가는데 글을 짓는 “거벽(巨擘)”, 글씨를 써주는 “서수(書手)”가 따라 들어갑니다. 정작 과거를 보는 사람은 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