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의 다섯 번째로 하늘이 차츰 맑아진다는 뜻을 지닌 “청명(淸明)”이며, 내일은 설날, 단오, 한가위와 함께 4대 명절의 하나로 지냈던 한식(寒食)입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청명조(淸明條)의 기록을 보면, 이날 버드나무와 느릅나무를 비벼 새 불을 일으켜 임금에게 바치며, 임금은 이 불을 정승과 판서를 비롯한 문무백관 그리고 360 고을의 수령에게 나누어줍니다. 이를 ‘사화(賜火)’라 하는데 수령들은 한식날에 다시 이 불을 백성에게 나누어주지요. 묵은 불을 끄고 새 불을 기다리는 동안 밥을 지을 수 없어 찬밥을 먹는다고 해서 한식(寒食)이라고 했습니다. 농사력으로는 청명 무렵에 논밭의 흙을 고르는 가래질을 시작합니다. 청명은 농사력의 기준이 되는 24절기의 하나로 날씨와 관련된 믿음이 많지요. 청명이나 한식에 날씨가 좋으면 그 해 농사가 잘 되고 좋지 않으면 농사가 잘 되지 않는다고 점쳤습니다. 바닷가에서는 청명과 한식에 날씨가 좋으면 어종이 많아져서 어획량이 증가한다고 하여 날씨가 좋기를 바랐습니다. 이에 견주어 경남 사천에서는 청명의 날씨가 좀 어두워야 그 해 농작물에 풍년이 들고, 너무 맑으면 농사에 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고 운암(雲庵) 곽영민(郭永敏) 선생은 일본, 미국 ,중국 등에서 수십 차례의 전시회를 열었으며, 대한민국 동양미술대전 심사위원장을 역임한 서예계의 원로 작가였다. 그뿐만 아니라 2000년 이화문화출판사를 통해서 《갑골문집(甲骨文集)》을 펴낸 바 있는 갑골문(甲骨文)의 대가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가면 국보 제152호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이 있습니다. 조선중기 이래 국정의 핵심 업무를 담당했던 으뜸 의결기관인 비변사(備邊司)에서 날마다 업무 내용을 기록한 필사본 책입니다. 비변사의 줄임말이 ‘비국(備局)’이었기 때문에 《비국등록(備局謄錄)》이라고도 하지요. 임진왜란 이전의 《비변사등록》은 모두 불탔고, 현재는 1617년(광해군 9)부터 1892년(고종 29)까지 276년간의 기록 273책이 남아 있습니다. 등록은 1년 1책으로 작성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사건이 많을 때에는 2책 또는 3책으로 나누어 작성하기도 했습니다. 비변사는 군사와 관련된 중요 업무를 의논해 결정하던 회의 기구였는데 임진왜란을 계기로 확대, 강화되어 국방ㆍ외교는 물론 국정 전반에 관한 문제를 결정하는 최고의 국정 의결기관으로 바뀌었지요. 《비변사등록》은 비변사에서 회의가 있을 때마다 낭청(郎廳, 조선 후기 비변사 등의 실무담당 종6품 관직)이 입회해서 날마다 회의 상황과 그 의결 상황을 직접 기록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원본은 낭청이 직접 붓으로 쓴 필사본 단 한 질뿐입니다. 《비변사등록》은 조선후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제주시 봉개동에는 <제주4.3항쟁기념관>이 있습니다. 어두침침한 제1관 ‘역사의 동굴’은 4·3항쟁 당시 제주 사람들의 피난처였던 자연동굴들을 보여줍니다. 그 동굴의 끝 지점에 하얀 대리석 비석이 누워 있지요. 그 비석은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은 비석 곧 백비(白碑)인데 설명문에는 ‘4·3 백비, 이름 짓지 못한 역사’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름이 없어 일으켜 세우지도 못한 것입니다. <제주4·3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제주4·3특별법)>에는 ‘제주4·3사건’의 정의를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규정합니다. 정부 보고서에 따르면, 희생자 수를 2만5천~3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제주4·3위원회가 집계한 것에는 전체 희생자 가운데 10살 이하가 5.4%(772명), 11~20살은 17.3%(2464명)로, 전체의 22.7%가 20살 이하이며, 61살 이상은 6.3%(900명)입니다. 이런 희생자 비율은 당시 제주도민들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판소리는 소리꾼이 고수(鼓手)의 북장단에 맞추어 긴 음악적 이야기를 소리(唱, 노래)와 아니리(말)로 엮어 발림(몸짓)을 엮어가며 연행하는 장르임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꾼의 소리에는 “목”이라는 말이 있지요. 1966년 박헌봉(朴憲鳳)이 펴낸 《창악대강(唱樂大綱)》에 따르면 생목 · 속목 · 겉목 등 37 가지의 ‘목’이 있다고 합니다. 다만 그런 목들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타고난 성대가 어떤 특징을 지녔는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목이 좋다’ 또는 ‘목이 나쁘다’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또 둘째로 ‘목[音]을 얻었다’라고 말할 때는 득음의 경지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악적 기교를 말하는 것으로 쓰이기도 하는데, 방울목ㆍ폭각질목ㆍ감는목ㆍ던지는목ㆍ무지개목 등이 있습니다. 여기서 ‘방울목’은 임방울 명창이 즐겨 쓰던 목인데 한 음절을 여러 개의 음정으로 동그랗게 감아내는 느낌을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 ‘폭각질목’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폭각질’ 곧 딸국질이 날 때 나오는 소리처럼 한 음절이 짧게 끊어져 들리는 것으로 순간적인 긴장을 느끼게 한다고 하지요. 그런데
[우리문화신문= 김영조 기자] 터졌구나 터졌구나 / 독립성이 터졌구나 15년을 참고참다 / 이제서야 터졌구나 피도 대한 뼈도 대한 / 살아 대한 죽어 대한 잊지마라 잊지마라 (2절 줄임) –탄운 이정근 의사 지음 ‘3.1독립가’ - 경기 화성 발안 3·1 독립만세 항쟁의 선구자인 탄운 이정근(灘雲, 李正根 1863-1919) 의사(義士) 순국 99주기 추모제가 어제(31일) 낮 11시, 향남읍 소재 탄운 선생 창의탑 (향남읍 삼천병마로 283-6번지)에서 열렸다. 사단법인 탄운 이정근의사기념사업회가 주관한 어제 추모제에는 광복회 경기도지회 안소헌 지회장을 비롯한 지역유지, 탄운장학금 수여자와 학부모 등 150여명이 모여 탄운 선생의 숭고한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겼다. 이날 추모제는 탄운 선생에게 올리는 추모제례로 초헌례(유족대표 이호원), 아헌례(광복회지회장 안소헌), 종헌례(탄운이정근의사기념사업회 회장 김겸)의 예를 갖춘 제례를 중심으로 이어졌으며 이어 헌화, 분향의 시간을 가졌다. 한편, “1919년 3월 31일 발안 장날을 기해 1천여 명의 시위 군중을 이끌다 현장에서 일헌병에 총검에 의해 순국의 길을 걸은 탄운 이정근 의사의 거사는 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근자에 들으니 내 글씨가 세상눈에 크게 괴(怪)하게 보인다고 하는데 이 글씨를 혹시 괴하다고 헐뜯지나 않을지 모르겠소.... 사람들이 비웃건 꾸지람하건 그것은 그들에게 달린 것이외다. 해명해서 조롱을 면할 수도 없거니와 괴(怪)하지 않으면 글씨가 되지 않는 걸 어떡하나요." 이는 유홍준 교수가 펴낸 《완당평전(학고재)》에 나오는 추사 김정희의 말입니다. 추사 살았을 당시에도 추사 글씨가 괴이하다고들 생각했는가 봅니다. 그것은 평소에 보지 못했던 오직 그만의 글씨체를 이룩했었기에 그런 얘기를 했었는지도 모릅니다. 추사는 또 “서예가는 모름지기 팔뚝 아래 309개의 옛 비문을 완전히 익혀서 간직하고 있어야 된다.”라고 했다지요. 역대 중국에서 있었던 비문 중에서 예서체로 된 비문이 모두 309개라고 하는데 그 309개를 다 자기 걸로 익숙해져야 제대로 된 글씨를 쓸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추사가 벼루 10개 밑창 내고, 붓 1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자신이 ‘이번에는 곽유도비 글씨체로 써야겠다.’ 하고 생각하면 곽유도비를 옆에 두고 보지도 않아도 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또 보지 않고 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복궁 근정전 월대 모서리와 창덕궁 대조전, 창경궁 명전전, 덕수궁 중화전, 경희궁 숭정전 등 각 궁궐의 정전(正殿) 앞에 가면 조금씩 모양은 다르지만 대체로 청동빛깔을 띈 넓적한 독이 놓여있습니다. 이름하여 “드므”입니다. 이를 어떤 이들은 향로나 쓰레기통으로 잘못 알기도 합니다만 사실은 화재를 막기 위한 벽사(辟邪)시설입니다. 궁궐은 나무로 지은 건축물이어서 화재에는 치명적이기 때문에 이를 예방하기 위해 놓은 것이 드므입니다. 옛날엔 ‘불’을 관장하고 화재를 일으키는 재앙 화마(火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화마는 아주 험상궂게 생겼는데, 정작 자신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지요. 이 화마가 어느 날 한 집에 불을 내려고 내려왔다가 드므의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너무나 험상궂게 생긴 것에 기겁을 하여 도망쳤다는 얘기가 전해집니다. 그래서 나무로 된 중요한 건축물들에는 이 드므를 설치하게 된 것이지요. 물론 이 드므에는 원래 물이 담겨 있었는데 화재 초기에 작은 불을 끄는 쓰임새도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쓰임새에 따라 겨울에는 물이 얼지 않도록 저어주었고, 드므 밑에 불을 지펴 얼지 않도록 했다고도 전합니다. ‘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사진”이란 것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물체의 형상을 감광막 위에 나타나도록 찍어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게 만든 영상”이라고 풀이해 놓았다. 다시 말하면 물체로부터 오는 빛을 사진기 렌즈로 모아 필름이나 건판 따위에 상을 맺도록 하여 이것을 다시 현상액으로 음화(陰畫)를 만들고 이를 인화지에 양화(陽畫)로 바꿔내 사람들이오랫동안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전통적인 방식의 사진이다. 그리고 그것은 보통 멈춰 있다고 하여 정사진(停寫眞, still photograph)이라고 하며 이에 견주어 움직이는 영상물 곧 동영상도 있다. 그런데 여기 일반적인 정사진과는 다른 “입체사진(立體寫眞)”이란 것도 있다. 지금 사람들에겐 생소한 이 입체사진은 원근감에 의해 입체적으로 떠올라 보이는 사진이란 것인데 두 눈의 간격으로 인해 뇌가 인식하는 원근감을 활용하여 만들어진 사진이다. 6.5~7㎝의 간격을 두고 촬영한 두 장의 사진을 나란히 놓고 입체경을 통해 두 눈이 각각의 이미지를 볼 수 있게 하여 입체감을 느끼게 한다. 1851년 런던의 만국박람회에서 소개된 입체경은 대중들을 매료시켰고 1860~90년대의 서구사회는 입체사진의 열풍에 휩싸인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날더러 어찌하라고 / 난 어찌하라고 / 진달래는 저렇게 / 연분홍으로 확 피어나는가”라고 조병화 시인은 진달래를 노래합니다. 그런가 하면 “그대 이 봄 다 지도록 / 오지 않는 이 / 기다리다 못내 기다리다 / 그대 오실 길 끝에 서서 / 눈시울 붉게 물들이며 / 뚝뚝 떨군 눈물꽃 / 그 수줍음 붉던 사랑”하고 박남준 시인은 눈물꽃을 떨어뜨립니다. 또 김소월 시인은 “나 보기가 역겨워 / 가실 때에는 / 말없이 /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 영변에 약산 진달래 꽃 / 아름 따다 가실 길에 / 뿌리오리다”라며 조용히 가슴을 칩니다. 봄, 이제 바야흐로 흐드러지게 피어 꽃보라를 일으키고 꽃멀미에 취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온 산하를 뒤덮은 꽃천지 속에서도 두견새가 피를 토한 자국에서 꽃이 피었다고 하여 ‘두견화(杜鵑花)’라고도 하는 진달래는 우리 겨레가 무척이나 사랑하는 꽃입니다. 가난하던 시절에는 진달래가 필 즈음이면 대체로 먹을 양식이 떨어질 때지요. 그래서 굶주린 아이들은 진달래꽃을 따먹으며 허기를 달래야 했고 그 탓에 진짜 꽃이란 의미로 참꽃이라고 란 이름으로도 불렸습니다. 4월이 되면 온나라가 벛꽃축제로 들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