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죽순은 5월에 움이 트기 시작하여 비가 오면 하루 1미터나 자라기도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쑥쑥 자라 ‘우후죽순(雨後竹筍)’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죽순의 한자어 순(筍)은 중국어 발음이 손(孫)과 같아 자손을 뜻하기도 하여 동양의 옛그림에서는 축하나 비손하는 의미로 자주 쓰이기도 했으며, 상형 청자의 소재로도 사랑 받았습니다. 죽순이 상형 청자의 소재로 쓰인 예로는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의 보물 제1931호 “청자 죽순모양 주전자”도 있습니다. 이 주전자는 죽순모양의 몸체에 대나무 가지를 본뜬 손잡이와 귀때부리(주둥이)를 붙였으며 뚜껑은 죽순의 끝을 잘라 올려놓은 모습입니다. 죽순의 윤곽선은 얕은 돋을새김(반양각)으로, 잎맥은 가는 오목새김(음각선)으로 정성껏 새겼습니다. 특히 이 주전자는 현재 지정된 다른 상형청자에서 보기 드문 죽순이라는 소재를 써서 빚었다는 점과 빙렬(氷裂, 도자기의 유약에 금이 생긴 것)이 거의 없는 완벽한 표면은 물론 은은한 광택이 나는 유색 등 질적인 완성도 면에서 뛰어난 특징을 보입니다. 또한 몸체, 귀때부리와 손잡이 그리고 돋을새김된 죽순 잎 등이 함께하는 완벽한 아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에 가면 시도기념물 제24호 “별방진(別防鎭)”이 있습니다. 별방진은 1510년(중종 5) 제주목사(濟州牧使) 장림(張琳)이 왜선의 정박지가 근처의 우도(牛島)에 있어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김녕방호소(金寧防護所)를 이곳으로 옮겨 다시 쌓은 돌성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주목조에 보면 별방성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 2,390자(약 724m), 높이 7자(약 2m)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서・남 3문과 문 위에는 초루(성문 위에 세운 망루)가 있었으며, 옹성(甕城, 성문 밖에 반원형(半圓形)이나 삼각형으로 쌓은 작은 성) 3개소, 치성(雉城, 성곽 일부분을 네모나게 돌출시켜 적들을 손쉽게 진압할 수 있게 만든 것) 7개소가 있었으며, 성의 형태는 동서의 길이가 긴 타원형으로 둘레 1,008m, 높이 3.5m 정도입니다. 성 안에는 진사(鎭舍, 관아 건물), 객사(客舍, 각 고을에 둔 관사), 사령방(각 관아에서 심부름하던 사람들이 모여있는 방), 군기고(軍器庫 무기를 보관했던 창고), 대변청(待變廳, 전함과 군기를 만들던 곳)을 비롯 흉년에 백성에게 곡식을 빌려주는 별창(別倉)을 갖춘 것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칠선계곡ㆍ문수계곡과 함께 지리산 3대 계곡 가운데 하나인 심원계곡 부근 해발 750m 자락에는 ‘심원마을’이 있습니다. 하늘 아래 첫 동네라고 불리는 이곳은 일제강점기 때 화전민들이 모여 약초를 캐거나 벌을 키우며 생계를 꾸려왔는데 마을 주변은 멸종위기종인 반달가슴곰의 주요 서식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자연생태계 보존가치가 뛰어난 지역으로 국립공원 용도지구상 자연보존지구이자 반달가슴곰 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있지요. 그런데 이 마을은 1987년 지리산관광도로가 개통되면서 식당ㆍ펜션 등 상업시설이 생겨 자연이 훼손됨은 물론 각종 환경오염을 유발하는 지역으로 꼽혔습니다. 이에 정부가 심원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환경보전에 대한 지속적인 설득과 동의를 구했고 주민들은 철거를 허락하게 됩니다. 이윽고 사업비 211억원을 들여 마을안 건물과 포장도로 등을 철거하는 등 복원 사업을 진행했습니다. 또 이곳에 사스레나무, 국수나무, 병꽃나무 같이 지리산에서 자생하는 나무 9종 4만 8065그루를 심었지요. 그에 더하여 새로 심은 나무들의 자람 과정과 동물들의 활동을 관찰할 실시간 영상 모니터링 시스템(심원마을 폐쇄회로 텔레비전)도 구축했습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수ㆍ경칩이 지나고 춘분이 다가오는 지금쯤 온 메(산)와 들은 소란스러워집니다. 어쩌면 비발디의 사계가 자연 속에서 신나게 연주되고 있음입니다. 가끔 꽃샘바람이 심술을 부리기도 하지만 얼음을 뚫고 봄을 알리는 설중매나 얼음새꽃(복수초), 노루귀, 변산바람꽃들의 아우성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또 그 아우성의 대열에 나도 있다고 고개를 내미는 들꽃에는 신비스럽게 푸른색의 꽃이 피는 키 작은 아이 “현호색”도 있습니다. 현호색(玄胡索)이란 이름은 씨앗이 검은 데서 검을 현(玄) 자가 붙었고, 중국의 하북성 및 흑룡강성 쪽에서 많이 자라 오랑캐 호(호) 자가 붙었으며, 새싹이 돋아날 때 매듭 모양으로 보인다 하여 꼬일 색(索) 자가 붙었다고 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현호색의 꽃 모양이 마치 종달새 머리와 비슷하다고 해서 그리스어로 종달새를 뜻하는 코리달리스(Corydalis)라는 이름을 붙였다는데 그래서 현호색이 꽃을 필 때 종달새가 노래하는지도 모릅니다. 권혁세가 지은 《익생양술대전(학술편수관)》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자생 현호색류에는 26종이 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는 현호색을 비롯하여 ‘난쟁이현호색’, ‘털현호색’ 같은 8가지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성주사터에는 남북국시대(통일신라시대)의 스님 낭혜화상 무염(無染)의 국보 제8호 탑비가 있습니다. 낭혜화상은 무열왕의 8세손으로 애장왕 2년(801)에 태어나 열세 살 되던 해에 출가했으며, 헌덕왕 13년(821) 때 당나라에 유학한 뒤 문성왕 7년(845)에 귀국했습니다. 그 뒤 웅천(지금의 보령)에 있던 오합사(烏合寺)의 주지가 되어 선(禪)을 널리 알렸는데 절이 점점 크게 번성하게 되자, 임금은 ‘성주사’라는 절 이름을 내려주었지요. 낭혜화상은 진성여왕 2년(888) 89살로 입적했을 때 임금은 시호를 ‘낭혜’라 하고, ‘백월보광’이라는 탑 이름을 내렸습니다. 절터 서북쪽에 세워진 이 낭혜화상탑비는 거북 모습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릿돌을 얹은 모습입니다. 얼굴의 일부분이 깨져 있는 거북은 머리 위쪽에 둥근 뿔이 나 있고, 뒤로 째진 눈에는 눈썹이 휘말려 있으며, 입은 마치 불을 내뿜으려는 기세입니다. 등에는 선명한 이중 육각무늬를 새기고, 가운데에는 제법 굵직한 구름무늬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맨 위에 올려진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을 두르고, 그 위로 구름과 용이 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얼마 전 제천과 밀양에 큰 불이나 많은 사람이 죽는 큰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세종 때에도 한성에 큰 불이 난 적이 있었습니다. 《세종실록》 8년(1426년) 2월 15일 기록에 보면 “한성부에 큰 불이나 행랑 1백 6간과 중부 인가 1천 6백 30호와 남부 3백 50호와 동부 1백 90호가 불에 탔고, 남자 9명, 여자가 23명이 죽었는데, 타죽어 재로 화해버린 사람은 그 수에 포함되지 않았다.”라는 기록이 보입니다. 이 일 이후 세종임금은 명을 내려 소방관청인 ‘금화도감(禁火都監)’을 설치했습니다. 그리고는 집 사이에 방화장(防火墻, 불을 막는 담)을 쌓고, 곳곳에 우물을 팠으며, 초가지붕을 기와지붕으로 고쳤지요. 이 금화도감은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이 되었다가 성종 12년에는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로 고쳤습니다. 그리고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에는 ‘멸화군(滅火軍)’이란 상근 소방대원이 있었는데 불을 없애는 군사라는 말이 참 재미납니다. 정원은 50명이었고 24시간 대기하고 있다가 불이 나면 곧바로 출동해서 불을 끄는 소방관입니다. 조선에서 불을 지르는 방화(放火)는 대부분 사형으로 다스렸고 대사령(大赦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최근 시위현장에서 태극기가 이념 싸움에 쓰이는 바람에 태극기를 바라보는 눈이 좀 그렇습니다만 엄연히 태극기는 우리나라의 국기입니다. 2008년 언론에는 독립기념관이 영국국립문서보관서(National Archives)에서 확인, 발굴한 최초의 태극기 원형을 공개했다는 기사가 올랐습니다. 독립기념관이 공개한 최초의 태극기는 1882년 박영효가 일본으로 가는 배에서 만든 태극기의 원형을 그대로 그린 것으로 크기는 가로 142.41㎝, 세로 115.14㎝, 태극의 지름 81.81㎝입니다. 태극기는 우리가 익히 아는 것처럼 흰 바탕에 빨강과 파랑의 태극무늬가 있고, 네 모서리에 4괘가 있지요. 여기서 흰 바탕은 밝음과 순수, 그리고 전통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의 민족성을 나타내고 있다고 합니다. 가운데의 태극무늬는 빨강의 양(陽) 파랑의 음(陰)으로 우주 만물이 음양의 상호 작용에 의해 생성하고 발전한다는 대자연의 진리를 형상화한 것이지요. 또한, 네 모서리의 4괘는 음과 양이 서로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음(--)과 양 (―)의 조합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이며, 하늘, 땅을, 물, 불을 각각 상징합니다. 이들 4괘는 태극을 중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음력정월이 되고 경칩(驚蟄)시절이 가차우니 이번에는 맹꽁이타령이나 좀 하자. 박춘재(朴春載)의 맹꽁이 타령에는 아랫녁 맹꽁이 웃녁 맹꽁이, 삼청동장원서 다리 밋헤서 빨내하는 과부 맹꽁이 훈련원 오간수 구멍에서 집신작을 타고 안저 한숨 쉬는 홀아비 맹꽁이 남대문 박연못골에(蓮池洞) 나막신 신은 맹꽁...! 등 여러 가지의 맹꽁이가 잇더니 요새에 서울 신문계에는 안맹꽁이와 정맹꽁이가 잇는데 공교하게도 두 맹꽁이가 서로 건너다보는 집에서 일을 보게 되엿다.” 이는 일제강점기 잡지 《별건곤》 제48호 (1932년 02월 01일)에 있는 “호외(號外)의 호외(號外)”라는 기사 일부입니다.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셋째 “경칩(驚蟄)”입니다. 원래 이름은 중국 역사서 《한서(漢書)》에 보면 열 계(啓) 자와 겨울잠을 자는 벌레 칩(蟄) 자를 써서 계칩(啓蟄)이라고 되었었는데 뒤에 한(漢) 무제(武帝)의 이름인 계(啓)를 피하여 대신 놀랠 경(驚)자를 써서 경칩(驚蟄)이라 하였습니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는 “겨울잠 자던 동물은 음력 정월에 활동하기 시작하는데, 절기로는 경칩에 해당한다.”고 하여 경칩 무렵에는 개구리, 맹꽁이 등 겨울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人間軒冕斷無希(인간헌면단무희) 인간 세상의 높은 벼슬 단연코 바라지 않았고 惟願江湖得早歸(유원강호득조귀) 오직 강호에 일찍 돌아갈 수 있길 원했네 已向孤山營小屋(이향고산영소옥) 이미 외로운 산에 작은 집을 지었으니 何年實着芰荷衣(하년실착기하의) 어느 해에 실로 연잎 옷 입으려나? 이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지은 <차운겸보숙장영회이수(次韻謙甫叔丈詠懷二首)>라는 한시입니다. 귀거래(歸去來, 관직을 버리고 귀향함)에 대한 자신의 뜻을 강력하게 드러내고 있는 시입니다. 흔히 세속인들이 바라는 높은 벼슬에는 관심이 없고 현실에서 벗어나 자연에 돌아가 은자적(隱者的) 삶을 희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외로운 산에 작은 집도 지었지만 언제 그곳에 가 연잎옷을 입고 소일할 수 있을 지는 잘 모릅니다. 마지막 연에 나오는 ‘기하의(芰荷衣)’는 마름과 연꽃으로 지은 옷을 말하는데 자연에 숨어 살던 은자(隱者)들이 즐겨 입었다고 하는 옷입니다. 또 ‘고산(孤山)’은 숨어 살면서도 장가도 들지 않아 처자식도 없었던 중국 북송(北宋)의 처사 임포(林逋)가 살던 곳을 말하고 있습니다만 사실은 윤선도의 호여서 윤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