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어제(3월 2일)는 정월대보름 서울 남산 위에 둥근달이 둥실 떠올랐다. 남산골한옥마을에서 정월대보름맞이 행사가 열렸고, 남산국악당 크라운해태홀에서는 저녁 7시 30분 ‘퉁소 신아우 보존회(회장 동선본)’와 남산국악당이 공동기획한 “남산 위에 둥근달” 공연이 열린 것이다. 지난해(2017년) 여름 이북5도 무형문화재위원회는 함경남도 문화재 2호로 ‘퉁소 신아우’를 지정하고, 동선본(퉁소 연주자, 북청사자놀음 전수조교) 선생을 보유자로 인정했었다. 이후 동선본 선생이 주축이 되어 보존회를 조직하고 창단공연을 열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조금은 생소한 퉁소와 신아우. ‘퉁소’는 국악기 가운데 세로로 부는 관악기의 하나이고, ‘신아우’는 고도의 기교를 요하는 즉흥음악 ‘시나위’의 함경도의 지방 사투리라고 한다. 막이 오르기 전 캘리그라퍼 김기상 선생이 커다란 붓을 들고 흰 막에 “남산 위에 둥근달” 글씨를 거침없이 써내려간다. 그리곤 무대에는 아이들이 나아서 쥐불놀이를 흥겹게 한다. 이어서 공연은 두 번째 ’원율놀이‘, 세 번째 ’음율마당 - 퉁소 신아우‘, 네 번째 사자마당으로 마당으로 짜여졌다. ‘원율놀이’의 시작은 ‘퉁소 신아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정월대보름입니다. 정월대보름 세시풍속을 보면 먼저 초저녁에 뒷동산에 올라가서 달맞이를 하는데 맞는 달의 모양, 크기, 출렁거림, 높낮이 따위로 한해 농사를 점치기도 합니다. 또 달집태우기는 대보름날 밤에 행해지는데, 짚이나 솔가지를 모아 언덕이나 산 위에 쌓아 놓은 다음 소원을 쓴 종이를 매달고, 보름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려 불을 지릅니다. 피어오르는 연기와 더불어 달맞이를 하고, 쥐불놀이와 더불어 이웃마을과 횃불싸움을 하기도 하지요. 대보름날엔 세 집 이상의 성이 다른 사람 집 밥을 먹어야 그 해의 운이 좋다고 하며, 평상시에는 하루 세 번 먹는 밥을 이 날은 아홉 번 먹어야 좋다고 믿었습니다. 더불어 이날은 아홉차리라 하여 나무를 해도 아홉짐을 했지요. 또 대보름의 명절 음식으로 복쌈이 있는데, 이는 밥을 김이나 취나물, 배추잎 등에 싸서 먹는 풍속을 말합니다. 복쌈은 여러 개를 만들어 그릇에 노적 쌓듯이 높이 쌓아서 성주님께 올린 다음에 먹으면 복이 온다고 믿었습니다. 볏가릿대 세우기는 보름 전날 짚을 묶어서 깃대 모양으로 만들고 그 안에 벼, 기장, 피, 조의 이삭을 넣어 싸고, 목화도 장대 끝에 매달아 이를 집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울 북촌은 지금 한옥마을로 인기를 끌고 있는데 북촌마을 누리집 소개를 보면, “조선시대에 조성된 양반층 주거지로서 1920년대까지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는데, 1930년대에 서울의 행정구역이 확장되고, 도시구조도 근대적으로 변형되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주택경영회사들이 북촌의 대형 필지와 임야를 매입하여, 그 자리에 중소 규모의 한옥들을 집단적으로 건설하였는데, 현재 한옥들이 밀집되어있는 가회동 11번지와 31번지, 삼청동 35번지, 계동 135번지의 한옥주거지들이 모두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한옥마을로 자리 잡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한 분이 정세권 선생이지만 이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에서울시에서는 지난 1월 기농 정세권 선생 기념사업의 원활한 추진을 위하여 한국부동산개발협회, 대한건설협회 서울특별시회, 국사편찬위원회, 종로구와 업무협약을 맺고 이들과 공동주최로 2월 27일 낮 3시 북촌 가회동 성당에서 ‘일제강점기 디벨로퍼 독립운동가 정세권 선생’에 대한 토론회를 열었다. 기농 정세권(鄭世權) 선생은 1888년 경남 고성군에서 태어나 1930년 조선물산장려회, 신간회 활동에 참여한 독립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99년 전 오늘(1919년 3월 1일)은 서울 탑골공원에서 3ㆍ1만세운동이 시작된 날입니다. 이 탑골공원은 서울에 조성된 최초의 공원이라고 하지요. 이 일대는 탑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탑골 또는 탑동으로 불렸으며, 그 탑은 다름이 아니라 국보 제2호 “원각사터10층석탑”입니다. 이곳에는 고려시대부터 흥복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유교를 유일한 지배이념으로 삼고 불교를 배척하는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에 따라 태종이 흥복사를 없애버렸습니다. 그러나 세조는 는 흥복사 자리에 절을 세우고 원각사라 바꿔 불렀지요. 그뿐만이 아니라 온 나라에서 구리 5만근을 모아 큰 종을 만들었으며, 세조 11년(1468년)에는 10층석탑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연산군은 원각사 자리에 기생과 악사를 관리하는 장악원을 세우고 원각사를 없애버렸지요. 그 결과 10층석탑과 원각사비만 남게 되었고, 이후 이곳은 탑골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그 뒤 4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1897년에 영국인 브라운의 건의로 이 자리에 파고다공원이 들어서지요. 파고다는 탑을 뜻하는 인도말입니다. 이곳에서 1919년 3월 1일 3ㆍ1만세운동이 시작됐는데 팔각정에서 독립선언서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 가면 검정 대리석에 새긴 국보 제228호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天象列次分野之圖刻石)>이 있습니다. 이 각석의 크기는 높이 200.9㎝, 두께 11.8㎝, 너비 122.8㎝입니다. 조선 왕조를 수립한 태조 이성계는 왕조의 정통성과 권위의 표상으로 새로운 천문도 갖기를 염원했는데 이에 1395년(태조 4) 권근 등 12명의 천문학자들은 천문도를 돌에 새겼고 이는 돌에 새긴 천문도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여기서 ‘천상열차분야지도’의 뜻은 '하늘의 모습을 담고, 그것을 형상화하여 차례대로 분야에 따라 그린 그림'이라는 뜻이지요. 천상(天象)은 하늘의 모습으로 별과 별자리를 말하고, 열차(列次)는 하늘을 적도를 따라 12차로 나누어 차례대로 배열한 것을 뜻하며, 분야(分野)는 북극성을 중심으로 하늘의 구역을 28수로 나누고 이를 땅에도 적용한 것을 말합니다. 이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은 동아시아의 전통시대에 제작된 석각천문도를 대표하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또 이 천문도는 중국 남송의 순우천문도(淳祐天文圖, 1241년) 각석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석각천문도인데, 새겨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최북이 장안에서 그림을 팔고 있는데 / 평생 오두막 한 칸에 사방 벽이 비었구나 / 문 닫고 온종일 산수를 그리고 있으니 / 유리 안경 하나에 나무 필통 하나뿐이구나.” 이는 조선 후기의 문인 신광수(申光洙:1712-1775)가 쓴 <최북을 노래함(崔北歌)>인데 강세황과 더불어 심사정・정선 다음의 대가로 손꼽혔던 최북(崔北)의 어려운 사정을 잘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림을 팔아 살았던 ‘생계형 화가’였기에 스스로 자신의 호를 ‘붓으로 먹고 산다’는 뜻의 ‘호생관(毫生館)’이라 했던 최북입니다. 그는 안경을 썼지만 한쪽 눈이 먼 외눈박이인데 자의식이 무척이나 강했던 그가 어쭙잖은 양반이 그림을 강요하자 자신의 눈을 찔러 외눈박이가 되었던 것입니다. 최북(崔北)은 자신의 이름 ‘북(北)’을 파자(破字)하여 ‘칠칠(七七)’이라 불렀지만 술 석 잔이 들어가면 두려울 것도 거칠 것도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어느 눈보라치는 겨울 날, 며칠 굶다 그림을 팔아 술을 마시고, 성곽 밑에서 얼어 죽었다고 합니다. 그의 그림 <풍설야귀인(風雪夜歸人)>을 보면 거센 바람이 몰아치는 겨울밤 지팡이를 든 나그네가 거센 눈보라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보름 동안 온 국민을 흥분시킨 평창 동계올림픽이 드디어 막을 내렸습니다. 올림픽을 보면서 우리는 금메달을 딴 스켈레톤 종목을 비롯하여 비록 전패 했지만 남북단일팀의 선전으로 감동을 보여준 여자아이스하키와 환상의 호흡으로 결승에 진출 은메달을 딴 컬링은 온 국민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같은 스케이트, 스켈레톤, 스노보드가 없었던 옛날 우리나라에도 썰매가 있었고, 설피가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설피는 눈이 많은 고장의 주민들이 겨울철에 신바닥에 덧대어 신는 도구입니다. 다른 이름으로는 살피라고도 하는데 이것을 신으면 눈이 높이 쌓였어도 눈 속에 빠지지 않았고 비탈에서도 미끄러지지 않았지요. 설피는 10년쯤 자란 다래덤불ㆍ노간주나무 또는 물푸레나무로 만드는데 그 나무의 껍질을 벗겨 다듬은 다음 뜨거운 물에 넣고 천천히 힘을 주어가면서 타원형으로 구부립니다. 그렇게 구부려 테니스라켓 모양으로 볼이 넓고 크게 만듭니다. 그리고 가늘게 잘라낸 곰가죽 끈으로 동여매지요. 이렇게 만든 설피는 눈이 들러붙지 않아서 산간지방 주민들뿐만 아니라 겨울철 사냥꾼에게도 필수적인 도구였습니다. 사냥꾼들은 은 사냥감을 산 위에서 아래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이 한 권의 책을 이 땅의 모든 남성들에게 바칩니다.”라고 책머리에 밝힌 책이 있다. 바로 이윤옥 시인의 《서간도에 들꽃 피다》가 그 책이다. 왜 이 시인은남성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고 했을까? 일제강점기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을 던졌고, 그 공로를 나라에서 인정받은 남성 독립운동가는 15,000 여명(2017)에 이르지만 여성독립운동가는 296명(2017)에 불과하다. 이는 남성독립운동가의 2% 수준이다. 이러한 현실을 안타깝게 여긴 이윤옥 시인은 여성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찾아 그들의 헌신을 시집 《서간도에 들꽃 피다》를 통해 사회에 알리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그간 우리 사회는 일제강점기에 남성과 어깨를 나란히 견주고 독립을 위해 뛰어들었던 여성독립운동가를 조명하는 일을 소홀히 다뤄왔다. 이에 이윤옥 시인은 2011년부터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집 《서간도에 들꽃 피다》를 통해 사회의 관심에서 비껴난 여성독립운동가를 알리는 일에 발 벗고 나섰다. 제1권에는 안중근 어머니 조마리아, 만주 호랑이 남자현, 일본 황거를 폭격하려던 최초 여류비행사 권기옥 등 20 명의 여성독립운동가를 조명했으며 이후 해마다 1권씩 《서간도에 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금 한창 2018 동계올림픽이 열리는 평창에 가면 오대산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절로 알려진 월정사가 있습니다. 월정사는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으로 유명하며, ‘석조보살좌상’(국보 제48-2호), ‘팔각구층석탑사리장엄구’(제1375호)와 ‘세조대의 회장’(중요민속문화재 제219호) 같은 문화재가 있는데 국보 제48-1호 ‘팔각 구층석탑(八角 九層石塔)’은 특히 눈에 띕니다. ‘팔각 구층석탑(八角 九層石塔)’은 8각 모양의 2단 기단(基壇) 위에 9층 탑신(塔身)을 올린 뒤,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 가운데 탑신부는 일반적인 석탑이 위층으로 올라 갈수록 급격히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는데 반하여 2층 탑신부터 아주 조금씩 줄어들며, 1층 탑신의 4면에 작은 규모의 감실(龕室:불상을 모셔두는 방)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또한 가볍게 들려있는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아 놓았는데 층마다 달린 8개씩과 함께 상륜부의 8개까지 모두 80개의 풍경이 작은 바람에도 한꺼번에 화려한 화음을 들려주고 있지요. 고려시대가 되면 그동안의 4각형 평면 탑에서 벗어나 다각형의 다층(多層)석탑이 우리나라 북쪽지방에서 주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알릴 것은 이번 저희 세창양행이 조선에서 개업해 호랑이ㆍ수달피ㆍ검은 담비ㆍ흰 담비ㆍ소ㆍ말ㆍ여우ㆍ개 등 각종 가죽과 사람의 머리털, 소ㆍ말ㆍ돼지의 갈기털ㆍ꼬리ㆍ뿔ㆍ발톱, 조개와 소라, 담배, 종이, 오배자, 옛 동전 등 여러 가지 물건을 사들이고 있습니다. 손님과 상인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물건은 그 수량의 다소를 막론하고 모두 사들이고 있으니, 이러한 물건을 가지고 저희 세창양행에 와서 공평하게 교역하시기 바랍니다.” 위는 1886년(고종 23)에 창간되었던 우리나라 맨 첫 주간신문 <한성주보>에 1886년 2월 22일 실렸던 우리나 첫 신문광고입니다. 지금의 화려하고 삽화나 사진이 들어있는 광고가 아닌 단순히 한자 24줄로 이뤄진 광고지요. 당시 독일 함부르크에 본사를 둔 무역회사인 '세창양행'에서 올린 광고로 내용은 세창양행에서 사고파는 물품에 대해서 쭉 나열한 것이 전부입니다. 재미난 것은 광고라는 말이 없던 시절이라 ‘고백(告白)’이라는 말을 썼는데 당시 중국이나 일본에서 광고 대신 쓰던 말이라 하지요. 이 세창양행(世昌洋行)은 그 10년 뒤인 1897년 처음으로 삽화가 들어간 양담배 광고를 신문에 싣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