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광주박물관에 가면 광주 신창동 저습지 유적에서 출토된 것으로 <신발골>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선사 고고학상 첫 신발 관련 자료인데 아직껏 중국과 일본에서도 출토된 적이 없는 유물입니다. 신발골은 가죽신이나 짚신을 만들 때 그 모양을 유지하기 위해 쓰는 나무로 만든 틀이지요. 길이는 26.6㎝이고 최대 너비는 8.9㎝, 높이는 5.6㎝입니다. 이 신발골은 요즘 구두를 만드는데 쓰는 구두골과 모양이 비슷한데 나무 한가운데를 써서 바닥은 평탄하게 깎았고 좌우와 앞쪽이 살짝 들려 있으며 윗면은 바닥에 비해 좁지만 편평한 편입니다. 짚신을 만들 때 쓰던 짚신골과 모양이 비슷하지만 짚신골 앞쪽이 위로 올라와 있고 뒷부분은 경사가 거의 없는 것과 다른 점이지요.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三國志)》 <위지 동이전(魏志東夷傳)> 한(韓) 조에는 "베로 만든 도포를 입고 발에는 가죽신을 신는다(衣布袍, 足履革蹻蹋)"라는 기록이 있어 이 신발골이 가죽신을 만드는데 쓴 것으로 짐작해볼 수 있으며, 원삼국시대 초기에는 이미 상류층에서 가죽 신발을 만들어 사용할 정도로 높은 문화 수준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유물이라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설날이 되면 가래떡을 썰어 끓인 떡국을 꼭 먹었는데 떡국에 나이를 더 먹는 떡이란 뜻의 '첨세병(添歲餠)'이라는 별명까지 붙었지요.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떡국을 겉모양이 희다고 하여 ‘백탕(白湯)’, 떡을 넣고 끓인 탕이라 하여 ‘병탕(餠湯)’이라고도 적고 있습니다. 보통 설날 아침에 떡국으로 조상제사의 메(밥)를 대신하여 차례를 모시고, 그것으로 밥을 대신해서 먹었지요. 떡국 국물을 만드는 주재료로는 원래 꿩고기가 으뜸이었습니다. 고려 후기에 원나라의 풍속에서 배워온 매사냥이 상류층들의 사치스러운 놀이로 자리를 잡으면서 매가 물어온 꿩으로 국물을 만든 떡국이나 만둣국 그리고 꿩고기를 속으로 넣은 만두가 고급 음식으로 대접을 받았지요. 하지만 일반 백성에겐 꿩고기란 구경하기도 어려운 것이어서 대신 닭고기로 떡국의 국물을 냈는데 그래서 “꿩 대신 닭”이란 말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요즘 떡국의 국물은 꿩고기나 닭고기로 만들지 않고 쇠고기로 만듭니다. 설날에는 ‘설술은 데우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세주불온’(歲酒不溫)'이라고 하여 찬술을 한 잔씩 마셨습니다. 이것은 옛사람들이 정초부터 봄이 든다고 보았기 때문에 봄을 맞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네 민속품 가운데는 쌀을 이는 도구로서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서 엮어 만든 ‘조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해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뜻에서 설날 새벽에 사서 벽에 걸어두는 것을 우리는 특별히 ”복조리“라 합니다. 복조리는 있던 것을 쓰지 않고 복조리 장수에게 산 것을 걸었는데 일찍 살수록 길하다고 여겼지요. 따라서 섣달그믐 자정이 지나면 복조리 장수들이 “복조리 사려.”를 외치며 인가 골목을 돌아다니고, 주부들은 다투어 복조리를 사는 진풍경을 이루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정월 초하룻날 새벽에 복조리 장수가 집집마다 다니며 복조리 1개씩을 집안에 던지고 갔다가 설날 낮에 복조리 값을 받으러 오는 지방도 있습니다. 그런데 복조리를 살 때는 복을 사는 것이라 여겨 복조리 값은 당연히 깎지도 물리지도 않았지요. 설날에 한 해 동안 쓸 만큼 사서 방 한쪽 구석이나 대청 한 귀퉁이에 걸어놓고 하나씩 쓰면 복이 많이 들어온다는 믿음도 있었습니다. 그 복조리에는 실이나 성냥ㆍ엿 등을 담아두기도 했지요. 또 복조리로 쌀을 일 때는 복이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라는 뜻으로 꼭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정네들은 복조리 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고 운암(雲庵) 곽영민(郭永敏) 선생은 일본, 미국 ,중국 등에서 수십 차례의 전시회를 열었으며, 대한민국 동양미술대전 심사위원장을 역임한 서예계의 원로 작가였다. 그뿐만 아니라 2000년 이화문화출판사를 통해서 《갑골문집(甲骨文集)》을 펴낸 바 있는 갑골문(甲骨文)의 대가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무술년 한해는 건강하시고 행운만 가득하시기 비손합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내일은 우리 겨레의 큰 명절 설입니다. 그런데 세배를 하면서 흔히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처럼 명령 투의 말을 하는데 이것은 예절에 맞지 않습니다. 세배를 한 뒤 일어서서 고개를 잠깐 숙인 다음 제자리에 앉아서, 세배를 받은 이가 먼저 덕담을 들려준 뒤 이에 화답하는 예로 겸손하게 얘기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덕담은 덕스럽고 희망적인 얘기만 하는 게 좋으며 지난해 있었던 나쁜 일이나 부담스러운 말은 굳이 꺼내지 않는 게 미덕이지요. “고모님께서 새해는 숙병(宿病)이 다 쾌차(快差)하셨다 하니 기뻐하옵나이다.” 이 글은 숙종임금이 고모인 숙희공주에게 보낸 편지 글 내용입니다. 숙종은 고모의 오랜 병이 완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아직 병환 중임에도 “숙병이 쾌차했다 하니 기쁘다.”라며 ‘마침형(완료형)’ 어법을 쓰고 있습니다. 이렇듯 조선시대에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와 같은 말은 없었고 대신 ‘마침형’의 덕담이 유행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정조 때 한경(漢經)은 하진백(河鎭伯) 집안사람들에게 문안 편지를 보냈는데 하진백이 과거공부를 더욱 열심히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가을에 있을 과거에서 급제했다며 미리 축하의 덕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처녀에는 총각무, 부끄럽다 홍당무, 여덟아홉 열무, 입맞췄나 쪽무, 이쪽저쪽 양다리무, 방귀뀌어 뽕밭무, 처녀팔뚝 미끈무, 물어봤자 왜무, 오자마자 가래무, 정들라 배드렁무, 첫날신방 단무, 단군기자 조선무, 크나마나 땅다리무······.” 이는 무 밭에서 두 편으로 갈라 무를 뽑으며 부르던 무타령입니다. 무는 배추와 함께 우리나라 사람이 가장 많이 먹는 푸성귀(채소)입니다. 무는 철 따라 김치로 담가 먹습니다만 김치 말고도 국이나 조림, 나물, 생채감으로 많이 쓰며, 예전에 겨울철에 채소가 귀할 때에는 무를 말려 두었다가 장아찌나 나물을 만들고, 무청도 말려서 시래기나물을 해 먹었습니다. 《세종실록》 18(1436)년 윤6월 29일 기록에 세종이 "무는 구황(救荒)에 있어 크게 유리한 점이 있는 식물이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1묘(畝, 논밭 넓이의 단위로 30평 곧 약 99.174㎡) 땅에 이를 심으면 1천 명을 살릴 수 있다.’고 하였다.“라고 말합니다. 조선시대에는 무를 구황작물(흉년에 쌀보리 대신 먹을 수 있는 작물)로 본 것이지요. 참고로 예전 여성들은 두 갈래로 갈라진 무가 가장 인기 있었다고 하는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2011년 대전 안정나씨 문중의 무덤을 이장하던 중 한 여인의 목관에서 한글편지가 발견되었습니다. “분과 바늘 여섯을 사서 보내오. 집에도 다녀가지 못하니 이런 민망한 일이 어디 있을까요. 울고 갑니다. 어머니 잘 모시고 아기 잘 기르시오. 내년 가을에나 나오고자 하오. 안부가 궁금합니다. 집에 가서 어머님이랑 아이랑 다 반가이 보고 가고자 했는데, 장수가 혼자만 집에 가고 나는 못 가게 해서 다녀가지 못합니다. 가지마라고 하는 것을 구태여 가면 병조에서 회덕골로 사람을 보내 귀양살이를 시킨다 하니, 이런 민망한 일이 어디 있을까요.” 군관 나신걸(1461∼1524)이 갑자기 북쪽 변방으로 근무지를 옮기면서 고향에 있는 아내 신창 맹씨에게 쓴 한글편지입니다. 나신걸은 아내가 고생할 것을 염려해서 집안의 논밭을 다 남에게 소작을 주고 농사를 짓지 말라고 당부하지요. 또 노비나 세금, 부역, 공물 등 각종 집안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도 자세하게 알려줍니다. 선물로 사서 보낸 분과 바늘은 모두 중국 수입품으로 초급 무관의 몇 달 치 월급을 털어서 샀을 것입니다. 2012년 5월 국가기록원은 500년 전 나신걸이 쓴 편지를 초음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박가분을 항상 발느시면 죽은깨와 여드름이 없어지오. 얼굴에 잡티가 업서저서 매우 고와집니다. 살빗치 고와지고 모든 풍증과 땀띠의 잡티가 사라지고 윤택하여 짐니다.” 이는 일제강점기 때 날개 돋친 듯 팔았던 <박가분(朴家粉)> 광고입니다. <박가분>은 두산그룹 창업자인 박두병의 어머니 정정숙 여사가 만들어 자신의 포목점에 오는 손님들에 주던 사은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만들던 <박가분>은 얼마나 인기가 있었던지 이 박가분을 얻기 위해 일부러 옷감을 사러오는 여성들이 많았을 정도였지요. 결국 박가분은 1920년에 상표등록 하여 팔기 시작하는데 결국 공산품으로 맨 먼저 만들어 판 한국 최초의 화장품이 되었습니다. 화장품 박가분은 두산그룹을 재벌로 만든 발판이었다고 하니 참 대단하지요? 박가분이 전성기 때는 온 나라에서 방물장수가 몰려들었고, 하루 1만 갑 이상을 팔기도 했다고 합니다. 박가분 이전에 팔리던 백분은 얇은 골패짝 같은 것으로 작게 만들어 백지로 싸서 팔았습니다. 그러나 박가분은 훨씬 두꺼워 양이 많았고, 상표를 인쇄해 붙여 상자에 담아서 팔아 상품 가치를 높였기에 인기를 누렸다고 합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는 3월 7일부터 9일까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제15차 일본군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를 대한민국 서울에서 연다. 아시아의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과 아시아 및 미국, 유럽, 호주 등 세계 각지의 활동가들이 서울에 모여, 일본군성노예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과 피해자들의 인권회복을 위한 연대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아시아연대회의는 1992년 서울에서 첫 걸음을 시작하여 이후 아시아 및 세계 각지의 피해자들과 활동가들이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해 공동의 전략과 결의를 만들어 온 자리다. 15차 아시아연대회의에 이르기까지 아시아 여성들의 연대는 계속되어 왔으며, 우리의 활동으로 전시 성폭력 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 기준을 제시하는 등 중요한 역사적 성과를 남겨왔다. 그러나 2015년 12월 28일 이루어진 한국과 일본 정부의 ‘위안부’ 합의는 지난 26년 동안 이어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 연대에 새로운 도전을 안겨주었고, 아베 자민당 정권의 압승 이후 일본정부의 역사왜곡과 책임 회피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다행히 2017년 12월 27일, 한국정부의 한일'위안부'합의 TF팀 결과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