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한민족 곧 배달겨레 하면 떠오르는 것 가운데빼놓을 수 없는 것이“아리랑”이다. 나라 안이나 밖이나 배달겨레 누구나 가슴 속에 담고 살면서 슬플 때나 기쁠 때나부르는 노래 “아리랑”, 그 아리랑이야말로배달겨레를 하나로 만드는 노래 가운데 으뜸이다. 아리랑은 지난 201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올랐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 어떠한변화가 있는가? 또한 어떻게 전승되고 있는가를 묻는 심포지엄이 열려 주목을 받았다. 어제 22일 낮 2시 서울 인사동 태화기독교회관 대회의실에서 “유네스코 등재 이후 아리랑 전승현상과 과제”라는 제목의 아리랑 심포지움이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주최, 아리랑학회 주관,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후원으로 열렸다. 심포지움은 먼저 미국 아리랑대학교 박태종 총장이 "국외자의 아리랑 세계화에 대한 단상“이라는 제목으로 기조강연을 했다. 그는 아리랑을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인 노래,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은 노래, 옛것이면서 오늘의 것이고 오늘의 것이면서 옛것인 노래, 기쁨의 노래이면서 슬픔의 노래이고 슬픔의 노래이면서 기쁨의 노래다.”라고 정의했다. 그러면서 “미국에서의 아리랑 세계화 방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의 스물두째이며 명절로 지내기도 했던 ‘동지(冬至)’입니다. 민간에서는 동지를 흔히 ‘아세(亞歲)’ 곧 ‘작은설’이라 하였는데 ‘해’의 부활이라는 큰 뜻을 지니고 있어서 설 다음가는 작은설로 대접하는 것이지요. 이런 생각은 오늘날에도 여전해서 ‘동지첨치(冬至添齒)’라 하여 “동지를 지나야 한 살 더 먹는다.” 또는 “동지팥죽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한살 더 먹는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동지는 날씨가 춥고 밤이 길어 호랑이가 교미한다고 하여 ‘호랑이 장가가는 날’이라고도 부릅니다. 동지의 특별한 풍속을 보면 다가오는 새해를 잘 계획하라는 뜻으로 달력을 선물하는데 더위를 잘 견디라는 뜻으로 부채를 선물하는 단오 풍속과 함께 “하선동력(夏扇冬曆)”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동지의 또 다른 풍속에는 며느리들이 시어머니나 시할머니에게 버선을 지어 선물하는 “동지헌말(冬至獻襪)”이란 아름다운 풍속도 있었습니다. 이날 새 버선을 신고 길어지는 해 그림자를 밟으면 수명이 길어진다고도 믿었지요. 그런데 이날 가장 보편적으로 지내는 풍속은 팥죽을 쑤어 먹는 일일 것입니다. 특히 지방에 따라서는 동지에 팥죽을 쑤어 솔가지에 적셔 집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동해안을 따라 달리는 7번 국도를 타고 달리다가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학곡2리 근처를 지나다 보면 “바깥멋질”이라는 도로표지판을 보게 됩니다. 이곳에는 ‘바깥멋질ㆍ안멋질’의 ‘멋질마을’이 있습니다. 이 마을은 고을 원님이나 관찰사 같은 사람이 평해군에 부임하여 오게 되면 이곳에서 정상행차(正常行次)를 갖추기 위하여 잠시 머물렀는데 ‘그 행차가 멋지다’하여 ‘멋짓골’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말로 된 땅이름을 보면 재미난 것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서울 상도동 숭실대학교와 봉천사거리 사이에는 “살피재”라는 고개가 있었는데, 옛날 이 고개 부근에 산적이 많이 있었기에 산적에게 당하지 않게 잘 살피며 다니라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영등포역 뒤편에도 작은 고개가 있었는데 겨울철 바람이 고추처럼 몹시 맵게 분다고 하여 그 이름이 “고추말”이었습니다. 또 노량진 사육신묘 마루터기에 있었던 “아차고개”는 사육신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세조 2년(1456년) 단종 복위를 꾀하던 사육신의 모의가 발각되어 죽음에 처하게 되자 영등포 남쪽에 살던 한 선비가 사육신 처형은 부당하다는 것을 상소 위해 도성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401년 오늘(12월 20일, 음력 11월 16일) 태종실록 기록에는 “신문고(申聞鼓)가 마침 이루어졌는데”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신문고(申聞鼓)란 조선시대에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에게 소원(訴寃 : 억울한 일을 당하여 관-官-에 하소연함)의 길을 열어 주기 위해 대궐에 북을 달아 소원을 알리게 하던 제도를 말합니다. 이렇게 태종 때 설치된 신문고에 대한 내용이 다시 세종실록 12년 10월 20일 기록에도 등장합니다. "지난번에 ‘신문고를 함부로 치는 자에게는 죄를 주라.’ 했었는데, 이제 다시 생각하니, 이렇게 하면 품은 생각이 있어 아뢰고 싶은 사람도 법을 두려워하여 말하지 못할 것이요, 또 어리석은 사람은 이것을 모르고 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에게 죄를 주지 않을 터이니, 경들은 그리 알라." 신문고는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칠 수 있도록 규정되었지만 실제로는 신문고가 대궐에 안에 있었음은 물론 신문고를 치는 절차가 지나치게 엄격했고, 법에 맞지 않게 신문고를 친 사람에 대한 처벌이 과중했습니다. 또 당시의 엄격한 신분제와 함께 상관이나 고을 원에 관계된 일의 격고는 엄격히 통제된 탓에 주로 서울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는 보물 제1444호 “은입사귀면문철퇴(銀入絲鬼面文鐵鎚)”가 있습니다. 길이 75cm 한 쌍인 이 철퇴는 19세기 무렵 의장용으로 만든 무기로 긴 자루 끝에 쇠뭉치가 달린 형태이며, 철추(鐵鎚)라고도 합니다. 이러한 쇠몽둥이 무기는 원래 싸움에서 상대를 때릴 수 있는 무기였지만, 지휘관의 지휘봉으로도 쓰였지요. 그 가운데 이 철퇴는 입사기법(구리, 쇠 따위 금속에 선이나 홈을 파서 그 홈에 금, 은, 구리, 주석 같은 다른 금속을 채워 넣는 기법)으로 화려하게 꾸민 것으로 보아, 높은 벼슬아치가 지녔던 의장용 무기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상대를 때리는 쇠뭉치 부분 곧 퇴부는 연봉(蓮峯, 연꽃 봉오리) 상태인데 좌우에 도깨비 무늬를 은으로 입사하였습니다. 이 도깨비 무늬는 각종 재앙과 질병 그리고 사악한 모든 것들을 막아내는 초자연적인 존재를 상징적으로 도안한 것으로 보입니다. 은입사귀면문철퇴는 쇠뭉치와 손잡이의 적당한 비례는 물론 정교한 세부 장식이 있어서, 조선시대 의장용 무구의 대표적인 예로 꼽힙니다. 특히 도깨비무늬, 연꽃모양 무늬, 번개무늬 따위가 입사기법으로 섬세하게 새겨져 있어, 공예 장식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醉客執羅衫(취객집라삼) 취객이 비단 적삼을 잡아당기니 羅衫隨手裂(나삼수수열) 비단 적삼이 손길 따라 찢어지네. 不惜一羅衫(불석일라삼) 비단 적삼 한 벌이야 아깝지 않으나 但恐恩情絶(단공은정절) 은정(恩情)도 따라 끊어질까 두렵네. 이는 매창이 지은 “취하신 님께(贈醉客)”라는 제목의 한시입니다. 취한 손님은 매창의 비단 적삼을 잡아당기고 매창이 살짝 몸을 틀자 고운 적삼이 쭉 찢어져 버렸습니다. 적삼이 찢겼으니, 매창이 이만저만 속상한 게 아니었겠지요. 그러나 “비단 적삼 한 벌이야 아깝지 않으나, 은정도 따라 끊어질까 두렵다.”란 시를 읊을 뿐입니다. 참으로 슬기로운 표현을 담아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고 있음입니다. 매창은 홍길동전을 쓴 허균과의 우정으로도 유명합니다. 허균은 그의 글에 "계생은 부안 기생이다. 시와 율을 잘하고 또 노래와 거문고도 잘했다. 성품이 깔끔하여 음란하지 않아 내 그 재주를 아껴서 가까이 사귀었다. 같이 웃고 무람없이 놀아도 어지럽지 않아서 오래 사귈 수 있었다. 이제 그가 죽었다고 하니 눈물로 시 두어 수 적어 슬픔을 표하노라.“라고 노래했습니다. 혹시 부안에 들리거든 매창 무덤(전라북도 기념물 제6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만 원권 지폐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천체망원경이 있다고요?” 이것은 경북 영천의 보현산천문대에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2007년부터 발행하고 있는 만 원권 종이돈 뒷면에는 조선시대에 만든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와 「혼천의(渾天儀)」가 그려져 있어 당시 천문학이 이미 세계 최고의 수준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종이돈에는 천문학이 일어남을 기대하여 나라 안에서 가장 큰 천체망원경인 보현산 천문대의 1.8M 천체광학망원경을 그려 넣어 우리나라 천문과학의 우수성도 알리고 있지요. 영천 보현산천문대는 1996년 4월에 완공된 천문대로, 영천시 화북면과 청송군 현서면에 걸쳐 있는 보현산의 동봉 산마루 일대 30,156㎡ 땅에 세워졌습니다. 이곳에는 국내 최대 구경의 1.8M 반사 망원경과 태양플레어 망원경이 설치되어 있어 국내 광학 천문관측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 망원경으로 해 같은 움직이지 않고 스스로 빛을 내는 붙박이별(항성, 恒星), 별무리 곧 성단(星團), 성운(星雲, 별과 별 사이에 존재하는 가스 덩어리와 티끌의 집합체), 은하(銀河, 수억에서 수조 개의 별과 가스가 한 덩어리가 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광주광역시 북구 서하로 광주시립민속박물관에 가면 국가민속문화재 제111호 “김덕령 장군 의복”이 있습니다. 1965년 광산김씨의 무덤들이 모여 있는 광주 무등산 이치(梨峙)에서 김덕령 장군의 무덤을 이장할 때 출토된 400년 전의 옷들입니다. 출토된 장군의 옷에는 조선시대 문무관이 외국에 사신으로 파견되거나, 왕을 호위할 때, 또는 국난시에 입었던 철릭 2점, 두루마기와 비슷한데 옷깃이 직선으로 곧은 직령포가 춘추용과 겨울용 4점, 그리고 저고리 1점과 바지 1점입니다. 그 가운데 철릭은 임진왜란 당시 장군이 입었던 것으로 위급할 때 양 소매를 모두 뗄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여름옷은 흰모시로 만들었고 겨울용은 두터운 솜을 넣고 누빈 것인데 길이도 여름용보다 더 깁니다. 또 직령포는 흰 무명을 곱게 누빈 춘추용과 솜을 두텁게 두고 누빈 겨울용이 있지요. 특히 명주직령포는 삭아서 솜만 남았지만 등솔기에서 소매 끝까지의 화장 길이가 129cm로 다른 옷들의 85cm에 견주어 더 깁니다. 따라서 이것은 살았을 때 입었던 것이 아니라 주검에 입히기 위해 만든 수의로 보입니다. 이 옷들은 16세기말의 것들로 복식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예전에 경전이나 책을 얹어놓고 읽는 데 쓰던 책상을 일컬어 경상(經床)이라고 했습니다. 불교가 융성하였던 고려시대에는 절의 필수품으로 쓰였으며 형태가 아름다워 불교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왕실과 귀족계층에서도 썼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져 검소함을 미덕으로 여기던 사대부 선비들은 과다한 장식을 하지 않았지요. 보통 경상의 재료는 괴목, 소나무, 죽장, 오동나무, 피나무, 가문비나무, 산유자나무 따위를 썼습니다만 드물게 구리(동, 銅)도 보입니다. 동아대학교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동제(銅製) 경상은 구리를 주조해서 접합하여 만든 4각 탁자입니다. 이는 천판(天板) 윗면에 고려시대의 《대방광불화엄경》 변상도(變相圖)를 새긴 독특한 금속제 경상으로 현재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2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전체적인 형태는 4각의 낮은 호족반(虎足盤, 다리가 호랑이 다리 모양을 한 소반)과 비슷하며, 천판과 운각, 4개의 동물 모양 다리, 그리고 양쪽 다리를 연결하는 족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양식으로 볼 때 조선 후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됩니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금속제 경상은 현존하는 예가 매우 드물기 때문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어제(12월 11일) 낮 1시 30분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는 제6회 이북5도 무형문화재축제가 열렸다. 남녘에 남도민요, 대금산조, 승무 같은 무형문화재가 있는 것처럼 북녘에도 역시 무형문화재들이 있다. 황해도 무형문화재 제3호 “놀량사거리”(보유자 한명순ㆍ이문주), 평안북도 무형문화재 제4호 ”평북농요“(보유자 박민희), 평안남도 무형문화재 제1호 ”평양검무“(보유자 정순임ㆍ임영순), 함경북도 무형문화재 제1호 ”애원성“(보유자 김길자), 평안남도 무무형문화재 제2호 ”향두계놀이“(보유자 유지숙), 황해도 무형문화재 제5호 ”최영장군당굿”(보유자 서경욱), 평안북도 무형문화재 제3호 “평안도다리굿”(보유자 김남순)이 있다. 또한 황해도 무형문화재 제1호 “만구대탁굿”(보유자 김계순), 평안남도 무형문화재 제3호 “김백봉 부채춤”(보유자안병주), 황해도 무형문화재 제2호 “산염불 및 난봉가”(보유자 박기종), 황해도 무형문화재 제4호 “화관무”(보유자 김나연), 평안북도 무형문화재 제2호 “연변성황대제”(보유자 이순희), 함경남도 무형문화재 제2호 “퉁소신아우”(보유자 동선본), 함경북도 무형문화재 제2호 “두만강 뗏목놀이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