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1939년 오늘(11월 10일)은 일제가 <창씨개명(創氏改名)>을 위해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개정, 공포한 날입니다. 창씨개명은 일제 황민화정책(皇民化政策)의 하나로 강제로 조선 사람의 성을 일본식으로 고치게 한 것이지요. 그리고 이 창씨개명을 접수하기 시작한 날은 다음해인 1940년 2월 11일부터였는데 이틀 만에 87건이 접수되었습니다. 특히 그날 아침 관리들이 문을 여는 시각을 기다려 가장 먼저 달려가 향산광랑(香山光郞)이란 이름으로 등록을 마친 사람은 조선 최고의 작가라는 이광수였습니다. 그는 창씨개명을 한 변명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향산(香山)이라고 일본적인 명으로 개한 동기는 황송한 말씀이나 천황어명과 독법을 같이하는 씨명을 가지자는 것이다. 나는 깊이깊이 내 자손과 조선민족의 장래를 고려한 끝에 이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굳은 신념에 도달한 까닭이다.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이광수라는 씨명으로도 천황의 신민이 못 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향산광랑(香山光浪)이 조금 더 천황의 신민답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조금 더 천황의 신민답게 살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留不盡之巧, 以還造化 다 쓰지 않은 기교를 남겨서 조물주에게 돌려주고, 留不盡之祿, 以還朝廷 다 쓰지 않은 녹을 남겨서 나라에 돌려주고, 留不盡之財, 以還百姓 다 쓰지 않은 재물을 남겨서 백성에게 돌려주고, 留不盡之福, 以還子孫 다 쓰지 않은 복을 남겨서 자손에게 돌려주라. 위는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시절 제자 남병길(南秉吉)에게 유재(留齋)란 호를 지어주고 써준 현판에 있는 글입니다. 남병길은 수학자, 천문학자로 이조참판을 지냈습니다. 김정희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유고를 모아 《완당척독》과 《담연재시고》를 펴냈는데 이는 《완당선생전집》의 기초가 되었지요. “유재(留齋)”는 “남김을 두는 집는 집”이란 뜻으로 현판에는 예서로 쓴 ‘유재’와 행서인 풀이글, 그리고 끝에는 "완당 김정희가 쓰다(阮堂題)"라고 적혀 있습니다. 추사의 제자인 소치 허련(許鍊)의 문집 《소치실록》 부기에는 “완당이 제주에 있을 때에 써서 현판으로 새겼는데 바다를 건너다 떨어뜨려 떠내려 간 것을 일본에서 찾아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많은 궁금증을 더합니다. 유재 현판은 추사의 인생과 예술의 진수를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지요. 유배지에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전북 김제 금산사 성보박물관에 가면 보물 제421호 남원 “실상사 약수암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木刻阿彌陀如來說法像)”이 있습니다. 이 설법상은 탱화의 하나인데, 탱화는 대개 옷감이나 종이에 그린 그림을 족자나 액자형태로 만들어 걸지만 이 탱화는 ‘목각불탱(木刻佛幀)’이라 하여 나무에 조각한 것이 특이합니다. 크기는 가로 183㎝, 세로 181㎝로 거의 정사각형에 가깝습니다. 화면은 크게 위아래 둘로 나누었는데, 아랫부분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는 보현보살(자비나 이(理)를 상징하는 보살)과 세지보살을, 왼쪽으로는 문수보살(대승불교에서 최고의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과 관음보살(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하고 왕생의 길로 인도하는 보살)을 배치하지요. 상단에는 석가의 제자인 아난과 가섭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월광보살과 지장보살을, 왼쪽으로는 일광보살과 미륵보살을 배치하였습니다. 본존인 아미타불(서방정토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을 설한다는 부처)은 타원형의 광배를 가지고 있고 사자가 새겨진 대좌에 앉아 있지요. 불상들은 모두 사각형의 넓적한 얼굴에 근엄하면서도 친근감이 넘칩니다. 정조 6년(1782) 제작된 것으로 제작연대가 확실하지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어제(6일) 낮 4시 경북 문경새재리조트 문화홀에서는 문경새재아리랑제 첫날 행사로 워크샵이 열렸다. 아리랑 전승자, 전문가, 시민들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워크샵은 고윤환 문경시장, 김지현 문경시의회 의장, 현한근 문경문화원장, 정은하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회장 등이 축사를 했다. 고윤환 시장은 축사에서 “아리랑은 모든 곳에 있습니다. 사할린에서도 아리랑을 만났습니다. 백여 년의 세월 동안 질곡의 삶을 살아온 우리 동포들도 아리랑만큼은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올해 팔도의 모든 아리랑이 문경에 모였다면, 내년에 세계의 모든 아리랑이 함께 모여 아리랑도시 문경에서 한마음 한뜻으로 아리랑을 부를 것입니다.”라고 했다. 워크샵은 아리랑의 위상과 현실, 문경아리랑을 아시나요, 나의 아리랑/우리 아리랑, ‘문경새재아리랑제’의 확장력 등 4개의 동의안으로 이어갔다. 워크숍은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가 주제발표를 하고 전승자들이 발언을 하는 순으로 이어졌다. 김연갑 이사는 발표에서 “아리랑은 저항ㆍ대동ㆍ상생의 3대 정신이 살아 있는 민족의 노래다. 또 아리랑은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 대한민국국가무형문화재 제129호이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열아홉째로 겨울에 들어선다는 “입동(立冬)”입니다. 입동 무렵에는 “ 치계미(雉鷄米)”라고 하는 아름다운 풍속도 있었는데 나이 드신 어르신들을 모시고 음식을 준비하여 대접하는 것입니다. 본래 치계미란 사또의 밥상에 올릴 반찬값으로 받는 뇌물을 뜻하였는데, 마을의 어르신들을 사또처럼 대접하려고 생각한데서 생긴 풍속인 듯합니다. 이날은 아무리 살림이 어려운 사람이라도 일 년에 한 차례 이상은 치계미를 위해 돈이나 곡식을 내놓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마저도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은 도랑탕 잔치로 대신했습니다. 입동 무렵 미꾸라지들이 겨울잠을 자기 위해 도랑에 숨는데 이때 도랑을 파면 누렇게 살이 찐 미꾸라지를 잡을 수 있지요. 이 미꾸라지로 추어탕을 끓여 노인들을 대접하는 것을 도랑탕 잔치라고 합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따르면 10월부터 정월까지의 풍속으로 내의원(內醫院)에서는 임금에게 우유를 만들어 바치고, 기로소(耆老所)에서도 나이 많은 신하들에게 우유를 마시게 했다고 하는데, 이러한 겨울철 궁궐의 양로(養老) 풍속을 민간에서도 따라 한 것입니다. 또 예전에는 입동을 즈음하여 농가에서 고사를 많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翁老守雀坐南陂(옹로수작좌남피) 노인 참새 쫓느라 언덕에 앉았는데 粟拖狗尾黃雀垂(속타구미황작수) 개꼬리 같은 조 이삭에 노란 참새 앉았고 長男中男皆出田(장남중남개출전) 큰아들 작은아들 모두 다 들에 나가니 田家盡日晝掩扉(전가진일주엄비) 농삿집 온종일 낮에도 문 닫겼다네 鳶蹴鷄兒攫不得(연축계아확부득) 솔개가 병아리를 채려다가 빗나가니 群鷄亂啼匏花籬(군계란제포화리) 호박꽃 울타리에 뭇 닭이 꼬꼬댁거리네 小婦戴棬疑渡溪(소부대권의도계) 젊은 아낙 바구니 이고 냇물을 건너려 하는데 赤子黃犬相追隨(적자황견상추수) 아이와 누렁이가 줄줄이 뒤따르네 이 한시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 영조 13~1805, 순조 5)의 <전가(田家)>입니다. 농촌 풍경을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지요. 젊은 아낙이 바구니를 인 채 냇물을 건너가려 하는데 그 뒤로 아이와 누렁이가 따라간다는 표현으로 시의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박지원은 청나라 고종 70살 축하사절의 수행원으로 따라가 압록강을 건너 북경ㆍ열하를 거치는 3천여 리를 목숨을 걸고 여행하고 돌아왔는데 이때의 견문을 정리해 쓴 책이 그 유명한 《열하일기(熱河日記)》입니다. 이 책을 국
[우리문화신문=김영조기자] 어제(3일) 오전, 10시부터 서울 종로구 AW컨벤션센터에서는 '3ㆍ1운동 100주년 민족대표보고회 및 전국화와 한반도 평화추진 선언식'이 열렸다. 천도교중앙총부 주최, 3ㆍ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주관, 문화체육관광부 후원으로 열린 이날 기념식에는 2019년 3ㆍ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를 앞두고 2016~2017년까지의 사업보고와 민족대표보고회를 겸한 자리였다. “3ㆍ1운동 100주년에 이정표로 삼은 ‘새로운 대한민국 100년’의 궁극적 목표를 이루는 길에 정부와 시민이 하나이며, 국내와 국외가 하나이며, 종교간, 계층간, 남녀간 경계가 따로 없습니다. 이야말로 선열들이 꿈꾸던 대한민국이며, 독립선언서에서 말한 양심의 발로에 뿌리박은 세계 개조의 큰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는 3ㆍ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박남수 상임대표가 개회사에서 당조한 말이다. 아울러 박남수 상임대표는 “100년전 하나 된 함성으로 한반도와 세계 곳곳을 태극기의 물결로 넘치게 한 3ㆍ1운동은 지나간 역사가 아니며 앞으로 세상을 살아갈 지혜이자 미래를 개척하는 비전입니다”라고 했다. 이날 행사는 1부와 2부로 나뉘어 진행되었는데 1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파랑ㆍ빨강ㆍ노랑ㆍ흰색ㆍ검정 등 다섯 가지 오방을 기본으로 사용하여 건축물에 여러 가지 무늬와 그림을 그려 아름답고 장엄하게 장식하는 단청은 궁궐 전각이나 절에만 있습니다. 단청은 단확(丹雘)ㆍ단벽(丹碧)ㆍ단록(丹綠)ㆍ진채(眞彩)ㆍ당채(唐彩)ㆍ오채(五彩)ㆍ화채(畫彩)ㆍ단칠(丹漆)이라고도 합니다. 단청은 건축물을 오래 보존하고 그 건축물이 지닌 특수성과 위엄을 강조하는 것은 물론 통일성과 다양성을 주는 구실을 하지요. 그러나 창덕궁에서 유일하게 단청이 없는 건물이 있습니다. 바로 1847년(헌종 13)에 중건된 낙선재(樂善齋)가 그곳인데 궁궐 건축물 가운데 사대부 주택형식의 건축물이지요. 헌종의 문집인 《원헌고(元軒稿)》에 있는 “낙선재 상량문(上樑文)”을 보면 헌종은 정조를 이어받고자 하는 뜻을 담아 낙선재를 세웠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헌종은 낙선재를 짓고 죽기까지 낙선재를 주요 활동공간으로 삼으며, 규장각을 세운 정조의 개혁정치를 본받으려 한 것입니다. 낙선재는 국권을 빼앗긴 조선 황실의 마지막을 보여주는 공간이기도 한데, 특히 황실 여인들이 최후를 마친 곳으로도 유명하지요. 낙선재는 1884년 갑신정변 직후 고종이 이곳을 집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경북 영양군 석보면 답곡리의 마을 뒷산에 가면 천연기념물 제399호 “영양 답곡리 만지송(萬枝松)”이 있습니다. 만지송은 아래에서부터 여러 가지가 부채처럼 펴지면서 자라는 반송의 하나인데, 나무의 가지가 아주 많아 ‘만지송’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만지송은 땅에서 50㎝까지만 한 줄기이며, 그 위부터는 줄기가 4개로 갈라져 올라가면서 매우 많은 가지가 여러 방향으로 뻗어 있지요. 만지송의 나이는 약 400살로 짐작되며, 높이가 12.1m, 둘레는 3.94m인데 오래된 나무임에도 가지가 많고 공 반쪽 모양처럼 둥글게 자라 모습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또한 잘 보존되어 있어 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을뿐더러 마을사람들의 신앙의 대상이었기에 민속적 가치가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습니다. 이 소나무에 전하는 전설에 따르면 옛날 어떤 장수가 전쟁에 나가기 전에 이 나무를 심으면서 자기의 생사를 점쳤다고 하여 ‘장수나무’라고도 불리며, 마을을 지키는 수호목으로 여겨 잘 보살피고 있지요. 지난해 9월에는 이 만지송이 언론을 탔습니다. 그것은 영양군과 산림환경연구원이 “만지송 후계목” 양성을 위한 업무협약을 맺었다는 것입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민간의 옛 늙은이가 한 가지 약초로 한 병을 치료하여 신통한 효력을 보는 것은, 그 땅의 성질에 적당한 약과 병이 서로 맞아서 그런 것 아닐까? ...... 오방(五方)이 모두 성질이 다르고, 천리면 풍속이 같지 않아, 평상시의 좋아하는 음식의 시고 짬과 차고 더움이 각각 다른 것이니, 병에 대한 약도 마땅히 방문을 달리해야 하며 구차하게 중국과 같이할 것이 없는 것이다. …… 향약을 써서 병을 고친다면 반드시 힘이 덜 들고 효염은 빠를 것이니, 이 《향약집성방》이 이루어진 것이 얼마나 백성에게 혜택을 주는 것인가?” 위는 세종 때 펴낸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에 나오는 말들입니다. 어떤 이는 한의학이 중국 중의학을 모방했다고 하지만, 이는 “사람의 몸과 그 사람이 태어난 고장의 흙은 하나라는 뜻의 '신토불이(身土不二)'를 모르는 소치입니다. 아무리 중의학이 뛰어나다 해도 그것이 우리 겨레에게 잘 맞을 리가 없기에 우리만의 의학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을 《향약집성방》은 가르쳐줍니다. 이는 중국 사람과 조선 사람은 소리와 기운이 달라서 말과 문자가 다르다며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과 같은 정신이지요. 《향약집성방》은 1433년(세종